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51화 (151/361)

151화 구멍섬

“진짜네, 진짜로 구멍이 있구먼요.”

“개구멍이라기엔 좀 많이 크군.”

좀 전에 섬을 빠져나온 강태준 일행은 다시 비박지 옆으로 이동해 텐트부터 설치했다. 군 생활에 익숙한 김광필과 서남현 수사관 덕분에 일행은 차 한잔할 시간도 되지 않아 뚝딱 텐트를 설치했다.

약속했던 배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일행이 도착하자 강태준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밀수 선박이 욕지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따라 3개 조로 나누고 지형조사부터 한다.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무전으로 연락하고. 현지인과의 접촉은 최소화하고 밀수선이 도착할 때까지 도착할 때까지 무기한 잠복한다.”

“자, 잠시만, 강 사장, 지금 여기서 잠복한다고 하셨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니. 굳이 사서 고생할 것까진 민가에 묵거나, 아님 숙소도 있을 텐데.”

“이런 좁은 섬에서 외부인이 장기간 투숙하면 의심을 사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여관이나 여인숙이 제일 위험합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불편하게 잠복할 이유는 없지 않나?”

얼굴이 파랗게 질린 신명부가 뭐라 하려고 했지만 강태준의 말이 빨랐다.

“불편해도 며칠만 참으십쇼. 비상식량이랑 침낭은 가져왔지? 복만아?”

“예. 형님.”

“특이상황이 발생하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교대근무를 하도록 하죠. 신 검사님께서도 푹 쉬어 두십시오.”

우거지상을 한 신명부로서는 저항하려 했지만, 수사요원들을 배치한 일행은 곧바로 잠복에 들어갔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해안가 절벽 위에서 해풍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하는 잠복근무는 견디기 힘든 중노동이었다.

강태준 일행은 2교대로 돌아가며 번을 섰다.

바닷바람이 매서워서인지 간간이 위장 텐트 안에서 간간이 눈을 붙였지만 모두 추위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잠복한 지 사흘, 석양이 잔영을 남긴 채 서서히 그 자취를 거둬 가자 바닥에서 튀어 오른 사람들은 용변 장소를 찾아 황급히 흩어졌다.

허리를 편 신명부가 주섬주섬 바지춤을 열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사람 할 짓이 못 되는구먼. 아주 삭신이 쑤시네.”

“그놈의 방광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오두방정입니까?”

광필이의 힐난에 당당한 신명부였다.

“자네도 내 나이 되어 봐. 전립선이 멀쩡한가?”

“글게 오기 부리지 마시고 텐트 안에 조용히 계시라니까요.”

“염치없이 그럴 수야 있나. 근디 한 것도 없이 출출하구먼. 뭐 요깃거리나 없나?”

“잠시만 기다리십쇼. 곧 황 서방이 올 겁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던 황 서방이 바께스를 들고 왔다. 은빛 바께스 안에 팔뚝만 한 크기의 고등어 서너 마리와 잡어가 펄떡거리고 있었다.

“이야, 능력 좋은데 벌써 몇 마리나 낚았구먼.”

“마침 입질할 시기라 타이밍이 좋았죠. 여기 요놈이 물건입니다. 덕분에 줄이 끊어질 뻔했습니다.”

아직 힘이 남았는지 괴로운 듯 꿈틀거리는 고등어가 꼬리로 물방울을 튀겼다. 살아 있는 고등어의 모습에 강태준이 말했다.

“고놈 튼실한데? 회 쳐 먹기 딱 좋겠구먼. 근데 밑반찬은 좀 있나?”

“뭐 별거 필요 있습니까. 근처 민박집에서 들러서 보리밥 한 솥이랑 묵은지 한 포기랑 나물 무친 것 좀 대충 구했습니다.”

“거 잘됐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굶을 수야 없지 않나. 그럼 밥이라도 먹고 합시다.”

어차피 배가 들어오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는 만큼 시간 날 때 든든히 먹어 두는 편이 좋다.

강태준이 숯 돌에 잘 갈린 회칼을 슬쩍 잡아드는 모습에 신명부가 물었다.

“아니. 강 사장, 지금 바로 뜨려고?”

“빨리 손질해야죠. 고등어는 좀 지나면 지 성질에 못 이겨서 죽어 버리거든요. 그럼 바로 부패해 버립니다. 두 마리는 회 쳐 먹고 나머지는 구이로 하죠.”

펄떡이던 고등어는 힘을 다 뺀 듯 아까보다 움직임이 둔해졌다. 강태준이 아직 살아 팔딱이는 녀석 두 마리를 깨끗한 돌 위에 올려놓고 능숙한 솜씨로 회를 떠냈다.

벗겨낸 껍질은 밝은 은빛으로 빛났다. 투명한 살이 전체적으로 희고 밝으면서 옅은 무지갯빛이 돌았다.

탱탱한 살이 오그라드는 광경에 신명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살아 있네, 살아 있어.”

“자, 여기 묵은지에 싸서 드시면 그냥…… 아마, 이런 건 못 먹어 보셨을 겁니다.”

묵은지에 마늘과 쌈장을 얹으니 과연 연어랑 광어를 섞은 것 같은 맛이 났다.

탄력 있는 육질에 적당한 지방기가 섞인 맛에 감탄을 내뱉는 신명부였다.

“와, 이거 아주 별미야 별미. 부둣가에 괭이 놈들이 고등어만 물어가던 이유가 있었구만.”

“고양이가 뭘 좀 아는 거죠.”

게 눈 감추듯 회를 처리하고, 남은 두 마리는 대충 소금구이로 하기로 했다. 몽돌을 숯불 위에 올려놓고 바삭하게 구워 내자 노릇노릇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돌판 위에 구워 내서 그런지 껍질도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익었다.

간이 짭짤한 고등어구이를 톳밥에 올려 먹으니 조화가 일품이었다. 밥도둑이 따로 없다고 할까. 입안에 들어간 뜨거운 밥을 후후 불던 신명부가 감탄을 연발했다.

“이야. 어머니 맛이군. 마누라한테 종종 해 달래야겠는걸.”

“에이. 고등어라고 다 같은 고등어가 아니지요. 이런 양품은 현지 아니면 못 구합니다.”

“그래?”

“사실 지금보다 한 달쯤 뒤가 더 맛있습니다. 수온이 내려가는 시점이라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더욱 기름지거든요. 뱃놈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죠.”

장정들이 먹기엔 부족한 양이라 뒤이어 국물용으로 따 온 거북손에 회 치고 남은 고등어 대가리, 그리고 소라와 작은 게를 넣어 팔팔 끓였다. 미나리와 무 등 민박집에서 받아 온 신선한 식자재에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센 불에 졸이자 매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뜨끈한 국물이 팔팔 끓어 가는 사이. 강태준을 비롯한 사람들은 타탓거리는 모닥불의 잔해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달아오른 돌 밑으로 욕지도에서 공수한 고구마를 넣어 구웠다. 대원들이 고구마가 타지 않게 장작불을 뒤적거리는 동안, 기다리기 무료했던 신명부가 슬쩍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서 수사관께선 왜 감시과같이 험한 곳에 오셨소? 관세직 공무원 1기 중 성적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걸로 아는데?”

“아이구. 황송하구먼요. 그사이. 내 뒷조사까지 하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이에 대충은 알아 둬야 할 거 같아서요. 솔직히 감시과 하면 웬만한 세관 공무원은 피하고 싶어 하는 부서 아닙니까?”

“그러게요. 아까 나무 꺾고, 텐트 치는 솜씨와 몸놀림이나 움직임을 보니 한 끗발 날렸던 분 같은데.”

강태준으로서도 솔직히 의문이었다. 아까 험한 산행을 하면서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터라 꽤 관심이 갔던 것. 그 말에 너털웃음을 짓는 서남현이 답했다.

“허허. 다 지금 와서 뭣이 중요하겠습니까. 다 지난 일이지요.”

“뭐. 이쯤 와서 숨길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썰이라도 풀어 주십쇼.”

그사이 조림이 대략 완성되자 강태준이 반합에 고등어와 잡어 살코기를 가득 담은 조림 국물을 국자로 떠서 건네주었다.

김이 나는 반합을 건네받은 서남현이 언 손을 녹이려는 양 조심스럽게 반합을 쥐었다.

뜨끈한 국물을 한 모금 음미한 그가 젓가락을 저으며 운을 떼었다.

“뭐 이제 와 털어놓으면 한때 군에 몸담았던 적이 있긴 했죠. 6.25 직후 학도병으로 징집되었으니. 근데 수도 수복 후에 돌아와 보니 집 앞에 새하얀 천들이 걸려 있더군요. 알고 보니 빨갱이 놈들이 우리 집안 사람들을 다 도륙한 겁니다.”

“저런.”

“그래서 홧김에 미군 특작 부대에 지원했지요. 복수하고 싶었거든요.”

역시 군 경험으로는 서러운 광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특작 부대라면? 거기서 무슨 역할을 맡았습니까?”

“서류상 없는 부대였지요. 공중 폭격 지원이나 함포가 닿을 수 없는 전략 시설을 찾아내서 폭파하거나 후방 침투하는 역할이랄까. 뭐 한동안은 훈련만 독하게 받다 실전 투입된 횟수는 손에 꼽습니다. 근데 갑자기 어느 날 전 부대 소집 명령이 떨어지더군요.”

“오, 대규모 작전입니까?”

그 말에 서남현이 피식 웃었다.

“아니, 갑자기 소집해제를 하더이다. 훈련받느라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몰랐는데, 급하게 종전이 되었지 뭐요. 퇴직금 하나 없이 딱 여비만 챙겨 주더구먼.”

“허망했겠군요.”

“허탈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더군요. 일단 맨몸으로 내쫓긴 셈 아니요. 근데 막상 사회 나가 보니 막막하더만. 취직을 하려 해도 뭘 알아야지. 신원보증 서줄 사람도 없으니 뭐. 진짜 혈혈단신이라는 느낌이 팍팍 나더이다.”

“군에서 배운 게 있지 않습니까?

“사람 죽이는 기술 따윈 하등 사회에서 쓸모없지 않습니까. 학도병으로 징집된 덕에 졸업장 하나 못 받아 왔으니 가방끈도 짧고. 그렇다고 서류상으로만 있는 특작부대 군경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노가다 뛰다 몇 번 취직에 실패하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여기 광필이 이 친구도 군에 고생했는데, 서 수사관님도 생각보다 갖은 고생을 다 해 봤네요. 근데 어찌해서 세관직 중에 말직인 감시과에서 근무하시게 된 겁니까?”

“말하자면 깁니다. 계속 취직에 실패하다 보니 여기 한국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본 건너가서 학업을 마저 끝내기로 했지요. 나름 인텔리셨던 할아버지께 어릴 때부터 배웠던 터라 일본어는 곧잘 했으니까요. 근데 방법이 당최 없어 막막하더군요. 고심을 거듭하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유일한 방법은 밀항뿐이란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밀항을 시도해 보셨습니까?”

“못 했죠. 일단 밀항해도 그 뒤가 더 문제 아닙니까. 일단 도착해서 입학을 한다 해도 등록금 정도는 있어야잖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우연히 면사무소 게시판 한쪽에 세관직 1기를 모집한다는 모집 전단이 눈에 띄더이다.”

“오 그래서. 세관직에 지원하신 거군요.”

“짱구를 굴려 보니 세관 공무원이 되면 일단 입에 풀칠도 하고, 잘하면 감시선을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시선을 타서 대마도 인근까지 갈 일도 생기면 그때 옮겨 타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특수 부대에서 갈고닦은 수영 실력으로 3마일 정도는 헤엄쳐 가면 된다는 계산이 섰지요.”

어이가 없어진 김광필이 다시 물었다.

“아니 감시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려고요? 그건 너무 무모한 생각 같은데…….”

“뭐 현실성을 따졌다면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암튼 일단 목표를 잡았으니 공부를 해야겠는데 공부할 책이 없더군요. 그래서 그냥 책방 주인한테 물어보고 딱 한 권만 사서 한 달간 딸딸 외웠는데 반이 똑같이 나오더라고요.”

“대박이네요. 그거.”

“내 생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지요. 시험에 합격하고 2주간 부산 세관 수련원에서 연수받고, 출근 첫날 연안 부두에 달려갔던가. 근데 도착해 보니 감시선은 없고 휑한 거요. 사정을 알아보니 감시선이랍시고 남아 있는 건 예전 총독부에서 사용하던 80톤급 기선 한 대가 전부더군요.”

3,500명 중 70대1의 경쟁률을 뚫고 기적적으로 합격했지만 서남현이 느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감시선을 타고 출항하는 순간만을 노리고 계획했지만 마주한 현실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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