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8V-71 엔진
양쪽으로 찢어진 한 명이 향한 곳은 연안 부두 앞의 허름한 안전 가옥이었다. 출입구는 뻥 뚫려 있지만, 안쪽은 어둑한 것이 마치 폐건물처럼 어두운 분위기.
희미하게 조명이 켜진 사무실을 지나, 벽면을 가린 방구석 철문을 열자. 쇠로 된 책걸상과 급조한 도청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사람 하나가 망원경으로 번갈아 가며 해안가 바깥을 감시하는 사이, 다른 두 명은 헤드셋을 끼고 라디오를 듣고 있다.
모서리 한쪽에서는 치직거리는 테이프 소리가 돌아가고 감도가 좋지 않은 전화국에서 전화선 너머로 두 남자의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벙거지를 벗은 춘삼이가 쪽지를 내밀자, 라디오에 집중하던 강태준이 헤드셋을 벗었다.
“어 이제 왔나?”
“예. 여기 적어 왔습니다.”
“수고했다.”
어깨를 두드린 강태준이 안경을 꺼내며 쪽지를 살폈다. 며칠 밤을 샌 것인지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 밑이 퀭했다. 적어 온 쪽지의 내용을 펼치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같이 쪽지 내용을 읽어 본 김광필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냥 일상 대화 같은데. 또 허탕 아닙니까?”
“아니지. 굳이 시간 들여 멀리서 찾아올 이유가 있나? 수배 풀렸다고 바로 건너올 때는 뭔가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흠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어디 보자, 마누라가 쌍둥이를 배었다는 말은 분선이 두척이란 뜻 같고, 곧 대마도에서 배가 건너온다 이건가. 그다음은…… 굳이 뱃놈이 안 어울리게 문자 쓰는 것도 수상하군.”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방 과장한테 연락해서 지금 부로 소세키가 나온 잡지나 출판물은 다 뒤져 봐.”
여수에 나온 출판물을 싹 뒤지라니. 당최 이유를 알 수 없는 명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형님, 여기 찾았습니다. 신문에 나쓰메 소세키가 호토토기스라는 잡지에 자기 첫 작품을 기고했는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두견새라고 한다더이다. 근데 찾아보니 한국에도 마침 두견새라는 잡지가 딱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 그쪽에서 문고판은 하나 낸답니다.”
“문고판은 무슨 해적판이겠군. 그래서 출시 날짜는?”
“9월 12일입니다. 행사 기간이 공교롭게도 10일부터 16일까지랍니다.”
시간대를 살펴보니 소세키가 첫 작품을 썼을 때부터 죽을 날짜의 일자랑 교묘하게 일치한다. 출시를 알리는 광고에는 초판만 백 육십만 부가 넘게 팔린 책이라고 거하게 홍보하고 있는 것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식의 암호를 쓰다니. 밀수왕이란 인간이 꽤 감수성이 풍부한 놈인가 보군요.”
“단지 여자 잘 후리는 수준이 아니라, 대빵을 해 먹으려면 단순히 입 잘 터는 수준으로는 부족하지.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군. 백육십만 달러라. 규모가 꽤 큰걸.”
“그런데 일정이 정확하지 않은데요?”
“나름 안전장치지. 날짜를 특정하면 걸릴 확률도 높고, 기상도 봐야 하니 기후가 적당할 때를 노려 비집고 들어오겠다는 거지.”
“가장 빠른 일자로 생각하면, 밀수선이 들어 올 때까지 대략 20일 정도 남았군요.”
“그럼 어디로 올까요?”
“그 큰 배가 들어올 길은 빤하지 않나, 이즈하라항에서 출발하면, 대충 10~12시쯤에 남해 욕지도 방면으로 들어오겠군.”
일본에서 돌아오는 선박은 항행 도중 주기적으로 위치보고를 하게 돼 있다. 지금 동경 몇 도, 북위 몇도 지점. 대마도 앞을 몇 시에 지났다…… 하는 식으로. 시간대만 대충 가늠하면 추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 거의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군.”
간만에 큰 사건을 맡은 신 검사는 벌써 대어를 잡았다는 듯 들뜬 얼굴이었지만 서남현 수사관은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계획대로만 되면 좋겠다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게 무슨 소리요?”
“그렇게 잡기 쉽지 않습니다. 놈들 배는 감시선에 비해 속도가 월등히 빠르니까요. 특공선을 쫓기 위해 감시선이 출동하면 벌써 섬을 돌아 물거품만 남기고 있을 정도죠.”
“속도에서 그렇게나 차이가 난다고?”
어이없어하는 신명부의 말에 서남현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현실이죠. 애초에 엔진 성능이 워낙 차이가 나니까요. 특공대 밀수는 10톤 남짓한 소형 목선에 픽업 차량용 엔진을 탑재해서 순간 속도가 30노트가 넘습니다. 최고 속력 이래 봐야 18노트 정도인 세관 감시선이 밀수선을 포획하려면 밀수선의 엔진이 중간에 고장 나거나 과열되기 일쑤죠”
“그럼, 따로 배를 빌리거나, 감시선 구동 엔진만 따로 올리면 되지 않소?”
“퍽 이나. 그게 가능하면 벌써 했죠. 애초에 제대로 출력을 내는 엔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요. 그리고 그런 빠른 배가 이 근방에 있겠습니까?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판에 그렇게 행동하면 들키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한마디로 잠복해서 잡지 못하면…….”
“힘들죠. 해상에서 추적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애써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고. 말을 듣던 사람들도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위치나 시간을 파악하더라도 도망쳐 버리면 그만이지 않는가.
밀수선을 적발해도 쫓아갈 수 없으면 잡을 방법이 없다. 신명부의 표정도 더욱 어두워졌다.
“그럼 이제껏 완전 삽질한 거로군. 이제 어떡하란 소리요?”
“운이 닿길 바라는 수밖에요. 가능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육지에 상륙하게 만들어야죠.”
모두 갑갑한 듯 한숨을 쉬는 사람들. 혼자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보던 강태준이 말을 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강 사장.”
“마침, 우리가 운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소리죠.”
지평선을 주시하던 강태준이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저편에서 깜빡이는 통통배 두 척이 보였다. 밖으로 나가자 물살을 가르는 선박은 벌써 부둣가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한 복만이가 부두에 도착해 계류색을 잡아 던지자. 줄을 휘어잡은 강태준이 능숙하게 볼라드에 휘어 감았다.
가볍게 뭍 위로 착지한 복만이가 강태준과 해후를 나누었다.
“형님! 이거 간만에 뵙네요.”
“그간 살이 쪽 빠졌네. 거 뱃살은 어따 두고 왔나?”
“죄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형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숨돌릴 틈도 없이 모터보트에 엔진까지 구해 오라니, 날짜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압니까?”
“그래도 용케 해냈구먼.”
복만이가 너스레를 떨자, 뒤따라 온 황 서방이 대꾸했다.
“복만이 야가 애 좀 썼습니다요. 배 구하고, 설비랑 공구리 좀 챙겨 오느라 늦었지요. 지도 간만에 인사차 들렀습다요.”
“아이쿠야. 이거 황 서방도 오랜만이군. 이게 대체 몇 년 만인가?”
“한…… 칠 년쯤 되었나? 그간 어깨너머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요. 돌아가신 어르신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아직 멀었지. 이번에 여객선도 3척으로 늘렸다는데, 뭐 어려운 점은 없고?”
한결 건장해진 체구의 황 서방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펴주신 덕에 별문제는 없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머구리선도 이번에 허가를 결국 받았습니다.”
“이야, 수완이 좋구먼. 역시 내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군.”
잠수기 어업은 53년 이래로 제도화된 이후 점차 이권화되고 있어 새로 면허 발급이 어려웠던 만큼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황 서방과 서로 인사를 나눈 강태준이 가져온 배를 돌아보곤 반가운 듯 갑판을 쓰다듬었다.
“이거 무안호 아닌가. 아직 현역일 줄은 몰랐군.”
“원체 노후한 배라. 원래 분해해서 폐선처리나 할까 했는데, 당최 정이 가서 버릴 수가 있어야 말입니다. 처리에 비용도 들고 해서 대충 연안용으로만 돌렸습니다. 살펴보니 아직 용골도 멀쩡한 게 아직 쓸 만하더군요.”
“그러면 엔진은?”
황 서방이 방수천을 걷자, 자동차용 디젤 엔진이 눈에 띄었다.
“커민스에서 만든 엔진입니다. 철도청에 있던 트럭에서 떼 왔습죠. 밀수꾼들이 주로 쓰는 쉐보레 픽업 엘카미노(V8 185마력)보다는 출력이 좀 작지만, 안전성이나 지구력 면에서 훨씬 괜찮다네요.”
“흠, 170마력짜리군. 이것도 중고품인가?”
“예. 사실 연차는 3년도 안 된 겁니다. 개조용 키트도 따로 구해 왔습니다.”
요리조리 엔진을 살펴보던 강태준이 약간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흠 변속기를 달면 속도를 좀 더 높일 수는 있겠지만 기본 출력이 딸려서 조금 아쉽군. 좀 더 그럴듯한 물건은 없나? 이 수준으론 특공선을 따라잡긴 좀 힘들 거 같은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출력에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자 복만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그럴 줄 알고 제가 한 대 더 준비했죠. 자, 짜잔!”
방수천을 걷고 나온 검은 동체는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처럼 반들반들 윤이 났다. 4기통으로 된 GM 버스 엔진은 딱 보기에도 대형기에 어울리는 크기. 새 엔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자 강태준이 말했다.
“이건 디젤 8V-71이군. 미국 그레이하운드 버스 엔진 아닌가? 고속버스용으로 아는데.”
“네. 디트로이트 사 물건입니다. 318마력짜리인데 미국 본토를 24시간 주행해도 끄떡없을 만큼 내구성이 보장된 녀석이지요.”
“미국 내수용으로 쓰는 물건이라 수출이 제한된 물건인데 이걸 어떻게 구했나?”
“지도 몰랐던 사실인데 그간 부산 하야리야 부대에서 군용 버스로 사용하고 있었더군요. 근데 추풍령고개를 넘어오다 눈길에 미끄러져 구르는 바람에 차체가 완전히 박살 났지 뭡니까. 딱히 재활용하기엔 부품도 없고 해서 폐차처리 하려던 걸 도합 삼백 달러에 구했습니다. 미군부대 근무 때 쌓은 인맥 좀 썼지요.”
“300달러면 거저나 다름없는데? 근디 사고 낸 물건이라 괜찮은가?”
“다행히 엔진은 무사했나 봅니다. 시범 주행도 몇 번이나 해 봤습니다만 이상 없었습니다. 성능은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그제야 한결 마음을 놓은 서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확실히 든든하군요. 그런데, 이거 그냥 붙일 수 없을 텐데요. 토크 조절도 필요하고, 물이 들어가지 않으려면 개조를 해야 하지 않나?”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래서 전문가들을 불렀으니까요.”
강태준의 장담대로 복만이가 도착한 후 만 하루가 되지 않아 박진환을 비롯한 카발수리소 멤버들이 속속 도착했다. 도착과 즉시 엔진부터 확인한 박진환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고속버스 엔진이라니. 진짜 이런 걸 배에 붙이려고?”
“네네. 특공선 잡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개조용 설계 도면은 갖고 오셨습니까?”
“물론이지. 근데 이거 생각보다 출력이 너무 높은데, 이런 걸 배에 그대로 달면 배가 확 그냥 뒤집혀 버릴지도 몰라.”
“네네. 그래서 구상선수 개조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앞부분을 동그랗게 깎아서 안전성을 강화하면 좀 낫지 않겠습니까?”
구상선수는 파도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선박 앞머리 하단부에 불쑥 튀어나오도록 만든 부분을 말한다. 꽤 대담한 제안에 놀란 듯 박진환의 눈이 커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