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숨겨진 창고
‘역시나, 밑창이 제법 닳아 있군. 분선을 타던 놈들이란 건가?’
애써 태연한 척하는 그들이었지만, 강태준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피칭이 심한 소형 선박의 선원들은 움직임에 따라 신발의 양쪽 끝이 먼저 닳지만, 아래위로 롤링하는 중형 선박은 무의식으로 발뒤꿈치에 온 힘을 실을 수밖에 없어 뒤꿈치 부분이 먼저 닳는 구조로 되어 있다. 창고에만 근무하는 직원들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자, 과연 창고 안의 구조가 묘하게 선박 내부와 무척 닮았다.
“이거는 폐선에서 선박 골조 떼어다가 그대로 붙인 거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뭔가 익숙하군요.”
천장엔 공조용 설비와 전선은 물론 상하수도 배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잠시 후, 각자 방으로 흩어졌던 수사요원들이 하나둘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뭔가 찾았나?”
“아니요. 이쪽은 별거 없네요. 깨끗합니다. 방 한켠에 화목용 목재랑 시멘트 포대만 왕창 쌓여 있는데요.”
“그래? 함 보지.”
과연 실내에 밀수품으로 보이는 물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방문 손잡이나 산업용 표백제, 전화기와 선풍기, 일제 라디오 몇 대 정도가 전부였던 것.
잠시 후 2층을 확인하고 돌아온 춘삼이 일행도 고개를 저었다.
“옥상 물탱크에도 달리 빈 곳이나 시설물 같은 건 없습니다.”
“지하층이나 천장은 꼼꼼히 살펴봤나?”
“딱히 문제 될 만한 곳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1층부터 다시 살펴봐.”
강태준은 찬찬히 다시 처음부터 방안을 뒤졌다. 칸막이로 나누어진 사무실과 창고를 돌아, 조리기구와 간단한 부엌이 구비된 탕비실을 지나가니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 하나가 나왔다. 군대 기숙사처럼 생긴 방 안에 널브러진 침낭과 함께, 철제 락커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연기처럼 훅 들어오는 홀아비 냄새에 코를 틀어쥐는 김광필이였다.
“어이구, 냄새. 거 향 놔두고 뭣 하나. 아님 숯덩이라도 갖다 놓던지.”
“그게. 경비원들이 야근할 때 쓰는 곳이라…… 정리 못 해 죄송합니다.”
민망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책임자였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서남현 역시 역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강태준은 달랐다. 배를 타다 보면 각종 비린내나 체취에 익숙해지기 마련. 이 정도 냄새야 애교 수준 아닌가. 강태준은 그 불쾌한 체취 가운데 용접 냄새가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카발수리소에서 흔히 맡았던 카바이드 냄새. 뭔가를 직감한 강태준이 벽에 귀를 대고 두드려 보니 연못에 빠진 돌처럼 뭔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거 안이 비어 있군.’
미묘한 불협화음에 강태준이 이곳저곳을 두드려 보았다. 잠시 후 락커 앞에 멈춘 강태준이 이내 아까부터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직원을 콕 찍어 명했다.
“거기 너!”
“예?”
“이거, 락커 옆으로 밀어 봐.”
머뭇거리는 직원의 모습에 철제 락커를 옆으로 밀자 석고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감판을 미처 붙이지 못한 석고보드 뒤로 철판 자국이 등장하자 광필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얼씨구? 이런 창의력 대장들을 보았나? 요기 문을 하나 만들어 놨네?”
“여. 잔말 말고, 빨리 용접기 가져와서 불어.”
잠시 후 산소 용접기로 덧댄 철판을 뜯어내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숨겨진 비트 공간이 드러냈다.
퀴퀴한 냄새에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어이를 상실한 듯,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와따. 이거 보게. 아주 산을 쌓아 놨네, 쌓아 놨어.”
“이 시키들. 아주 조직적으로 해 먹었구먼.”
50여 평 남짓한 공간 안은 그야말로 물품의 보고였다. 손목시계와 화장품, 라디오, 선풍기, 오디오, 재봉틀, 자동차 부속품, 화학약품, 인견사 등의 물품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한쪽에는 OTSA라고 적힌 포대를 본 강태준. OTSA는 흔히 ‘사카린’이라고 불리는 감미료의 약자로 다들 누가 봐도 땔감과는 전혀 무관한 물건이었다.
광필이가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이야, 대단한데, 보로꾸로 문틈을 막아 벽체로 소리가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구만. 근데 형님은 무슨 개코도 아니고, 이런 걸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구조를 보니 뭔가 격실이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긴 하더라고. 대충 감이지.”
감탄하는 일동에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배를 타다 보면 세관원에게서 물건을 숨기는 거야 흔하디흔한 일이다. 대놓고 밀수를 하지는 않더라도 선원들 가운데는 항구에 들렀다 스리슬쩍 밀수품을 숨기고 타는 경우가 많았다.
적당한 경우에는 대충 넘어가지만 액수가 과하거나 깐깐한 세관원에 걸리기라도 하면 출항이 늦어지거나 거액의 벌금을 때려 맞는 경우도 빈번했다.
최악의 경우 기관장이 금괴 같은 귀금속을 기관실 연료탱크 안에 넣어 두고 들여오다 누유로 인하여, 큰 화재가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강태준은 선장이 된 후로 항상 코로 연료 냄새를 직접 맡아 희미한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밀수품이 적발되자, 죽상이 된 책임자가 다급하게 변명을 토해 냈다.
“하하. 그게 여기 이곳은 수입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혹시 누가 훔쳐 갈까 싶어서. 이렇게 보관을.”
“이 사람아 장난하나? 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오 그래? 그럼 확인해 보지. 껌 한 통 줘 봐라. 광필아.”
“껌이요?”
“그래 아무거나.”
횡설수설하는 녀석의 행동에 껌을 받은 강태준이 질겅질겅 씹었다. 잠시 후 단물이 빠진 껌을 뱉은 강태준이 양변기 앞으로 다가가더니 변기 안쪽 공간에 붙였다 떼었다.
잠시 후 껌 위로 생산 연도와 제조 일자가 찍혀 나오자 사람들이 오오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본 책임자가 입을 다물자 광필이가 이죽거렸다.
“아이구야. 도 선생. 내도 자네 말을 믿어 주고 싶은디 이거 우짤란가. 변기는 그런 소리를 안 하데?”
“그…… 그게.”
잠시 후, 밀실 한 곳에서 포대 갈기를 하던 봉투들까지 발견되자 책임자는 고개를 숙였다. 밀실 안에 간단한 취조실이 마련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용의자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긴장부터 풀어 주는 게 원칙이지만 애초에 작정하고 심문을 하러 온 만큼 분위기는 시종일관 삼엄했다. 급조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수사관의 강도 높은 심문이 진행되었다.
“싸게 털어놓으라니까. 임마. 이거 누가 시켰어.”
“아니, 검사님. 주인이 하는 일을 저 같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 지도 화주께서 시킨 대로 돈 받고 운반하여 보관한 죄밖에 없다니까요.”
“야. 니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저도 명의만 빌려주는 바지사장입니다요. 저 같은 놈이야 꼬리 자르기용 아니겠습니까? 윗선은 아예 뵙지도 못했어요.”
아주 오리발로 일관하려는 듯 책임자는 계속해서 발뺌하기 바빴다. 설득이 통하지 않자 약이 오른 서남현이 윽박질렀다.
“이 자식이 어렵게 가네. 이게 몰수로 끝날 일 같아? 야, 이 정도면 증거가 빼박이야. 너 콩밥 거하게 먹고 싶어?”
“어차피 제가 뭐라 해도 안 들으실 테니. 제가 뭐라 하겠습니까? 여기서 이렇게 조사하지 말고, 잡아가던지요. 요즘 같은 세상에 콩밥만 먹어도 감지덕지죠.”
수갑을 채우라는 듯 순순히 양팔을 들이미는 것이 배 째라는 기색이다. 어차피 빵 들어가 봐야 1, 2년 정도 살면 그만이니 그냥 몸으로 때우겠다는 수작.
뜻을 짐작한 서남현의 얼굴이 험악해지려는 찰나, 앞으로 나선 강태준이 상대의 어깨를 지그시 주무르며 슬쩍 웃었다.
뜻 모를 웃음에 떨떠름해진 녀석이 어깨를 빼며 본능적으로 움츠렸다.
“뭐. 뭡니까? 소름 끼치게.”
“아니 기특해서 말이야. 우리 똥국이가 꽤 의리가 있네. 근데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봐? 니 빵 들어가면 위에서 알아서 빼 줄 거 같아?”
“지,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저도 선량한 시민입니다. 애초에 조사를 하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도 못 자고 지금 몇 시간쨉니까 대체?”
화가 치민 신명부가 탁자를 꽝 하고 내리쳤다.
“불법이라굽쇼? 하 새끼가 꼭지 돌게 하네. 이걸 그냥 확!”
“아이구야. 검사님 참으십쇼. 이런 삼류한테 손 더럽힐 일 있습니까?”
넥타이를 풀어헤친 신명부가 열을 내자 서둘러 제지하는 서 수사관.
품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낸 강태준이 눈앞에 서류를 꺼내 던졌다.
“야, 니 글씨 읽을 줄은 알지?”
“뭔데 그러십니까?”
“그럼 눈깔 있음 읽어 봐. 졸음이 번쩍 가실 테니.”
반응이 영 시큰둥했던 녀석이 서류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굳었다.
강태준이 들이민 신임장에는 다름 아닌 박정명의 친필 서한으로 ‘밀수 합동 수사반’ 초대반장이라는 직함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위 사람은 최고 회의 의장을 대리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밀수 사범 등 특별 합동 수사를 하기 위해 선임하였기에 이 증을 제시하는 경우 육·해·공군은 물론이요, 대한민국 내의 모든 검·경 수사기관은 이 사람이 요구하는 바에 수명하여 따를 것.’
국가재건회의 명의의 신임장을 확인한 녀석이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에 강태준이 들고 있던 종이를 확 빼갔다.
“워어, 짜식이 손 떼라. 어디서 건방지게시리.”
“그, 그게 뭡니까?”
“뭐긴 뭐야. 수사상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된다는 프리패스권이여. 아닌 말로 해상에서 기관총을 난사해도 상관없다는 보증서 아니겠나?”
“네?”
“자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나?”
장난처럼 볼을 툭툭 치는 광필이의 행동에 녀석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린다.
목젖이 울렁거리고 눈빛이 불안한 모습이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눈치 빠른 광필이가 목 긋는 시늉을 하며 겁을 주었다.
“독박 쓰고 싶으면 써 뭐 근데 정치깡패 놈들도 단매에 작살 나는 판에 너 하나쯤은 즉결 처분해도 딱히 문제없지 않겠나?”
“즉결처분이라니 제가 무슨 큰 죄를 졌다고…….”
“윗선에서 불편하시다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 뭐 이대로 중정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면 복날 개처럼 처맞고, 최소 병신 돼서 나올 텐데. 원하면 개기던가.”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살려 주세요!.”
“그게 싫으면 같잖은 영웅 흉내 말고 협조하지. 어차피 하나뿐인 인생인데. 이렇게 훅 가기엔 아깝잖나?”
옆에서 교수형이니 총살이니 하며 여러 번 겁을 주자 얼굴이 하얘진 최동국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심리적으로 위축된 녀석의 아가리에서 곧 고해성사 같은 자백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똥국이 니는 그냥 보관책에 불과하다 이 말인가?”
“네 총책은 대마도의 이정길입니다. 지는 그냥 따까리 중의 따까리지요.”
“이정길? 그게 누군가?”
아무것도 모르는 신명부가 돌아보며 묻자 서남현이 아는 척을 했다.
“아, 이쪽 업계에서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 원래는 동대문서 대빵 노릇하던 임수환이 따까리였는데, 임수환이가 군사혁명 재판 때, 3.15부정선거 규탄 집회하던 고대 학생들 폭력진압에 연루되서 사형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대마도로 도망했다가 그쪽 유지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세를 급격히 불렸습니다.”
“조선인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다니 능력도 좋구먼.”
“예. 우리 쪽에서는 밀수 왕으로까지 불리는 사람입니다.”
대마도를 바탕으로 급격히 세를 불린 이정길은 특공대 밀수로 유명세를 떨친 인사다. 훤칠한 키에 미남인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머리 회전이 빨라 밀수왕으로까지 불리며 한때를 풍미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