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비즈니스 파트너
“야, 자식아, 내가 니랑 같이 일한 게 몇 년인데 그걸 몰라. 거울을 봐. 니 얼굴에 빡쳤다고 쓰여 있지. 그렇다고 앞뒤 모르고 들이받으면 되나. 혹 떡값 받은 놈이 없나 중정에서 파고 다니는 상황에, 당장 검사 옷 벗고 싶어?”
“그건 아닙니다만.”
“지금 같은 시국에 대체 무슨 깡이야. 감찰위 뜨면 다 털리는 거 몰라. 이미 너도 요주의자로 명단 올랐어 임마. 내가 진짜 너 땜시 못 살겠다.”
얼굴이 새파래진 신 검사가 떠듬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구라를 치겠냐. 임마 진짜 안 되겠네. 너 당분간 여수에 파견 좀 갔다 와라.”
“예? 부장님. 설마 저를 버리시는 건…….”
“임마, 말본새 하고는 내가 널 왜 버려? 몇 달만 갔다 오지. 사안 잠잠해지면 다시 부를 테니 머리 식히고 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게 신호였다던가. 영원히 짱박혀 있으란 소리를 그렇게 돌려 하다니. 밤에 이불을 찰 만큼 후회막심. 무조건 싹싹 빌며 버틸 것을.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죄로 좌천을 당했으니 복귀는 희박할 것이다.
성질 같아서는 때려치울 법도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이노무 여편네만 아니면 확.’
검사 타이틀에 집착하는 마누라에게는 여수 발령은 장기 출장이라 둘러대었지만 신명부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통 크게 서울 평창동의 2층 양옥집을 산 마누라 덕에 월급 통장은 고스란히 차압당했고 거기에 영혼까지 모은 비자금을 증권에 꼬라박았으니, 이제 몇 푼 안 되는 용돈으로 연명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거 생활을 몇 달 하니 좀이 쑤실 지경.
“스벌, 배고파 죽겠네. 배고파서 뒤지겠는데 왜 안 오는 거야?”
신명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무렵. 철가방을 든 녀석이 촐싹거리며 문을 열었다. 빈정이 상한 신명부가 째려보았지만, 철가방은 제 일에만 충실했다.
짜장면을 꺼내는 모습에 기분이 상한 신명부가 짐짓 시비를 걸었다.
“임마. 도대체 몇 분이야. 뱃가죽이 허리에 들러붙겠다. 글고 다꽝이 왜 이거밖에 없어?”
“에유, 검사님도 참. 맨날 보통에 1인분만 시키면서. 그런 말씀하심 좀 서운하죠. 검사님 아님 여기 배달도 안 합니다.”
“뭐? 이 자식이 뭘 잘했다고. 내 밥 먹는 사정까지 눈치를 보랴?”
“아이구야, 성질내지 마시고. 가끔 수사관님들과도 같이 드시면 좀 좋습니까? 여기 남은 쿠폰이니 쓰십쇼.”
눈치 빠른 철가방이 음식을 내려놓은 즉시 도망쳐 버리자 화낼 타이밍을 놓친 신명부가 한숨을 푹 쉬더니 짜장면을 다시 비볐다.
그렇게 대충 짜장을 비빈 그가 무의식중에 옆을 보는 순간 울컥했다. 짬뽕 국물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 자식이, 대한민국 검사를 뭘로 보고!”
양파가 적은 건 참아도 짬뽕 국물이 없는 건 선 넘었다. 분노가 폭발한 신명부가 성질을 내며 짜장면을 내려놓는 순간, 흰 와이셔츠 위로 짜장 소스가 요란하게 튀었다.
어이를 상실한 신명부가 헛웃음을 지었다.
“떠그럴! 이거 한 벌밖에 없는데.”
난리법석을 떨며 옷에 묻은 소스를 지워 내고 나니, 퉁퉁 분 면발들.
입맛도 없어진 신명부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배고픔에 하는 수 없이 젓가락을 드는 그였지만 이미 입맛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다.
궁상맞다는 생각에 젓가락을 뒤적거리던 중 다시 끼익 소리와 함께 불청객이 찾아왔다.
“어이쿠야, 여기 사무실 좋네. 경치 좋은 곳에 있구만요.”
“아니. 여기는 웬일로? 명동서 백화점 지배인 한다 들었는데.”
난초를 들고 온 김광필에 신 검사가 깜짝 놀랐다.
예전보다 훨씬 말끔해진 얼굴이 신색부터 훤하다. 저도 모르게 압박감을 느끼는 신명부와 달리 김광필이 살갑게 손을 잡았다.
“거래처랑 논의할 일이 있어서요. 사업차 들렸다 영감님이 계시단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몸이 허하실 거 같아서 보약도 한 첩 가져왔습니다.”
“허이구야. 이런 고마울 데가. 고맙네. 김 사장.”
“사장은 아니죠. 하하. 근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사님께서 지금 뭐 하고 계십니까?”
“아. 그게 점심 식사를 좀 하는 중이었지. 흠흠…….”
옷깃에 묻은 짜장 소스의 흔적에 괜스레 창피해진 신명부가 말을 더듬었다.
딱해 보인다는 표정의 김광필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명색이 대한민국 검사가 뭘 이렇게 허접하게 드십니까? 저도 마침 저도 식사 전이니 저랑 같이 가시지요. 제가 뻑적지근하게 한턱 쏘겠습니다.”
“아니 됐네. 아직 밀린 사건이 많아서.”
좌천당한 입장에 또 구설수에 오를까 망설이는 신 검사. 그 마음을 읽은 듯 김광필이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거, 부담 가지시지 마십시오. 어차피 저도 업무 추진비로 쓰는 거니 딱히 문제 될 거 없습니다.
“그…… 그럴까?”
“어서 가시죠. 제가 괜찮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야. 사양할 수 없지.”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 신명부가 도착한 곳은 새로 생긴 청요릿집이었다.
풍월루라는 이름으로 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하게 생긴 인테리어가 시각을 자극했다. 비녀를 올린 머리에 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다소곳하게 인사를 올리자, 대접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신명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점심부터 과하게 뭘 이런 곳을…….”
“대한민국 검사님이신데 가오가 있지, 격에 맞는 곳에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소개라니. 누구를?”
“그건 곧 아시게 되실 겁니다. 자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성큼 걸어간 김광필이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사립문을 열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얼굴을 본 신명부의 눈이 커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준입니다. 사전 양해도 없이 이렇게 모셔서 송구스럽습니다.”
“아, 아닙니다. 근데, 강 사장님이시라면 설마? 백경산업의?”
“예. 제 상관이신 분이죠. 저희 백경 그룹의 기둥이자, 창립자이신 강태준 사장님입니다.”
김광필의 소개에 강태준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기둥은 무슨. 악덕 상관이지요. 암튼 예전에 동생이 한동안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영감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세는 무슨요. 저야말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뵙게 될 줄은. 이거 준비도 없이 당황스럽네요.”
강태준의 칭찬에 신명부도 넙죽 고개를 숙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통성명을 나눈 강태준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하하, 차차 깊은 인사는 나중에, 출출하실 텐데, 그럼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강태준이 손뼉을 치자, 양장을 입은 종업원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음식을 든 여자들이 하나씩 요리를 내려놓자 향긋하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바삭하게 튀긴 광둥식 탕수육에 누룽지탕, 고기 기름이 둥둥 뜬 우육면.
잔칫상에 눈이 돌아간 신명부가 걸신들린 사람처럼 음식을 흡입하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던 광필이가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아이구야, 이거, 검사님께서 허기가 많이 지셨나 봅니다.”
“이거 손이 멈추지 않는군요…… 이 튀김은 바삭하고 매콤한 게 제 취향입니다. 근데 전혀 맵지 않네요.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건지?”
칭찬에 흐뭇해진 강태준이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했다.
“튀긴 두부 안에 고춧가루를 넣고 쪄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보리에 덖은 마늘을 넣으면 고소하고 풍미가 살아나지요.”
“오, 그래서 풋내가 없었군요. 거 요리에도 조예가 깊으신가 봅니다.”
“나름 식품회사 사장인데 이 정도 짬은 있어야죠. 게다가 이건 사실 용호루에서 전속 요리사가 만든 메뉴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매일같이 이런 호사라니 왕이 안 부럽겠습니다.”
“하하. 매일 이렇게 먹다가는 죽죠. 저도 특별한 때만 먹는 음식입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고개를 돌리자 흰 요리복을 입은 안연복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간장에 담긴 생선찜을 내려놓은 안연복이 팔팔 끓는 기름을 끼얹자. 촤악 소리를 내며 생선찜 위에 얹은 파채가 김을 뿜으며 향긋한 파 기름이 스며 나왔다.
자글자글 끓는 음향효과와 침샘을 자극하는 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 이건 비주얼이 참…….”
“오늘 갓 잡은 참돔에 매실액과 간장소스로 버무린 광둥식 생선찜입니다. 월계수와 끓인 술로 잡내를 잡고, 세 종류의 버섯으로 풍미를 살렸습니다.”
큼직한 참돔에 칼집이 세 자국으로 난 것이 참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간장 푹 담긴 생선을 찍어 맛을 보니, 은은한 레몬향이 났다.
파채를 올린 생선 살이 담백하면서도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간만에 포식하네요.”
“식사도 거르고 일하시다니 불철주야 고생이 많으십니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내려오게 된 겁니까?”
“그게…… 말하자면 사정이 깁니다.”
처음에는 말을 아끼던 신 검사였지만 56도짜리 고량주에 술기운이 올라오니 점점 긴장이 풀렸다.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신명부가 주저리주저리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사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표적 수사를 했답시고. 이런 깡촌으로 좌천시키다니. 말이 됩니까? 피해자가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니. 수십억이 증발했는데 그게 그냥 한마디로 퉁 칠 일입니까?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어디 지도 찔리는 게 있는 건지.”
“세상이 썩어서 그렇죠. 원래 소신 있는 사람일수록 홀대받는 세상이잖습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이건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되었어요. 대한민국 검사가 정권의 개가 돼야 하겠습니까? 제가 군바리 따까리나 하자고 고시 본 게 아니지 말입니다.”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에 눈치를 보는 김광필이었지만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한 신명부는 재차 울분을 토했다.
그에 호응하듯 강태준도 슬그머니 말을 덧붙였다.
“밥 먹고 살기가 녹록지 않지요. 사실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요새 승승장구하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대기업과 경쟁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마케팅 덕분에 지출이 엄청나지요.”
“아, 그 MSG 광고 말씀이시군요. 순금 반지라니 혹하던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은 강태준이 쓸쓸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희로서는 사실 출혈경쟁이죠. 총력을 다해 싸우고는 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덩치가 작은 저희가 먼저 말라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오성과는 체급이 다른 상대니, 뒤에서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고 설비랑 원료까지 밀수하는 놈들을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밀수라고요?”
“뭐 새삼스럽게 다 아는 소리죠. 오성 쪽도 공공연하게 밀수에 손을 대고 있더군요. 원당 수입을 가장해서 수입하는 액수가 무려 수백만 불이나 된다는 소리도 들리더군요.”
“하하. 그건 너무 과장 아니겠습니까. 설마 그 정도까지 되겠습니까?”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현실이란 게 기대를 뛰어넘더군요.”
별로 믿지 않는 듯한 신명부에 강태준이 기다렸다는 듯 서류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뜬금없이 내민 봉투를 열어 본 그가 서류와 사진 몇 점을 확인하고는 말문이 막힌 듯 신음을 흘렸다.
“이건…….”
“여기 오성이 암시장에 개입했다는 정황 증거들입니다. 검사님도 아시겠습니다만 비정상적인 흐름이 보이더군요. 거기 보시면 제품의 일련번호들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국내 통관 절차를 받지 않은 물건들이 분명하더이다.”
“대마도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을 상납 받는다라.”
“저희 쪽에서는 대략 대마도 이즈하라항 쪽에서 전문밀수꾼들을 동원해 정기적으로 물량을 공급받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살피던 신 검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려놓은 신 검사가 부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꽤 꼼꼼한 자료군요. 하지만 이 정도는 오성이란 대어를 잡기엔 부족한데요. 이걸로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만…….”
“그래서 신 검사님처럼 정의감이 투철하신 분이 필요한 거죠. 밀수는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대 범죄 아니겠습니까? 특히 이런 조직적인 범죄는 더 그 질이 나쁘죠. 이런 부분에 검찰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은근한 권유에 신명부의 표정이 가늘어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