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오성의 도전
그러자 춘삼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네요. 설마하니, 사장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전부 예상하신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 만약 그랬다면 내 모가지가 어깨 위로 남아 있겠나. 날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아, 그렇습니까? 매번 족집게처럼 맞추시니 신기라도 있으신 줄 알고 말입니다.”
“뭐, 요새 증권파동이니 뭐니 분위가 흉흉하고, 경기가 개판이란 건 삼척동자도 알지 않나. 시절이 수상한 데는 이유가 있는 거고, 명동 사채시장에서 누군가 장난질을 치는 거라는 풍문도 돌고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차라리 현물을 들고 있는 쪽이 낫다 생각한 거지.”
강태준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광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천우신조군요. 암튼 이번 일 덕에 주식시장 정상화는 한동안 물 건너갔네요. 형님. 주식거래소도 무기한 휴장에 들어갈 테니 말입니다.”
“글쎄. 한동안은 시끌벅적하겠지. 그래도 뭐 전화위복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덕분에 우린 백화점 개조 공사할 시간을 벌었으니까. 일단 우리는 우리 일부터 처리하자고.”
휴식을 끝낸 강태준이 목장갑을 털며 일어났다. 사실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강태준 역시 이번 일의 최고 수혜자이기도 했다. 강태준은 귀국 전부터 착실하게 남은 자금을 모두 현물인 금과 달러로 바꿔 놓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이윤이 쏠쏠하네. 나중에 진중보 과장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겠군.’
사라호 사건에 대한 보은이랄까. 화폐개혁이 있을 것이란 것은 대략 예상했지만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진중보 항만 과장이 수상한 흐름이 있다 귀띔해 준 덕. 진중보가 해무청 시설국 소속인 덕분에 해외에서 새 지폐가 도달하는 시점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화폐개혁은 의도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보였다. 첫날부터 100환 이상의 구화폐 사용을 금지시켜 버리자 시중 자금이 전부 말라붙었고, 돈이 이 돌지 않자 전국의 산업 활동이 침체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17일까지 예입된 금액은 1,823억 환.
실제로 회수된 구권은 총 1,752억 환 정도로 총발행액 기준으로 볼 때 회수되지 않은 구권은 전체의 4프로가 조금 넘는 수준인 71만 환에 불과했다.
언뜻 보면 괜찮은 성적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100만 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고, 1억 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12억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 정권의 생각과 달리 이미 눈치 빠른 화교들은 돈을 현물 자산으로 변환시켜 놓은 뒤였고. 덕분에 기대했던 화교 자본의 회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사전 상의 없이 졸속으로 진행된 화폐개혁에 불같이 진노한 미국은 곧바로 외교부를 통해 항의서한을 보냈다.
“화폐개혁을 무효화하고 재정을 정상화시키시오. 추가로 당장 내달 부로 봉쇄한 예금 계정을 빨리 풀지 않으면 다음 달부터 아예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소.”
박정명의 실수만을 기다리고 있던 윤병선은 96% 현금이 합법적으로 교환됐다며 군부의 미숙함을 비꼬았고, 야당 국회의원들 역시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는 명목하에 무리한 화폐개혁을 추진해 쓸데없이 국민을 힘들게 하고 경제를 망쳐 놓았다며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박정명은 예치금이 반드시 합법적이지는 않으니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즉각 반박 성명을 냈지만 별로 의미는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의 엄포는 원조자금에 재정을 상당수 의존하고 있었던 박 정권의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일단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박정권에서는 예금 봉쇄를 단계적으로 해제하기로 합의했고, 지하자금을 끌어내 군사정부의 재정적자를 해소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거대한 삽질의 불똥이 튀긴 것은 증권거래소였다. 사태 수습 직후 화폐개혁 조치 명목으로 다시 휴장에 들어갔고, 두 차례 휴장을 거친 다음 7월 13일에야 문을 열었지만 8월 말 또다시 터진 태양증권의 결제 불이행 사태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증권거래소는 대증주 폭락 항의 집회와 이사장실 난입 등으로 이미 정상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졌다.
경제를 활성화는 고사하고 산업계의 자금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해 오히려 경제 침체만 더 가중된 것이다.
그사이 강태준은 도레미 백화점 공사에 열중했다. 물건값이 들쑥날쑥한 와중에 경기까지 마비된 상황이다 보니 어차피 장사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개조 공사에 열중하길 몇 달, 차차 멀어 보였던 리모델링도 이제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이야, 이제 백화점 옥상 화원이 거의 모양이 갖춰져 가네요.”
“그러게…… 프레임 위에 유리만 올리면 되겠네.”
땀을 훔친 강태준이 완성 직전의 온실을 찬찬히 감상했다. 파란 하늘 아래 비추는 햇빛이 투명한 유리를 투과해 보석처럼 빛이 나는 모습이 꽤 그럴듯했다. 운치 있게 꾸민 화초들을 보니 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 처음 계획과 다르게 철골조로 프레임을 짠 온실은 여러 번의 설계 변경을 거쳐, 약 250평 정도 규모로 늘어난 상황이었다.
공사 비용이 더 들기는 했지만 우순해 씨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내심 욕심이 나 야금야금 평수를 늘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돈이 땅 파서 나오냐며 잔소리를 지껄였던 광필이 역시 막상 결과물이 코앞에 다가오자, 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비용이 더 들긴 했지만, 근사하긴 합니다. 근데 정말 식용 작물까지 들여놓을 생각이십니까?”
“뭐, 다는 아니고 바깥쪽엔 좀 있어 보이는 걸로 치장해야지. 비주얼이 약하면 너무 빈약해 보이니, 전문 조경사를 부르던지 서울 인근 원예농원으로부터 위탁하여 계절별 화훼를 재배해서 공급받아 정원을 가꾸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네.”
“흠. 뭔가 체험장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건 봐 가면서 시도해야지. 온실을 운영하면서 화훼도 싸게 파는 편이 홍보하기 더 좋지 않겠나? 단순 관상용으로 그치지 말고. 고객들이 한 번쯤 와 보고 싶은 분위기가 나도록 말이야.”
강태준이 이렇게 온실을 과감하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 정책 실패로 불안해진 자산가들이 웃돈과 매매 수수료를 감수하면서까지 금을 비롯한 현물 자산을 대거 구입했기 때문이다. 미리 이 부분을 예측하고 자산 상당수를 현물로 전환해 두었던 강태준은 덕분에 꽤 짭짤하게 반사이익을 보았다.
다시 흘러내리는 땀에 강태준이 병에 든 얼음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뭐 우순해 씨한테는 시간 내서 찾아가 봐야겠어. 고추 농사와 원예농업 관련해 노하우도 전수받고 말이야.”
“에? 벌써요? 공사 끝난 지 얼마 되었다고. 김해까지 내려가겠다고요?”
“어차피 할 거 지금 해야지. 거제 쪽 멸치어장도 둘러봐야 하고 말이야. 권현망에 필요한 어선도 구해야 하고, 안 그런가? 동생?”
“에궁. 일복이 아주 터졌구만. 알았습니다. 알았어.”
광필이의 너스레에 사람들이 웃음을 지을 무렵 영업 문제로 나갔던 춘삼이가 뒤엔 흰옷을 입은 연구원들을 대거 대동한 채로 마침 밖에서 돌아왔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강태준은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뭐 일이라도 터졌어?”
“큰일 났습니다. 사장님.”
“그게, 무슨 일인데?”
“오성에서 신규 MSG 제품을 출시했답니다. 사장님!”
강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 역시 딱딱해졌다.
“벌써 말인가?”
“예. 벌써 판촉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아지노모토 사와 합작해 기습 출시했다는데, 제품명이 풍원이라고 지금 지방 소도시들부터 물량이 풀렸답니다.”
강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성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룹이고, 덩치만 해도 백경의 수십 배가 넘는 명실상부한 대기업이다. 그런 오성이 작정하고 들어왔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닌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강태준은 곧장 풍미 MSG 공장으로 향했다.
사전 보고가 올라왔는지 연구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흰 가운을 입은 안연복이 노기철 이사와 대책회의를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기철이 고개를 숙였다.
“아 오셨습니까? 사장님?”
“소식 들었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타사에서 신제품을 출시해서 지금 사태 파악에 있습니다.”
“거기 가양동 공장은 아직 삽도 푸지 않았잖아? 공사완공 후 제품 출시까지는 적어도 몇 년은 이상은 더 걸릴 거라 하지 않았나?”
“저도 그렇게 예상하긴 했는데, 저희가 점유율이 높아지니 위기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벌써 기술 제휴가 끝난 모양이더군요. 이게 그쪽에서 보낸 광고 카피입니다.”
손바닥 반장 크기의 삐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풍원을 구매하시는 고객님께, 구매액에 상응하여 구권을 가져오면 구매 금액만큼 신권을 교환해 드립니다.
광고지를 본 광필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뭡니까? 이건 작정하고 돈을 뿌리겠다는 거 아닙니까?”
“판매가 시작된 건 언제부터였나?”
“사흘 정도 지났으니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지 도소매상인들 가운데 인지도 있는 상인들과 합작해 일단 샘플부터 뿌린 모양입니다. 지방 깡촌부터 은밀하게 치고 들어왔더군요.”
“대도시가 아니라 지방부터 말인가?”
“아무래도 이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화폐개혁 때문에 어수선한 틈을 타서 치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일단 초기 손실은 감수하고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수작이군.”
강태준의 판단으로 볼 때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마케팅이었다. 시중에 회수하지 못한 구권이 많아야 71억 환에 불과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포장지까지 교묘하게 베낀 행태에 사람들을 혀를 내둘렀다.
“와, 이런 양아치 놈들을 봤나, 봉지에 프린팅된 모델 포즈까지 완벽하게 따라 했군요.”
“야, 보통내기가 아닌데요. 이거 깜빡하면 속겠습니다.”
60년대 초인 지금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들이 많은 만큼 문맹률이 높은 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은 동요하지 않고 안연복에게 다시 물었다.
“포장보다 내용물이 중요하지. 그래서 제품의 품질은 어떻습니까?”
“기존에 한국에서 생산하던 아지노모토 제품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수준입니다. 단순히 그냥 팔기보다 우리 입맛에 맞게끔 현지화를 했더군요. 설렁탕용으로 풍원을 감미해서 육수를 내 봤는데 한번 맛을 보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안연복이 아까부터 끓이고 있던 설렁탕 국물을 떠서 가져다주었다.
수저로 맛을 보니 처음에는 약간 조미료 냄새가 났지만, 혀끝에서 은은한 감칠맛이 감돈다.
너무나도 익숙한, 추억을 되새기는 맛에 강태준이 품평했다.
“지방질을 넣어서 기름지긴 한데. 자꾸 먹어 보니 묘하게 중독성이 있군요. 기름진데 느끼하지 않네요.”
“맞아. 분하지만 이거 맛있는데요. 뒤가 계속 당기는데?”
“밥 말아 먹기 좋겠습니다.”
“예. 과하지 않게 뒷맛을 제대로 살려 주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살짝 소고기 향을 첨가했더군요. 소고기 향을 넣은 건지, 이게 진짜 쇠고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을 공략하다니. 제대로 된 육고기나 생선을 사 먹을 수 없는 시절이다 보니. 열량이 높은 지방을 첨가하는 것도 나름 어필할 수 있는 요소였다.
소고기라 봐야 향이 조금 날 정도 수준에 불과했지만, 당시엔 이 정도만 해도 혁명적인 접근인 만큼 섬세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수저를 내려놓은 강태준이 노기철에게 물었다.
“이거 전문가의 터치군. 이거 누가 개발자죠?”
“임태웅이라는 사람이 개발 총책을 맡았다고 합니다. 원래 아지노모토 본사 소속 연구원인데 기술 전수 겸 건너왔다네요.”
“보통내기가 아니구만요. 근데 임태웅이라면 형님이 그렇게 찾던 그, 그 사람 아닙니까.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만? 언제부터 일본에 짱박혀 있었더랍니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김광필에 노기철이 대답했다.
“거의 5년 전부터요. 일본 체류 중에 아지노모토사로 스카웃되서 발효연구소에 있었답니다. 입사 2년 차에 과장급으로 승진해 승승장구했고, 근래 한국에 파견되면서 임원급으로 승진했다는군요. 이번에 한일 제휴가 이렇게 빨리 성사된 것도 다 그 덕이라는군요.”
“입사 5년 만에 임원급으로 승진? 조선인이 그게 가능한 일인가?”
“원래 교와 발효에서 개발 중이던 직접 발효법을 아지노모토에서 먼저 개발했는데. 교와보다 한발 앞서 완성시킨 공으로 승진했답니다.”
“발효법 개발에 손을 보탰다?”
“네네. 진짜 대단한 발상입니다. 코리네형 세균으로 이노신을 발효시킨 다음 그 균체의 ATP 재생계를 이용해 대장균과 공역 반응을 유도하는 방법을 알아냈답니다. 대장균이 이노신키나제를 공급하는 기제를 이용해 이노신이 IMP로 전환시키는 공정을 단축시킨 거지요.”
노기철은 무척 흥분한 기색이었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반쯤 알아먹지 못할 소리였지만 칭찬에 인색한 노기철이 인정할 정도라면 엄청난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