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39화 (139/361)

139화 화폐개혁

최소 3개월 어음결제를 기대했던 박상도 입장에서는 대단한 호의였다. 가뜩이나 운영자금이 달리던 차에 가뭄에 단비였던 것. 상대의 목소리가 바뀌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이런 거액을 현찰로 바로 결제하시다니, 통이 크십니다.”

“첫 거래에 어음거래는 좀 그렇잖습니까. 기성은 납품 후 1개월 이내에 결제토록 하겠습니다. 그럼 조명 샘플도 같이 보내 주시는 겁니다?”

“그 점은 걱정 마십쇼. 최상의 퀄리티를 보장하겠습니다.”

여유 자금이 생긴 박상도는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며 극진히 모셨다. 기분 좋게 거래를 마친 강태준은 미군부대를 통해 알루미늄 구조물과 온실 프레임에 필요한 고무 가스켓을 확보하기 위해 한 번 더 돌았다. 계약을 끝낸 춘삼이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리 자재는 다 구했군요. 이걸로 공사 일정을 앞당길 수 있겠습니다.”

“다행히 하루 안에 끝냈네. 너는 황철득 사장한테 연락해서 도비꾼들이랑 공사 인부들 좀 데려오라고 해. 외부벽면 유리 시공 경험 있는 사람들로. 그리고 남은 미수금 있으면 지금 처리해 놔.”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 춘삼이가 사라지자, 일 처리 속도에 혀를 내두른 광필이와 요한이 질렸다는 표정을 했다.

“업무 진행 속도가 광속이군요. 이 많은 걸 고작 사나흘 만에 해치우다니. 하지만 사장님, 이러면 회사 사내 보유고에 문제없습니까?”

“굳이 시간 끌 거 없이 빨리 처리하면 좋지 않나?”

“그래도 시간이 돈인데 지금처럼 인플레가 높은 시점에 현금결제로 외상까지 하는 건 거래업체들이 제대로 제품을 공급하기가 어렵지.”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죠.”

“좀 있으면 다 알게 돼. 너도 이번에 회사에서 보합비 한화 대신 달러로 받는 거, 내게 많이 고마워하게 될 거다.”

“네? 그게 무슨.”

강태준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소린지 고개를 갸웃한 김요한이었지만 의문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요일 자정, 정부에서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실시했던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명령에 따라 오늘 밤 자정을 기해 전격적으로 긴급 금융 조치 명령으로 화폐개혁 조치를 실시합니다. 오늘부로 환(圜) 표시의 화폐를 원(圓) 표시로 변경할 예정입니다. 또한 구권과 구권으로 표시된 각종 지급수단은 6월 17일까지 금융기관에 조속히 예입하시기를 권고하는 바입니다.

1962년 6월 10일 자정, 긴급통화조치라는 이름하에 화폐개혁이 공포되었다. 6월 10일부터 환의 유통을 금지하고 10환당 1원의 비율로 신화폐인 원화를 명목 절하해 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금융기관에서는 환화 표시 거래를 금지했고 6월 10일 이전에 발행된 수표. 어음 또는 우편환 증서 등은 금융기관에 신고하도록 했다. 6월17일까지 신고하지 않은 청구권은 무효로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한국은행 총재도 몰랐을 정도로 극비리로 진행된 화폐개혁 발표로 전국이 들끓었다.

서울 거리는 허둥지둥하는 시민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시장은 철시상태에 들어가 물건 사려는 사람들만 법석대는가 하면, 극장가나 유흥장은 완전히 문을 닫아 버렸다.

반대로 각 마을금고와 은행 앞은 구권을 신고하려는 사람이나 신규 화폐로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이른 아침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막상 구권을 교환하려고 해도 제대로 바꿔 주는 은행이 없자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아니 돈을 추가로 왜 안 바꿔 준다는 거요?”

“그게 정책상 내려온 결정입니다. 한 가구당 교환할 수 있는 돈은 5,000환이 한도입니다.”

“그럼 나머지 돈은 어쩌라고?”

“그 이상 금액은 은행에 예금하든지 아니면 국채를 사든지 해야죠. 6개월에서 1년 후에 찾을 수 있는 통장에 저축하거나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주식시장이 망해 뿌린지가 언젠데. 이게 뭔 개같은 소린가? 지금 시방 장난하나!”

“원칙이 그렇습니다…….”

“원칙! 시부랄, 무슨 놈의 정책이 그따윈가? 날강도도 그렇게는 안 해!”

홧김에 옷을 벗고 드러눕는 남자에 놀란 은행원이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아니 뭐 하시는 겁니까?”

“오냐. 시불 돈 받을 때까지 못 가는겨! 거, 한번 개망신 좀 당해 보시라고.”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시방, 그러면 돈 주던가? 쫄딱 망하게 생겼는데 내가 제정신이겠나.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매한가지여, 아주 사생결단을 내 보자고.”

여기저기 쌍욕이 오가고 고성이 터지는 등 난리법석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화폐개혁은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생활비에 한해 가구당 한 사람에게 5백 원 한도까지 바꿀 수 있다는 말에 다른 사람 명의로 돈을 바꾸려 하는 사람도 비일비재했다.

“저리 비켜, 빌어먹을 새끼들아!”

“내가 먼저야 내가!”

사회가 혼란해지자 통금 시간까지 앞당겨졌다. 귀가하는 시민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택시 기사가 구권은 이제 소용없다며 승차 거부를 했고, 포목상과 쌀집은 늦은 밤에도 현금을 들고 와 치마 저고릿감을 사거나 쌀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술에 취한 서민들은 행패를 부리기 일쑤.

갑작스런 개혁의 여파로 인해, 나라는 대혼란 자체였다. 지방에 화폐개혁을 알리고 신고하라는 전화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덕분에 공중전화는 죄다 불통이 되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구권 안 받습니다. 구권은 그건 이제 휴지로도 못 써요.”

“아니, 그럼 뭘 받는다는 거요?”

“딸라 아니면 엔화로 주십쇼.”

신권 교환 방법이나 교통 요금을 어떤 화폐로 사용할지 아무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권화폐 유통을 금지하자 혼란은 격화되었고, 생필품조차 구하기 몹시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상점이 철시한 10일, 더러 문을 연 상점에서는 평소의 2, 3배로 물건값을 올려 받았고, 문을 연 고깃간에서는 쇠고기 한 근에 4,000환씩 올려 팔았다.

계란 한 꾸러미에 420환에서 1,000환으로 폭등했고,

100환씩 받던 사이다 한 병은 다섯 배까지 값이 올랐다.

물가 폭등에 놀란 정부는 부랴부랴 단속반을 가동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흐르고 있었다. 사안의 심각성에 호응하듯 각 언론은 화폐개혁의 문제점과 그 과정에서 파생된 민심 이반을 1면 톱기사로 다루었다. 광필이가 혀를 쯧쯧 찼다.

“이때다 다들 건수 잡았는지 정권 때리기가 장난 아니네요. 재계에서 난리도 아닙니다. 어느 미친놈 대가리에서 나온 구상인지 다들 입이 근지러워서 안달복달이더군요.”

“그게 누구 머리에서 나왔겠나. 군바리 자식들이지.”

손칼로 참외를 잘라 먹던 김요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는 당최 이해가 안 됩니다. 대체 뭐가 아쉽다고 정부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정부가 돈이 없으니, 돈 나올 구석이 있나 찔러 본 거지.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경제를 정상화하려면 하루빨리 자금을 확보할 필요가 있으니까.”

광필이가 점심 대용으로 나온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지하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생각 아니었겠나. 지금 상황으로 봐서 의도와 달리 완전 새 된 거 같지만.”

“그러게 총질을 하거나 탱크는 몰아 봤어도 돈을 벌어 봤어야지. 월급만 타 먹던 새끼들이 경제를 뭘 알겠나.”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뒤지게 처맞기 전까진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고.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과 달리 경제 상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재원 확보에 난항을 겪으며 연일 재정적자로 허덕였고, 인플레는 다시 고점을 찍고 있었다. 그런 이중고에도 막상 쿠데타는 성공했으니 논공행상을 안 할 수도 없고, 여러모로 골이 아프던 상황. 돈 달라 칭얼대는 놈들은 득시글한데 딱히 나올 곳은 딱히 없으니 갑갑하던 찰나, 측근 하나의 호언장담이 화근이 된 것이다.

“각하, 더는 돈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부패자들과 화교들의 퇴장자금(현금다발을 금고에 보관한 자금)을 숨기고 있다고 하니 이참에 화폐개혁을 한다면 이 돈을 죄다 회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교들? 화교들이 그렇게 자산이 많다는 말인가?”

“밀수로 돈방석에 오른 놈들이 대부분 화교 놈들 아닙니까. 놈들이 벌어들인 돈이 전체 통화량의 3분의 1에 육박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은행을 불신하고 있지요. 꿍쳐 두고 있는 지하자금만 찾아도 숨통이 트일 것입니다.”

“그 말인즉, 놈들이 현금을 다발로 숨겨 놨을 테니, 지하자금을 양성화하자?”

“예. 예고 없이 화폐개혁을 단행한다면 화교들도 돈을 바꾸려고 은행에 올 수밖에 없겠죠. 그러면 못 이기는 척 절반만 돌려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놈들로서는 쫓겨나지 않으니 감지덕지고, 정부로서는 걷어야 할 세금을 확보하는 것이니만큼 정당한 거지요. 이것이야말로 대의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호오, 그거 나름 묘안이군. 임자, 그럼 책임지고 추진해 보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궁지에 몰린 박정명에게는 꽤 그럴듯한 소리로 들렸다. 그간 돈만 해 처먹으면서 나라에 해를 끼치던 벌레들이 한둘이던가.

이참에 뒷돈이나 챙겨 먹기 바쁜 화교 놈들을 박살 내고 재정을 확보한다면 그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던가.

물론,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만큼 계획의 진행은 모두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재무장관을 비롯하여 화폐개혁에 동원된 실무 관료들, 선원들은 기밀이 샐 경우 모두 총살형을 감수하겠다는 서약까지 한 것이다.

심지어 화폐개혁에 사용될 신권은 보안을 위해 영국에 의뢰해 제작되었다.

그렇게 부산항에 도착한 화폐는 폭발성 화학물질로 위장되었고,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한국은행 금고까지 옮겨졌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던 중 증권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어지러워지자 특단의 조치로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한 것이다.

화폐개혁은 주한 미국대사조차 48시간 전 통보를 받을 만큼 안보에 충실한 작전이었지만 본질적인 하자가 있었다. 그건 돈을 보관하는 화교들의 습성이었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는 화교들의 생리를 몰랐다는 점이지.”

“생리라 그게 뭡니까?”

“생각을 해 보게. 애초에 화교라 치면 대륙에서 쫓겨난 놈들 아닌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놈들로서는 유사시 챙기기도 힘든 지역 화폐를 뭉텅이로 보관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럼 사장님 말씀은 이번 개혁이 완전 헛짓거리였다 이겁니까?”

김요한의 말에 강태준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뭐,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 다만 화교들이 바보도 아니고, 언제든지 정권에 밉보이면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에 화폐를 다발로 꿍쳐 두고 있겠나? 그것도 달러도 아니고 원화처럼 불안정한 자산을? 모르긴 몰라도 장사로 돈 버는 족족 금괴 같은 현물로 바꿔 놨을 확률이 높지. 그래야 나중에 갖고 토끼기도 편하니 말이야.”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저도 한 일 년 가까이 도망치면서 살다 보니 환금성으로는 금이 최고더군요. 현금이야 까딱 잘못하면 추적당하지만, 금값은 만국 공통이니 말입니다.”

은근 동조하는 김요한에 광필이가 투덜거렸다.

“거, 듣고 보니 정권이 하는 짓이 정말 추잡스럽네요. 양아치가 삥을 뜯어도 이렇게는 안 할 텐데 말입니다요…….”

“원래 정치인이란 족속들이 반은 날도둑놈들이지. 피땀 흘려 번 세금을 지 호주머니에 처박고 마치 제 돈인 양 생색내는 게 특기 아닌가?”

“그러게요. 시발 돈을 걷었으면 잘 쓰던가. 애초부터 안 걷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어느 때나 물가를 올리거나, 세금을 올리는 건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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