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신한글라스
회사는 영등포 당산동에 있었다. 강태준이 메모를 주머니에 집어넣자 박 여사가 신신당부했다.
“조카 이름은 박상도야. 시간 날 때 바로 찾아가 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혼 문제 말인데 혹 쓸 만한 변호사가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쇼. 마침 제 내자 될 사람이 법관이기도 하고 주변에 법조인들도 많으니 그런 쪽으로 꽤 정통하거든요.”
“오. 그래? 마침 잘 되었네. 그럼 필요해지면 부탁할게.”
“네. 누님. 그리고 누님께서 좋은 정보를 주셨으니 저도 하나 더 조언 드리겠습니다. 지금 최대한 현금은 정리하고 달러화로 바꾸시죠. 그리고 원화보다는 금 같은 현물을 많이 들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은근한 권고에 박원숙이 반쯤 게슴츠레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흥, 뭐지 그 자신만만한 얼굴은? 어디 대단한 건수라도 물었어?”
“하하. 그건 죽어도 못 말하죠. 단지 곧 엄청난 일이 터질 거라는 것만 알아 두십쇼.”
“증권파동보다 더 큰 일인가?”
“정확히는 말 못 하죠. 나중에 제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알았어. 참고할게.”
인사를 마친 강태준이 떠날 무렵, 하늘은 땅거미가 앉아 어둑해지고 있었다.
박원숙 댁에서 나와 보니 차 안에는 숙면에 빠진 김요한이 코를 골고 있다.
창문을 두드리자 서둘러 침을 닦은 녀석이 허겁지겁 문을 열어 주었다.
“거, 운전기사가 팔자 좋구먼. 오래 기다렸냐?”
“아이쿠야, 죄송 이거 깜빡 잠들었네요. 끝나셨습니까?”
“대충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피곤하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한 서린 넋두리를 듣고 나니 진이 빠지는 기분.
돌아오는 길에 운전대를 잡은 김요한이 슬쩍 운을 떼었다.
“아까 보니 박 여사님, 얼굴에 그늘이 있던데. 혹시 무슨 큰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걸 또 언제 봤나?”
“들어오면서 얼핏 봤죠. 근데 가정생활이 순탄치 않아 보여서요. 부부관계가 파탄 직전 같던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에이, 척하면 척이죠. 결혼한 여자가 남편 따라가지 않고 혼자 이 큰 집에 살다니 뭔가 이상하잖습니까.”
등받이에 기댄 강태준이 팔짱을 낀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르는 척해. 남의 가정사에 함부로 관여하는 거 아니다.”
“그게 아니라, 혹시 두 분 헤어지면, 제가 한번 대시해 볼까 해서 그렇죠.”
“미친 자식. 박 여사가 몇 살인지 알고 하는 소리여?”
“사랑에 나이는 숫자일 뿐이죠. 액면가는 젊어 보이시던데? 접때 보니까 미모도 엄청나시고. 딱 제 스타일입니다.”
“허이구, 눈깔이 삐었구만. 기둥서방 노릇이나 하려고? 아서라 속셈 다 보인다.”
“에이 무슨 말씀을. 원래 부부란 한 몸 아닙니까. 저보다 마누라가 더 능력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내조하는 게 순리죠.”
“공처가 납셨네. 꿈 깨라. 박 여사 눈 높아. 너 같은 얼굴만 멀쩡한 놈팽이는 기만 빨리고 잡아먹히기 딱 이야.”
“에이, 형님, 그렇게 딱 자르지 마십쇼. 세상일이란 게 모르잖습니까?”
“임마, 다 형이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캡틴!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한 번만요.”
“안 들려! 나 잔다.”
“캡틴, 아니 강 사장님!
김요한에게 비닐하우스 문제를 위임한 강태준은 사흘 후 당산동을 다시 찾았다. 판유리공장의 급수탑이 공장의 상징물처럼 서 있는 곳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박상도 사장은 마중까지 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이렇게 와 주신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여기, 공장이 꽤 크군요.”
공장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부에 와 닿는 열기로 인해 숨이 턱 막혔다. 한낮의 아프리카처럼 숨이 턱 막히는 뜨거움에 사모아의 악몽이 떠오르는 강태준. 옆에서 춘삼이가 부채질을 해 주었다.
“후우, 여기는 숨 막히네요.”
“찜질방이 따로 없군.”
저장고에 저장된 원료들은 정량에 맞게 혼합된 후 용융로에 투입되고 있다. 석탄을 원료로 하는 가마에서 축열실을 통하여 버너로 연소 공기가 공급되면 연소가 일어나면. 이때 발생한 가스가 축열실을 가열하면서 외부로 열기를 뿜어내는 구조인 것이다.
1,600도가 넘는 용광로에 끓는 유리 물로 인해 마치 사우나를 연상케 한달까.
그냥 서 있어도 땀이 흐를 만큼 후덥지근한 곳에서 이마에 수건을 동여맨 직원들이 해장국 집 국물을 떠올리듯 기다란 쇠막대로 불순물을 잡아내고 있다.
수은계에 적힌 실내 온도는 무려 54도.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낸 강태준이 칭찬했다.
“품질 관리가 엄격하네요.”
“예. 저희는 규사부터 꼼꼼하게 골라서 만들어서 최대한 불량품이 없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규사는 어디서 공수합니까?”
“원래는 옹진 앞바다 걸 사용했는데, 근래에는 안면도에서 공수하고 있습니다. 파유리도 저희는 40프로 이하만 사용하고 있어서 불순물이 적지요.”
재료 관리는 이 정도면 합격이군. 속으로 점수를 매긴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병유리공장이었다 들었는데 대단하네요. 이 정도 규모의 롤러식 설비라니, 들여오기가 보통 수고가 아니었을 텐데요.”
“역시 큰 사업 하시는 분이니 바로 알아주시는군요. 사실 병용과는 가마가 달라서 오픈 크로스 화이어 탱크랑 설비까지 한꺼번에 들여오느라 무지 힘들었습니다.”
유리 물이 가공되는 과정은 꽤 진기한 풍경이었다. 탱크가마에서 용융된 유리 융액이 관을 타고 내려가자 두 개의 롤러가 서로 역방향으로 압연하며 판유리를 뽑아내었다.
크고 작은 롤러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자 가래떡처럼 눌려 나온 유리가 트레이를 따라 이동하는 광경에 강태준이 말했다.
“어째 보아하니 출판사랑 비슷한 면이 많군요. 실크스크린처럼 문양 넣기도 가능합니까?”
“네. 롤면에 무늬를 새기면 가능합니다. 회전하면서 유리면에 이 무늬가 새겨지게 할 수 있지요.”
“호오, 그럼 어느 정도 두께까지 재단 가능합니까?”
“표준 폭은 최대 1.8m, 두께는 6mm까지 가능한 수준입니다.”
“더 두껍게도 가능합니까?”
“겹쳐 붙이면 가능하지요. 공임비야 더 들겠지만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게 가공한 유리 단면입니다.”
목장갑을 낀 작업자가 완성된 유리판 하나를 가져왔다. 매끈해 보이는 유리판은 기포 하나 없이 투명했고 잘린 단면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강태준이 유심히 살펴보자 박상도가 자랑하듯 말했다.
“다이아 커터로 커팅한 후에 면 가공한 물건입니다. 자 보십시오. 매끈하죠?”
“이거, 꽤 물건이네요. 한일글라스에서 나온 판유리보다 훨씬 투명도가 좋군요.”
“어휴,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인천 공장에서 쓰는 프로콜 공법은 성형 과정상 내화물과 직접 접촉을 하기 때문에 표면 평탄도가 떨어집니다. 기포 불량이 많이 발생하고요. 하지만 저희 회사는 다르죠. 접착과정에서 해외에서 직수입한 퍼팅액을 도포해 윤활도 향상과 강도 증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박상도는 자부심이 대단한 듯 보였다. 실제로 그럴 만도 한 것이 플로팅 공법은 아니지만, 공장들 태반이 폐유리에 소다회를 섞어서 만드는 수준인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두 번째로 안내한 곳은 습식 몰드를 이용해 유리제품을 제조하는 공간이었다. 도가니 가마에서 수동으로 고급제품을 제조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백금 도가니에서 철봉 끝에 유리액을 덩어리로 말아 올린 다음 긴 금속 막대를 돌려 가며 공기를 불어 넣는 작업이 한창. 뜨거운 유리를 잘라 내어 토치로 가열한 다음, 유리가 말랑해진 동안 잘라서 평평하게 만들거나, 유리병에 약품을 뿌려서 크랙을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주문제작도 하나 보군요. 뭘 만드는 겁니까?”
“네네. 특수 유리제품으로 유리컵이나, 저건 전등입니다.”
“기계로는 못 합니까?”
“요구하는 사이즈가 다 달라서 기계로는 못 하고, 색깔을 입힌 뒤에 식히면서 굴려야 합니다.”
직원들은 중량표시가 된 틀을 보지도 않고 감각적으로 유리 물을 부어 넣고 있었다. 강태준이 묵직해 보이는 유리 물을 공처럼 아래위로 굴리며 늘여 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저건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데, 엄청 능숙해 보이는군요.”
“맥주병 수요가 늘기는 했지만, 아직 주문량이 많지 않아서 이것저것 하고 있지요. 다들 근속 연수가 10년 넘은 베테랑들이라 눈짓으로만 해도 대충 의미가 뭔지 압니다.”
“에이 엄살은, 말이 그렇지 바빠 보이는데요. 주문이 꽤 되나 봅니다.”
“주류 업계나 음료 업체 쪽에서 주문이 늘고 있지요. 페니실린 병 같은 의료용 유리도구나 신호등 같은 건 저희가 물량을 대고 있습니다.”
강태준이 유심히 보니 직원들 대부분 가위를 쥐는 왼쪽 손에 붉은 화상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피와 땀으로 일궈 낸 훈장이랄까. 몸에 화상 자국 하나 없는 사람은 되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아 보였다. 견학을 마친 다음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전시관처럼 갖가지 유리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소파에 마주 앉은 박상도가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저, 돌아본 소감은 어떠셨습니까?
“전반적으로 꽤 관리를 잘하셨더군요. 품질은 대략 확인했으니 꽤 믿음이 갑니다. 그럼 서로 주문량을 맞춰 보도록 할까요?”
강태준이 눈짓하자 함께 온 춘삼이가 도면을 펼쳤다.
“오, 이게 백화점 공사 도면입니까?”
“예. 1층을 제외하고, 2층 쇼케이스 상가 층이랑, 지하 전시실입니다. 이왕이면 폼 나는 느낌이 나게 유리 샹들리에를 설치하고, 매대도 전면 교체하고 싶습니다. 공사 일정은 일단 인테리어가 완료되고 난 뒤니 삼 주 뒤부터겠죠. 지하층부터 층별로 맞춰 주시면 됩니다.”
유심히 도면을 살핀 박상도가 턱을 쓸며 말했다.
“발주량이 상당하군요. 이 물량을 한 번에 공급하기엔 무리일 듯하고, 공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제작하는 편이 효율적이겠습니다. 공사할 장소를 나눠서 존별로 공급하는 게 합리적일 같은데요.”
“그거야 당연하죠. 그럼 초도 물량 들어올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적어도 한 달은 걸릴듯합니다. 다른 거래처에서 납품일이 임박한 주문 물량이 남아 있는 상태라 바로 주문 물량을 맞추기가 빠듯해서요.”
“흠, 그건 좀 빠듯한데 좀 당길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로서는 몇 안 되는 고정 거래처다 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요구되는 강도와 두께가 10밀리 이상이 상당수다 보니, 마감처리나 품질 관리 부분에서 추가 검토가 필요할 겁니다.”
어물대며 말을 흐리는 것이 내심 뭔가 바라는 분위기다.
눈치 빠른 강태준이 은근하게 말했다.
“원하던 품질로 제때 납기를 맞춰 주신다면 정기 주문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공사와는 별도로 저희가 식품 사업도 하는 중이라. 아무래도 식음료용 포장 용기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흠…… 그럼 좀 무리는 되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지요.”
노련한 사업가인 만큼 박상도도 신중했다. 몇 번의 협상을 거쳐, 대략적인 공급량을 정한 강태준이 거래 대금 가운데 선불로 20프로를 지불하자 박상도가 깜짝 놀랐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