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박 여사의 사정
한강을 비롯해 광나루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특급호텔 장소에서 고작해야 2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착하자 근사하게 생긴 단독주택이 일행을 반겼다. 이번에 운전기사를 맡은 김요한이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여기 진짜 좋군요. 호텔을 괜히 지은 게 아니네.”
“미팅은 두어 시간은 걸릴 테니 자넨 천천히 식사나 하다 와.”
“예. 사장님.”
초인종을 누르고 나자 잠시 후 덜커덕 소리가 났다. 강태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잔디가 깔린 마당이 반긴다. 어디선가 멍멍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치와와 한 마리가 발발거리며 달려왔다.
왈왈!
꼬리를 흔들며 강태준을 반기는 모습에 뒤이어 박 여사가 등장했다. 박 여사가 손짓하자 폴짝 뛰어 주인 품으로 돌아온 녀석이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녀석을 쓰다듬자 강아지가 금세 양순해졌다.
“어머 뽀찌. 손님한테 짖지 말라고 했잖니.”
“간만에 뵙습니다. 누님.”
“어머, 태준이. 돌아왔구나. 완전 상남자가 다 되었네.”
“누님도 더 예뻐지셨습니다. 이거 반하겠는데요.”
보랏빛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가 호호 웃었다.
“입바른 소리 하긴. 어머 근데 그게 뭐야?”
“뭐…… 선물입니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요.”
강태준이 쇼핑백을 건네자 눈빛이 금세 달라졌다.
“어머, 이거 폰즈 콜드 크림이네. 콤펙트까지?”
“이번에 랑콤에서 새로 나온 물건입니다. 세부에서 나온 진주 가루를 넣었다나. 앵커리지 경유할 때 면세점에서 샀습니다.”
“역시 센스 있어. 자, 거기 앉아. 차 타 줄게. 동생은 커피파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시원한 걸로, 아님 따뜻한 걸로?”
“이왕이면 시원하게 주십쇼. 날이 덥네요.”
널찍한 관사와 다르게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목재로 된 탁자 하며 손때 묻은 접시들이 보였다. 샹들리에부터 하나하나 공들인 모습이었다.
“자! 여기 박 마담표 커피는 아무나 못 받는다.”
“이거 황송하군요.”
자신을 한 것처럼 과연 커피 맛이 예술이었다.
“역시 맛이 좋네요. 그럼 관사는 아주 나오신 겁니까?”
“뭐 그렇게 되었어. 혼자는 관리하기 힘들어서.”
“부군께서는 어디로?”
“오키나와로 발령 났어. 지금 덴간 쪽에서 부두 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지. 당분간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는 남았고.”
“관사에 계시지 굳이…….”
“남편도 없는데 관사에 남아 있긴 좀 눈치가 보여서. 그래서 나왔지. 어때 집 둘러본 소감은?”
“엄청 좋네요. 전망도 끝내주고요. 여기 땅값도 장난 아닐 거 같은데요?”
“예전에 싸게 나왔을 때 구해서 별로 안 들었어. 이 일대 땅을 미리 사 뒀거든. 건축비에 땅값 포함해서 800만 환 정도밖에 안 들었어.”
“좋은 값에 구하셨군요. 부럽습니다.”
“부럽긴 그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요새 사업은 어떤가요? 저번에 어렴풋이 듣기로는 유통 쪽에 손을 대셨다고 들었는데…….”
“소식 빠르네. 뭐 주요 품목은 냉장고나 고급형 가전제품 같은 거지. 일제 냉장고나 에어컨, 전화기, 트랜지스터라디오 같은 거. 특히 코끼리 밥솥 같은 건 사모님들 사이에 수요가 꽤 있거든.”
“꽤 본격적인데요?”
“그렇지? 보따리 장사치고는 수익이 괜찮을 듯싶어 시작했지. 예를 들면 양변기 하나에 외국에서는 3만 환에 구입할 수 있는 걸 남대문 암시장에선 20만 환이 넘거든.”
“거 쏠쏠하군요. 쟁여 두고 팔면 꿀인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뛰어들었지. 근데 막상 본격적으로 손을 대려니까 생각한 대로 안 풀리더라고.”
“왜요?”
“어떤 미친놈이 물량을 한꺼번에 풀어 버렸거든.”
“그게 영향이 있습니까?”
“당연하지. 애초에 살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근데 한 번에 풀어 버리면 단가가 확 떨어져 버려.”
시가가 5배라 5배에 팔면 4배가 남는다는 계산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 냉장고도 밥솥도 조금만 초과 물량을 내놓으면 가격이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냉장고. 일제 라디오, 선풍기, 에어컨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작았던 것이다.
“멍청한 놈들이야. 지금은 우리 쪽에서 물량조절을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어. 받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정도 물량이라면 뭔가 의심스러운데요. 시장을 좌우할 정도로 많은 양의 밀수품이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뒷배가 없고서야 그렇게 많은 물량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지. 분명히 뒤가 구린 놈들이 있는 거야.”
지금처럼 군부가 서슬 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 뒷배 없이 그렇게 간 큰 짓을 저지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정권의 묵인하에 벌어지고 있는 일인가.
강태준은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카린 사태를 떠올렸다. 대한 비료 건설 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로부터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천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는 과정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받은 사건이다.
리베이트로 각종 전자기기나 스테인리스 강판, 사카린 원료를 가져와 팔다 걸리는 바람에 결국 비료회사까지 정부에 자진 납세 형식으로 빼앗긴 사건.
하지만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권력과 깊이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 없는 만큼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누님. 혹 조리 중이셨습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밥은 먹었어?”
“아직입니다.”
“마침 저녁 식사 준비 중이었는데, 스튜나 한 그릇 들고 가. 깜빡하고 너무 많이 끓여 놨거든.”
내심 배가 고팠던지라 강태준은 사양하지 않았다. 잠시 후, 고슬고슬한 쌀밥 위로 걸쭉한 수프가 얹어져 나왔다. 차린 요리는 크레올 스타일의 루이지애나식 검보였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턱을 괸 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젊은 청년은 식성이 좋아, 난, 나이가 들어서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던데…….”
“누님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요. 이 정도 실력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버터의 풍미가 녹아든 루가 밥알 위로 촉촉하게 스며들어 깊은 맛을 냈다. 걸쭉한 스튜는 오크라의 점성 때문인지 부드러웠고, 싱싱한 채소와 오래 끓인 부드러운 고기가 뭉그러진 양파 향과 조화를 이뤄 감칠맛이 배가 되었다. 덕분에 강태준은 두 그릇이 넘게 비웠다.
“잘 먹었습니다. 간만에 제대로 포식했네요. 미국 유명식당에서 파는 음식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남편이 뉴올리언스 출신이거든. 그쪽 동네에서 검보는 소울푸드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배웠지.”
“이야, 엄청난 정성이신데요. 부군께서도 엄청 좋아하셨겠습니다.”
“후~ 그럼 뭐 해. 이제 먹어 줄 사람이 없는데.”
그 말에 박원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윽고 민망한 기색을 띠었다.
잠시 후 텁텁한 표정을 한 그녀가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를 하나 물었다.
“그간 뭔 일 있습니까?”
“여러 가지 고민 중이지. 이참에 확 이혼이라도 할까 봐.”
연기를 숨처럼 뱉어 낸 박 여사가 익숙하게 재를 털었다.
희뿌연 연기에 감도는 향.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맨정신에는 못 할 이야기고. 이왕 다 먹었음 술이나 한잔할까?”
그릇을 옆으로 치운 박 여사가 붉은 와인 병을 흔들었다.
주거니 받거니 몇 번을 하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박 여사가 취기 오른 목소리로 신세 한탄을 했다.
“사실 남편이 대령 승진한 김에 사업 정리하는 대로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했거든. 근데 나보고 한사코 오지 말라더라고. 근데 여자의 촉이란 게 있잖아. 뒷조사해 봤더니 오키나와 기지 내 아는 CID (Criminal Investigation Department: 미군범죄 수사대) 소속 흑인 샤지가 하나 있는데 거길 통해서 알아보니 아주 살림을 차렸다더라고.”
“설마 딴살림이요?”
“자, 봐 봐.”
박원숙이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컬러로 된 사진에는 유원지 거리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팔짱을 낀 남녀 한 쌍. 장교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양산을 쓴 채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었다.
일전에 축구 할 때 봤던 그 사람인가. 눈치를 보던 강태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것만으론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추정하기 곤란하군요. 찬찬히 내막을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생은 이 박원숙이가 근거도 없이 떠드는 여자로 보여? 이미 이중, 삼중으로 검증 끝났어. 정보 준 샤지 와이프는 내가 중매까지 서 준 애라 거짓말 못 해. 그쪽에서 몰래 사진 몇 장이랑 현지처 동향까지 알아서 보내 주더라니까.”
“그래서 상대가?”
“게이샤 출신인데 울 서방이 머리까지 올려 줬더라고. 남자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어떻게 꼬셨는지 몰라. 아니지, 그 여자가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도…….”
주절거리는 박 여사의 목소리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뻔뻔하기도 유분수지. 지가 이렇게 승진한 게 다 누구 덕인데. 어디 되다 만 놈 장군 만들겠다고 뒷바라지했더니 의리 없이 뒤통수를 까? 내 월리엄 이 자식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심정은 십분 이해가 가지만, 어쩌시려고요?”
“이참에 끝장을 봐야지. 아마 갈라서게 될 거 같아. 그 참에 증거부터 잡아서 아주 홀랑 벗겨서 내쫓아 버리려고.”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강태준은 내심 등골이 오싹했다. 그간의 앙금이 한두 해 묵은 것이 아닌 듯한 단단히 작정한 모양. 그렇게 한동안 주저리주저리 흉을 보던 박 여사도 너무 과했다 싶었는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하아, 내가 너무 흥분했네. 미안해 동생. 불편했지? 못난 꼴을 보였어.”
“아닙니다. 속은 좀 풀리셨습니까?”
“대충은, 이제 동생 이야기도 해 봐. 무슨 이유가 있어서 왔을 텐데 말이야. 나한테 부탁할 게 있지 않아?”
“사실 요사이 백화점 증개축 공사로 골치가 아프긴 합니다.”
강태준이 간략하게 그간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 박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고급 유리가 필요한데 공급처가 마땅찮다는 말이네.”
“그렇지요. 아무래도 백화점이다 보니 투명도가 높은 게 필요하지요.”
“근데, 굳이 수입을 해야 하나? 그건 굳이 수입하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을걸?”
“품질 문제로 국내에서는 구하기가 어렵다던데요?”
“아, 아직 안 알려진 모양이구나. 신한유리라고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랑 협의 후에 ICA 자금으로 설립한 회사가 하나 있거든. 3년 전에 생산을 개시했다가 주한 UN군에서 유출되는 공병으로 당분간 운휴 상태였지. 근데 이번에야 공병 문제가 해결돼서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더라고. 이참에 판유리 설비도 들여놨다고 하니, 아마 그 정도 품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 금상첨화죠. 근데 그쪽에서 물량을 받아 줄까요?”
“그건 걱정 마. 그쪽 오너가 내 조카거든. 설비는 비싼 값 주고 들여놨는데 아무래도 건설 쪽 사람들이 좀 보수적이라서 영업이 쉽지 않은가 봐. 지금은 여러모로 시작 단계라 아쉬운 입장인가 봐. 아마 찾아가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걸.”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그럼 연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자, 여기 주소지.”
박 여사는 내친김에 그 자리에서 주소를 메모해 주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