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백화점 리모델링
기가 막힌 김요한이 되물었다.
“어차피 세금 못 걷을 테니 조지는 게 낫다, 그런 겁니까?”
“대충 그렇지. 명분도 확실하잖은가. 외화 유출을 방지하고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자.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
“허, 진짜 무식한 해결책이군요.”
“덕분에 한 벌에 13만 원이 넘는 마카오 양복지나 한 갑에 1만 원이 넘는 코티원 화장품, 거기에 가라스 핸드백 같은 물건이 모두 한꺼번에 자취를 감춰 버렸지. 뭐. 아주 대단하신 분이야 참.”
목이 타는지 광필이가 커피를 원샷으로 들이키더니 탁상에 놓인 초콜릿을 까서 입에 털어 넣자 강태준이 물었다.
“그래서 임대료는 얼마나 떨어졌지?”
“뭐 완전 똥값 돼 버렸죠. 여성 양품부 쇼케이스가 거의 1/10 가격으로 토막 났습니다. 못 버티고 나간 업주들도 서른 곳이 넘습니다. 그래도 형님 말씀대로 1층 개조부터 들어간 게 신의 한 수였지요. 무역협회 놈들은 이런 걸 다 예상하고 순순히 떠넘긴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해야지. 1층도 원래대로 운영했으면 적자행진이었을 텐데. 어차피 입주업체들 내보내고 직영 전환해야 할 판에 내보낼 수고 아낀 거지 뭐.”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기대 이하라. 지금까지 꼴아박은 돈이 상당합니다.”
“투자금 회수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고, 암튼 그럼 남은 공사는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보자고, 지하 코너는 어떻게 할 건가?”
“일단은 예전대로 식품 코너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럼 한번 개조용 설계도면이랑 마스터 플랜부터 보지.”
강태준은 가져온 건축도면을 상세히 살폈다. 슬로프로 연결된 도면 구조를 본 강태준이 이마를 좁혔다.
“흠, 카트를 이동할 공간이 너무 좁고, 동선이 불편하네. 제품 종류별로 존 분할이 안 돼 있고, 매장마다 배치가 뒤죽박죽이구만. 중앙부 쪽으로 엘리베이터 한 대랑 에스컬레이터가 추가되는 걸 빼곤 예전 상태랑 별로 바뀌는 거 같지 않은데?”
“그게 예산 문제도 있고, 지하는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점주들이 많아서. 큰 틀에서 개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임대업체들은 그대로 두고, 직영점 위주로 개편할까 생각 중입니다.”
김광필의 변명 아닌 변명에 강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안이한 발상이군. 가설 수준의 식당들로는 고객을 추가로 끌어들이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음식은 고객을 끌어들이기에 적합한 유인 품목이니 배치를 고객 중심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통계를 보니 식품 구매를 목적으로 온 주부들의 연관 구매율이 육 할이 넘더군. 그럼 이쪽 식자재 코너부터 설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번에 1층 공사비도 아직 전부 갚지 못했습니다. 대대적인 개편을 하기엔 예산이 부족합니다.”
“당분간은 버티기로 가야지. 이참에 니혼바시의 미쓰코시 백화점처럼 백화점 내 전문 음식점을 들여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편이 나을 거 같아.”
“식당도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이런 식으로 말입니까?”
“그렇게 구체적으로 나누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그건 무리일 거 같고, 어차피 본격적인 장사는 점심부터니 간단한 샌드위치나 김밥, 우동, 잔치국수 같은 면류에 식후 간단한 다과를 제공할 수 있게 말이야.”
“장을 보면서 한 끼 식사도 해결할 수 있게 말이죠?
“잘 알고 있군. 식사 후에는 입가심으로 입맛을 끌어당길 만한 단 것들이 필요하네. 화과자나 케이크, 서양과자 같은 걸로. 특히 어린이용 식단이 필요할 거 같아.”
“어린이용이요?”
“그래. 가족 손님을 받으려면 애들을 유인해야지. 햄버거나 함박스테이크, 돈가스, 생선가스 같은 걸로 식단을 만들면 좋을 거 같은데. 디즈니처럼 애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로 도시락을 만드는 거지. 문어 소시지나 오리 모양 메추리알같이.”
“오 그거 솔깃한데요. 애들을 동반한 가족을 타깃으로 삼는다?”
“그냥 불러서 뭣하면 거기 경품도 끼워 넣으면 돼. 한 10번 정도 식사 도장을 받으면 랜덤으로 장난감 경품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야.”
강태준이 도면 위를 줄을 쫙 그었다.
“전문 식당은 최소 20평 이상, 식탁은 7~8개는 되어야 해. 별도로 로비 중앙에 탁아소랑 놀이방을 별도로 설치하는 게 좋을 거 같고.”
“탁아소까지 말입니까?”
“백화점 고객은 남녀 모두지만, 쇼핑의 주체는 부인들 아닌가? 어린 애들만 놓고 돌아다니기 불안하니 애들을 맡아 주면 마음 놓고 쇼핑할 수 있겠지. 3층은 영화관 유치할 테니 비워 둬. 최대한 인원을 끌어들일 수 있게 말일세.”
“한 층을 통으로 말입니까?”
“그래, 지금처럼 불경기에는 무조건 유입이 중요해. 일단 사람이 와야 물건을 팔 게 아닌가. 옥상 전광판도 그렇네. 그걸로 광고비 받아 봐야 무슨 득이 있겠나?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뭐 여러 가지로 즐길 게 있어야지. 내 생각에 옥상은 정원 겸 야외 카페로 만드는 게 좋겠어.”
강태준의 의견이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옥상에 전광판 대신 정원을 놓는다는 말입니까?”
“그래 미쓰코시 백화점에 가 보니 공중정원이란 곳이 있더군. 가족 동반으로 피로에 지친 손님들이 쉴 곳이 필요하지 않겠나. 전망대도 설치하고, 분수랑 연못 분재도 몇 개 가져다 놓으면 그럴듯하지 않겠나. 서울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라 제대로만 만들면 꽤 로맨틱한 장소가 될 거 같아.”
김요한이 문득 뭐가 떠올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중정원이라니 거 바빌론이 생각나는군요”.
“그래. 고대인도 한 걸 우리가 못하면 그게 말이 되나? 이참에 정원부터 꾸며 보지.”
“아니, 지금 바로 말입니까?”
“뭐, 정상 개장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이왕 개조하려면 빠른 게 좋지. 당분간 직원들 휴게실 겸 쓰는 것도 나쁘지 않잖나. 미리 반응도 들어 보고 말이야.”
강태준이 구상한 것은 연못과 분수를 만들고 작은 유원지처럼 꾸민 위락시설이었다. 미래와 달리 높은 건물들이 거의 없고, 고작 3~4층 건물들이 서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탁 트인 전경을 조망하는 아주 훌륭한 전망대 시설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강태준의 명에 따라 직원들은 다음날부터 바로 본격적인 개조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왕 도착한 거 식충이 노릇만 할 수 없었던 김요한도 백화점 개축 공사 업무를 돕기로 했다.
“요한이가 자재랑 공구 관리 맡고, 광필인 공사인력 관리하고, 난 시공할게. 그리고 나머지 서포트는 복만이가 맡고.”
“형님, 그런 게 어디 있수, 나보고 완전 뺑이치라는 거 아니요?”
“그럼 불만 있으면 니가 자재관리 하던지.”
“아닙니다…… 저는 몸 쓰는 게 편합니다. 일단 자재랑 공구 불출 관리만 해도 머리가 띵하고 골치 아픕니다.”
“그럼 그러던지. 요한아! 건축 자재가 들어왔으니 운반 좀 해야겠다.”
“와 ~ 이게, 생각보다 무겁군요.”
“임마 조심해, 힘으로 들면 허리 나간다.”
“예예. 걱정 마십쇼. 끙!”
화강암 덩이를 어깨에 들쳐 맨 김요한이 기세 좋게 계단 위로 올라가자 포댓자루를 같이 둘러업은 광필이가 훅 숨을 내쉬며 한마디 지껄였다.
“아따, 저놈 겉은 비리비리하게 생겼는데 실하네. 식충이 하나 구제한 건가 싶었더니 저거 물건이구만요. 애가 아주 빠릿빠릿합니다.”
“사람은 겉만 봐서 모른다니까. 애초에 원양조업을 견뎌 낸 뱃놈이 일 대신 농땡이만 까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니도 쇠도 씹어 먹게 생긴 주제에 속은 완전히 곯았잖냐.”
“아따 형님도 어째 말이 무지 섭섭합니다요. 그동안 형님 대신 뺑이친 게 누군데”
“잔말 말고 한 포대나 더 들어!”
옥상 공사에는 전 백화점 관리 직원들이 전부 동원되어 자재를 운반했다. 지하와 화장실 공사부터 시작해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곳이 아닌 상황에 외주를 줘서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공사 단가를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불만이 생길 법도 하지만 의외로 볼멘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너에 사장까지 솔선수범하니 도저히 내뺄 재주가 없는 것이다.
몇 주 후 옥상의 모습은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입구 부분이었다. 정면 입구 윗부분에는 청동제 용의 머리가 달려 있었고 여의주를 문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태로 돌을 깎아 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연 식물을 곳곳에 배치해 서양풍 정원 사이로 산보 길이 펼쳐져 있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의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삼각뿔 모양의 쉼터 옆으로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분재들, 그 옆으로는 새로 심은 꽃과 풀들이 놓여 있었다.
각지에서 공수한 갖가지 자연석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가운데 분수 옆에는 간단한 다실과 주악대도 설치되어 있다. 물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가운데 새로 심은 철쭉이 피어 있고, 달팽이 더듬이 모양의 분수가 앙증맞게 보였다. 주악을 부는 아기 천사들이 곳곳에 배치된 가운데 작은 천사가 엉거주춤 울상을 지은 채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자, 좀 쉬면서 하세요.”
“모두 휴식!”
점례가 얼음 박스에 든 시원한 콜라를 박스째 머리에 이고 오자 사람들도 한숨을 돌렸다. 다들 자기 편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않아 땀을 식혔다. 시원한 콜라를 한 번에 들이킨 광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푸하. 시원하구만.”
“이렇게 보니 꽤 그럴듯하네요. 운치도 있고.”
“완성되면 진짜 이국적 분위기가 날 거 같습니다.”
공사용 벽돌 위에 걸터앉은 김요한의 말에 강태준도 콜라병을 홀짝였다.
“아직 다 완성하려면 멀었어. 동관 옥상까지 연결로도 만들어야 되고. 위로는 탑 형태로 하나 올리는 것도 고려 중이야.”
“확실히 탁 트여서 전경이 좋네요.”
“그래 남산과 북악산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곳 아닌가. 이거야말로 백만 불짜리 뷰라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니 옥상 위로 태양이 따스하게 비췄다.
아직 오염이 심하지 않아서일까. 선명한 빛깔의 하늘 아래 옹기종기 놓인 마을들이 미니어처같이 늘어서 있었다.
당시에는 고층 빌딩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시야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경치를 감상하며 숨을 고르던 광필이가 물었다.
“그런데 저기 공터는 뭡니까? 형님?”
“아, 거기? 거기는 유리온실을 놓을 예정이야.”
“온실요?”
“그래, 비닐하우스 이야길 듣고 좀 생각해 봤네. 강화유리로 식물원을 만들고, 입장료를 받는 거지. 가장 안쪽엔 열대 식물들도 공수해 오고, 앵무새 같은 것도 몇 마리 갖다 놓을 걸세. 뭔가 혹하지 않나?”
“그거 무지 근사하겠는걸요.”
“아웃풋이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지만 수요는 있을 거 같아서 일단 진행해 보려고. 김 지배인, 바닥 타일이랑 화장실 공사는 어떻게 되고 있나?”
“아 그거요. 타일은 국내 제조가 가능할 거 같은데, 거울은 따로 수입해야 할 거 같습니다. 쇼윈도용 유리 공수해야 하고요.”
“그런 것까지 수입해야 되나?”
“한국에서 만드는 유리는 죄다 재생유리거든요. 파유리 재생공장 수준이라 퀄리티가 좀 그렇습니다. 금속 프레임으로 접이식 바스켓 캐리어(Folding basket carriers)도 필요하고 주방 설비도 따로 공수해 와야 되고요.”
당시의 전국 유리공장의 수는 40여 개가 넘었지만, 그 대부분이 가내수공업 수준의 소규모 공장에 불과했던 만큼 질 좋은 유리를 공수하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제주의 도자기 공장에서 타일까지는 커버한다고 쳐도 유리만큼은 어려운 일이다.
“이번 문제는 아무래도 박 여사를 만나 봐야겠어.”
이참에 돈을 벌어 성북동으로 이사했다고 들었다. 성북동 근처에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명당이라 불리는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한 사우스힐 호텔이 공사를 마치고 개관을 앞두고 있다
아차산 기슭에 놓인 호텔의 지리는 그야말로 명당이었다. 동쪽에는 검단산이 보이고. 서쪽에는 관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