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35화 (135/361)

135화 도레미 백화점

“우순해 씨 말이군요. 그쪽 방면에서 꽤 유명한 분입니다”

“오. 아는가?”

“뭐 제가 좀 화려하게 살았잖습니까. 배 타기 전에 잠시 도망쳤다 잠시 의탁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엉겁결에 들어가서 숨었던 적이 있지요.”

“오, 그럼 직접 안으로 들어가도 봤다는 건가?”

“네. 겨울에 하도 추워서요. 하필 깡패 놈들한테 쫓겨서 도망칠 때 외투 하나 못 갖고 나왔거든요. 추워서 덜덜 떨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둘러봤는데 웬 미군부대처럼 생긴 건물이 있더군요. 뭐 들어갔다가 뭐 머리통을 삽자루에 맞고 기절했는데 일어나 보니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주인장 말로는 도둑인 줄 알았다 하시더군요.”

김요한의 말에 흥미가 생긴 강태준이 턱을 괴었다.

“허어? 그래서?”

“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때려서 기절시킨 것도 미안하고 딱하다며 며칠 머물러 가도 된다 배려해 주시더라고요. 거기서 부산 쪽으로 배편이 날 때까지 신세 좀 졌습니다…….”

“하우스 안은 어땠어?”

“한지로 덧대서 만들었다 하는데, 안은 꽤 그럴듯하더이다. 헌 문짝을 덧대어 만들던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수준이 발전하시더라고요. 학구열이 보통이 아니라 어디서 외서까지 가져와서는 사전 찾아가며 독학까지 하시더라고요. 제가 나올 때는 공업용 비닐을 씌워 만든 터널형 온실에서 오이랑 가지는 물론이고 고추까지 재배하는 데 성공했었습니다. 싱싱한 오이생채랑 배춧국을 대접해 주셨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더군요. 갓 따서 만든 거라 그런지 진짜 아삭아삭하고 맛있었습니다.”

“그게 말이 쉽지 보통 노고가 아니셨을 텐데, 선각자시로군.”

“그러게요. 근데 고추 농사를 겨울에도 할 수 있음 대박 아닙니까. 그러잖아도 미군 쪽에서 요새 요구 물량이 어찌할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말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치는 춘삼이의 말에 강태준은 어릴 적 기억을 복기해 보았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있던 고등 소채 가운데 칠 할이 김해에서 생산되었다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실제 그 말이 사실이라면 김해라는 곳이 큰 농산물 생산지가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김해도 찾아가 봐야겠군. 복만이가 지금 경북 문산 쪽에 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박 여사 통해서 한번 연결해 봐야겠네. 일단 요청한 비닐류랑 철판부터 바로 마련해 봐.”

현재 미군부대에서는 신선한 채소를 국내에서 보급하기 어려운 탓에 대량의 양채류를 일본 쪽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직접 공수해서 먹는 제품보다 선도나 가격 경쟁력 면에서 더 나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번에 고춧가루 문제로 물꼬를 터놨으니 이런 틈새시장을 잘만 공략한다면 지속적인 자금줄이 되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더욱이 농사를 명목으로 영농단지를 조성한다면 우량의 토지를 구매하기 쉬워 합법적으로 땅 투기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강태준이 사업 방향을 다시 고민하는 사이, 차량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가 도레미 백화점입니다. 형님.”

“오! 예전이랑은 많이 변했군”

백화점 앞 공터에는 주차장에는 차가 드문드문 서 있고, 백화점은 새로 단장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이 새하얗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1층 안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복도가 드러났다.

PX처럼 진열대에 각종 물품으로 가득 차 있는 곳에는 상자 단위로 묶인 제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철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마트 위에는 조명만 가득 달려 있는 모습.

미국의 월마트를 떠올린다면 착각일까.

진열대 한쪽에서는 주부들이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야. 분위기가 깔쌈하군요.”

“리모델링을 해서 그렇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부분 서양식이었다. 챙모자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부인들이 진열대에 있는 물건을 고르는 것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인다.

강태준은 대형마트처럼 변모한 1층 매장을 서서히 돌며 주변을 탐색했다. 1층 카운터에 백화점 구조를 보여 주는 팻말이 서 있었고. 안내를 맡은 직원들이 팸플릿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은빛 거울들이 사각을 비추는 가운데, 모서리 곳곳에 무전기를 든 감시원들이 대기 중에 있었다. 눈치를 보던 춘삼이가 한마디 했다.

“시간대가 한산한가 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인원이 적네요. 그렇지 주말에는 더 많습니다.”

“뭐, 불경기에 이 수준이면 안심이지. 그래도 이게 통하긴 하는군.”

강태준이 내심 안도했다. 창고형 마트라는 전략이 먹힐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강태준이 창고형 마트를 도입한 것은 포장비용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인테리어를 최소화해 진열대가 아닌 팔레트에 박스 단위나 대용량의 상품들을 그대로 진열함으로써 운영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창고형 매장은 기존의 대형마트 대비 7~15%에 달하는 가격 경쟁력을 갖고 있는 만큼 비용 절감에 효과적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축음기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자, 바퀴 달린 트레이를 밀고 온 직원이 나타났다.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스타킹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확성기를 든 직원이 목을 가다듬더니 소리를 질렀다.

-자자, 오늘의 특가 세일 품목! 최고급 나일론 스타킹이 한 켤레에 1,000환! 새벽에 천경물산 쪽에서 직접 공수해 온 신품입니다. 지금부터 선착순으로 파격가에 모시겠습니다.

스타킹을 홍보하는 모습에 아줌마들의 눈빛이 별안간 달라졌다.

“내가 먼저야!”

“저리 비켜!”

“어머, 어디서 새치기예요!”

“시끄럽게. 저리 안 가요?”

아까까지 교양 있게 물건을 고르던 사모님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서로를 밀치며 우르르 몰려드는 손길이 우악스럽기 그지없다.

마치 시장바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랄까.

-자자! 질서를 지켜 주십시오! 물량은 충분합니다!”

신상으로 소개된 제품은 채 10분도 안 되어 동이 났다.

그 모습을 보던 김요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후, 저기 꼈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요. 결혼하면 다 저런가?”

“원래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한 법이지.”

눈을 뗀 시선이 이번엔 주변을 흩었다. 소형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저쪽에서 붉은색 제복을 입은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누구?”

“관리과장 김용식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 사장님.”

“아, 저번에 들은 그 사람이군요. 수고하십니다.”

“아이구야. 수고는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럼 바로 위로 모시겠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니, 예전 무역 협회에서 빌려 쓰던 사무실이 보였다. 안내인을 따라 총지배인실로 들어가자 업무를 보던 광필이가 사무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 비서. 업무 중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어이쿠, 김광필 씨, 요새 일하는 폼이 제법 나는데?”

사무를 보던 광필이가 그제야 강태준을 확인하고 서둘러 일어섰다.

“아니, 형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아주 돌아오신 겁니까.”

“온 지는 얼마 안 되었지. 거, 어깨 뽕 좀 들어간 거 보게. 수트빨이 죽이는데?”

“뽕은 무슨 개축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갑자기 1층을 전부 뜯어 놓으라고 하셔서 똥줄 빠졌죠. 근데 이쪽은 누구?”

“이번에 우리 배에 탔던 2항사야. 해양대 직속 후배기도 하지. 자, 인사하게.”

앞으로 나온 김요한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요한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반갑네. 암튼 여기 쪽에 앉으십시오. 차 좀 내오겠습니다.”

원래 무역협회 사무실로 사용해서인가 인테리어가 제법 그럴듯했다.

비서를 시켜 커피를 내오자 향긋한 커피 향에 김요한이 코끝을 벌름거렸다.

“오. 풍미가 진한데. 에티오피아 산인가?”

“역시 형님은 척 하면 척이네요. 향이 끝내주지 않습니까? 이거 올해 1~2월 수확한 건데 산지에서 바로 공수해 온 겁니다.”

“호오, 맨날 커피 믹스만 마시더니. 이제 좀 커피 마실 줄도 아는군?”

“이를 말이겠습니까? 책상에서 서류만 보니 입이 허전해서 못 살겠더군요. 저도 아주 중독자가 다 되었습니다. 이거 없으면 요새는 일도 못 합니다.”

너스레를 떠는 광필이의 말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어. 1층 보니 벌써 영업 개시 중이던데, 재개축 공사는 벌써 끝난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1층만 대충 끝냈고. 지하랑 3층 구역은 손도 못 댔습니다. 개축하는 데 돈이 워낙 많이 들어서. 인테리어는 반 포기 상태구요.”

“흠, 그건 예상외인데 주식 판매 대금이 부족했나?”

“예상했던 수치만큼은 충분히 뽑았죠. 문제는 서울시 쪽이랑 재개축 협의 과정에서 좀 예산이 초과된 겁니다.”

“뭐가 문젠데?”

“용도 변경 좀 한답시고 설계 변경 인허가 넣었더니 뒷돈 달라고 사설이 겁나 길지 뭡니까? 재건자금이랍시고 목돈 쥐여 주고 나니 그제서야 오케이가 뜨더군요. 거기다 대한부동산 주식회사 쪽이랑 합의금 쥐여 주고 나니 몇 푼 안 남아서 진짜 한 달만 늦게 팔 걸 그랬습니다.”

“아니, 그 정도면 적당히 치고 빠진 거지. 더 개겼으면 위험했음 주식이 휴짓조각 돼서 한강행이었어.”

“아님 중정 쪽에 끌려가서 조리돌림 당했겠죠. 뭐 요새 난리법석이더라고요. 올해 1월만 해도 영혼까지 끌어모아서라도 주식 사라 개난리를 치다가 이번에 폭삭 망하니. 이번에 증발한 돈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적당한 시점에서 잘 손절했네. 근데 자금 부족했음 말을 하지 그랬어. 리모델링은 어떻게 했나. 부자재 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복만이 시켜서 사우스힐 공사장 자재 좀 뽀려 왔죠. 김 시장 그 자식도 먹은 돈이 있으니 툴툴대면서 토해 내더라고요.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좀 편의를 봐주더이다.”

“잘했어. 근데 바닥 타일은 좀 아쉽더군. 뭐 어떻게 할 수 없나. 명색이 백화점인데 시장바닥 같아서야 좀 모양이 안 나는데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럭셔리를 표방하려 해도 팔 물건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외제품을 아예 못 파는데 무슨 고급화고 나발이고 있겠습니까?”

김요한이 놀란 어조로 되물었다.

“아니, 백화점에서 외제를 못 판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낸들 아나. 정부 방침이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나…… 작년 가을부터 부정외래품 판매 금지를 시행해서 국산품밖에 못 팔게 됐거든. 정찰까지 실시하는 바람에. 쿼터제로 들여오는 물량 빼고 완전 막혔지.”

씁쓸해하는 광필이에 어이없어하는 김요한이었다.

“그건 좀 억지 아닙니까. 정부 입장에서도 수입물량 생각하면 그냥 놔두는 게 이득 아닐까요.”

“군바리들 생각에서는 원래 화교 놈들이 외국품 밀수 시장에 꼼지락대고 있으니 그쪽을 조지려는 거지. 원래 세관은 자국 국적선이나 외항선에 대해서만 밀수 단속권이 있잖나. 외국 국적 외항선이나 외국 선박에 대해서는 항구 내에서라도 현행범이 아님 입항 수색을 할 수 없단 말이야.”

예를 들면 중국인 선원이 항구에 정박해 밀수품을 숨겨 둬도 외교적 문제를 생각하면 수색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정크선으로 물건 싣고 증여 형식으로 통관을 받아 버리는 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 아예 그 루트를 막아 버렸다는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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