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보합금 산정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강태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간신히 화기를 억누른 강태준이 조용하게 반박했다.
“선원들도 인내심의 한계가 있습니다. 6개월씩이나 수당이랑 급여 지급을 연기하는 것은 곤란하죠. 애초에 선원들도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을 억누르고 있는 겁니다.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한번 따져 볼까요 그럼?”
강태준의 잔소리가 길어질 듯하자 김정욱이 얼른 항복 의사를 밝혔다.
“끄응. 알겠네. 알겠어. 그럼 어느 정도 조건이면 납득하겠는가?”
“우선 30프로부터 먼저 정산하고, 남은 잔여액에 최소 월 2부 이자는 붙여 줘야죠.”
“뭐? 월 2부? 그게 말이 되나?”
꽤 강한 제안에 김정욱의 목소리가 커졌다. 월 2% 이자라면 6개월에 12%가 넘는 금액인 만큼 사측 입장에서는 꽤 부담될 액수. 하지만 강태준은 몹시도 당당했다.
“아니, 제가 언제 사채 이자를 달라고 했습니까. 지금 그 돈을 은행에만 넣어 둬도 월 1부 정도는 나오는 판에 목돈을 통으로 먹고 퉁친다? 그건 너무 양심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건 좀 과하지 않은가?”
“그럼 협상 결렬이네요. 재갑이한테 지금 당장 연락해야겠습니다. 정산 문제가 생겼으니 당장 귀항하라고요.”
강태준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다급해진 김정욱이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사정했다.
“어이 사람 급하긴. 언제 내가 안 된다고 했나? 다만 나도 입장이 있잖나. 윗선 결제도 받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는 거지.”
“그게 정말입니까?”
“남아일언 중천금이지. 내 거짓말을 하겠나?”
“그럼 회사 명의로 확약서 쓸 수 있습니까?”
“그…… 그건.”
꼬리를 만 김정욱이 머뭇거리는 것이 사실 태동 입장에서는 정말 강태준이 7항차 연속 만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조업 조건을 달성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전적으로 사측의 불찰인 만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말에 강태준이 강하게 압박했다.
“따로 환전 같은 거 필요 없으니 그냥 달러로 바로 쏴 주십시오. 본사 외환 구좌에 예금된 금액이 48만 불이니 그걸 기준으로 계산하면 19만 2천 불 중 3할은 선 정산하면 13만 4천 400달러군요. 거기에 이자가 6개월 치 1할 2부 붙으면 15만 528불이네요.”
“선 정산금 5만 7천 600불은 전부 달러로 송금해 달라? 1천 불 이상은 환금이 어려울 텐데.”
“그 부분은 그쪽이 걱정하실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죠. 환전이야 저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 그럼 대금 일부를 엔화로 하는 건?”
“쓸데없이 왜 사족을 붙입니까? 약속대로 달러로 주십쇼. 나중에 환차손이니 뭐니 해서 서로 얼굴 붉히는 거 싫네요.”
“전액 이자는 좀 너무한데, 미리 주는 대금이 3할인데 그건 제하는 걸로.”
“말씀 잘하셨습니다. 그럼 정산액을 하나하나 제대로 따져 볼까요. 식량 및 유통대금으로 2만 불 추가하니 50만 불. 그러면. 거기에 부산을 떠날 때 준비한 식량이랑 유류비도 매출액에 포함해서, 보면 어디 보자 55만 불이네. 거기에 운송비랑 추가 요금도 포함하면.”
“아아, 알았어.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나. 에누리 빼고 15만 불로 퉁치자구.”
강태준의 말꼬리가 길어지자 혹을 붙일까 두려워진 김정욱이 합의를 서둘렀다. 지금 당장 현금으로 정산하는 10만 환을 제외하고, 나머지 5만 불은 외화로 통장으로 쏴 주기로 한 것이다. 수산부장 명의의 직인을 찍고 나자 강태준이 강조하듯 말했다.
“총, 5만 불입니다. 2주 내에 입금해 주시는 조건은 반드시 지키십쇼. 그때까지 사장님 결제 맡는 거 잊지 마시고.”
“벼룩의 간도 빼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알았다. 알았어. 내 약속 못 지키면 장을 지진다.”
“장까지 지지진 마시고요. 수산부장님. 그러다가 코 길어집니다.”
“알았다. 선원들 입 단도리 잘해라. 아무리 특약 조건을 채웠다 해도 이 조건이면 배 아플 인간들 많아. 특히 다른 배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좀…….”
“걱정 마십시오. 우리 애들 입 무겁습니다.”
확답을 받은 강태준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밖으로 나왔다. 강태준이 정산을 마치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선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두서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맨 먼저 달려온 것은 김요한이었다.
“선장님, 정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약속대로 돈 바로 준답니까?”
“어찌 되긴 일단 중간 정산 차로 5만 7천 불부터 받고, 나머지 금액은 2부 이자로 6개월 뒤에 받는 걸로 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확약서 받았다. 자, 봐라.”
서류를 확인한 선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산 빠른 갑판장이 침을 튀기며 산수를 했다.
“총 19만 2천 불? 엄청난 금액이군요. 그럼 1인당 최소 5,000불 이상씩 돌아가는 셈 아닙니까.”
“맞습니다요. 이 정도면 서울에 엔간한 집 한 채는 사겠습니다.”
액수를 확인한 선원들은 희희낙락했다. 이번 항차에 동원된 18명 가운데, 갑판장 이상의 간부급 선원은 각각 1만 불 이상을 받게 된 것이다.
강태준으로서도 꽤 뿌듯한 결과였다. 배 탈 때랑 내릴 때 다른 게 세상인심이 아닌가? 정산 시비로 쌍욕은 기본이고 멱살잡이까지 하던 전적을 고려하면 이 정도면 훈훈하게 끝난 것이다. 물론 부식비나 삥땅치는 다른 선장들과 달리 강태준이 처음부터 솔선수범했던 것이 주효했다고 할까. 갑판장인 박상구도 희색이 만면했다.
“이게 0이 몇 개인감. 돈 받으면 땅부터 사야겠구먼.”
“그러게. 뱃놈이 땅 산다고 하니 새삼스럽구먼.”
“뱃멀미도 지겨워. 십수 년 동안 탈 만큼 타지 않았나. 선상 생활은 이걸로 끝일세. 거기서 과수원 하나 하려고…….”
다들 받은 돈으로 뭘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큼은 예외였다.
어깨가 처진 채로 혼자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을 하는 김요한에 강태준이 어깨를 툭 쳤다.
“니는 왜 나라 망한 표정을 하고 있나. 왜 혼자 죽상이야.”
“좀 허무해서요. 돈 받으면 거 뭐합니까. 빚부터 갚고 나면 개털인데.”
“빚이라니. 배 타면서 해결된 거 아니었어? 너 죽인다고 쫓아다니던 놈은 저번 깡패 소탕으로 처리됐다며?”
“도피 생활 동안 불가피하게 신세를 진 게 많아서. 지인들 돈 갚고 나면 1달 치 생활비도 안 나옵니다.”
“그거 난감하군.”
“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배나 다시 탈 거 그랬습니다. 재갑 형처럼 말이죠. 6개월 동안 손가락만 빨게 될 거 생각하니 깝깝하네요…….”
담배가 땡기는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녀석. 배 탈 때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손아귀에 쥔 돈이 없으니 상실감이 일 법도 하다. 게다가 지금처럼 실업률이 높은 시점에선 따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구하기는 하늘의 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김요한의 시무룩한 모습에 강태준이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난감한 상황이군. 그럼 딱히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가겠나?”
“예? 저 말입니까?”
얼떨떨한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는 모습에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뭍에서 당분간 할 일도 없잖은가? 젊은 놈이 돈이 없으면 돈을 벌어야지. 각설이 타령하지 말고, 집도 절도 없는 상황이면 식객이라도 하던가.”
“정말 그래도 됩니까. 그건 좀 민폐가 아닐지…….”
“어이쿠, 누가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준댔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빡세게 일 시킬 생각이니 생각 있으면 따라와.”
김요한은 약간 망설였다. 배 위에서 일 년 넘게 지내던 상관이랑 한솥밥을 먹는다?
인간적으로 사양하고 싶지만, 딱히 갈 곳도 없는 상황. 갈등하는 김요한이었지만 강태준은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거기서 요 깔고 잘 거야? 째깍 안 뛰어오고 뭐 해?”
“예, 예. 지금 따라갑니다요!”
출발할 듯 부릉거리는 엔진음 소리에 김요한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인원이 모두 탑승하자 앞 좌석에 앉은 춘삼이가 말했다.
“안전밸트 매십쇼.”
“짐 다 실었지? 이게 다인가?”
“예.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갑니까?”
“명동 도레미 백화점부터요. 할 일은 도착한 후에 알려 주실 겁니다.”
운전대를 잡은 춘삼이가 엑셀을 밟자 차가 기세 좋게 움직였다. 공항을 떠나 대도로 들어선 강태준은 주위를 살폈다. 고작 일 년 새 수도인 서울은 여러 가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군부정권이 들어선 이래 거의 매일같이 보이던 시위는 사라지고, 거리는 흔적 없이 깨끗해졌다.
창밖에서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도로에서 보수 공사를 하는 것이 관심이 갔다.
“그러고 보니 백경자원 쪽은 요새 어떤가? 맡겨 놓고 통 관심이 없었군.”
“뭐 경기가 그닥 나쁘지 않습니다. 고철값이 많이 올라서. 요새 건설 경기도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여기저기 주문이 많더군요. 쓸 만한 건 재활용해서 팔고 있습니다.”
“그래? 요새는 어떤 주문이 많나?”
“글쎄요. 한 가지로 특정하기 어렵고 여기저기 잡다한 주문이 많이 옵니다. 요새는 양계장을 한답시고 케이지 주문이 많이 오더군요.”
“양계장이라고?”
“예. 전반적으로 육계 소비가 좀 늘어난 것 같더군요. 한국 가금협회를 통해 대량으로 주문이 들어왔는데 덕분에 저번 달부터 자재 수급하랴 꽤 바쁩니다.”
“오, 단순한 구멍가게 수준이 아닌가 보군. 협회가 자금력이 꽤 있나 본데?”
“예. 저도 처음 들어 보는 협회인데, 외국서 수입한 교배종으로 우수한 채란계를 확보하겠다고 포부가 크더이다. 요사이 육종 개발에 의욕이 넘치더군요. 양계업자랑 소속 학자들이랑 연대해서 만든 단체인데. 꽤 적극적으로 움직이더라고요.”
“육종 개발을 할 정도면 전문가가 필요할 텐데. 그럼 뭐 업계 주간지 같은 건 있나?”
“아직 없는 걸로 압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 도와주겠다고 줄을 대 봐.”
“주간지 제작을 말입니까?”
“그래. 싹수가 보이면 자연스럽게 협회랑 끈을 만들어 두는 게 좋지 않겠나. 사람이 많으면 돈이 모이는 법이지. 앞으로 그쪽이랑 친해지면 나쁠 거 없어.”
오징어 단가가 높아지는 와중에 아직 MSG와 관련한 사탕수수 원당 수급을 해결하지 못한 상황인 만큼, 강태준으로서는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
더욱이 60년대 중반부터 정부에서 쇠고기 대신 닭고기라는 시책을 적극 장려함에 따라 육계 생산량이 급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시장 선점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 뭣하면 나중에 사료 수입 시에 숟가락을 얹을 수도 있겠지.’
계산을 끝낸 강태준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춘삼이가 말했다.
“사료 말씀을 하시는 걸 들어 보니,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요. 좀 신기한 의뢰가 있긴 했습니다.”
“어떤 의뢰?”
“김해 쪽에 비닐로 집을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다는 양반이 있더군요. 겨울에도 과일을 재배할 수 있게 한다던가. 그래서 농업용 비닐이랑 함석판을 최대한 많이 구해 달라 하더이다.”
“비닐하우스?”
“예. 직접 봐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보류해 두었습니다. 김해 가 보시면 미군 퀸세트 막사처럼 생긴 하우스 건물들이 쫙 늘어져 있습니다요.”
말이 사실이라면 꽤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일본에서는 비닐을 이용한 농업이 활발하게 상용화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농업용 비닐이 막 생산된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
반신반의하는 강태준에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요한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