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33화 (133/361)

133화 증권 파동

같은 시각, 한국.

[수도 결재 불능사태. 문 닫힌 주식시장.]

[80배 뛰었다가 폭락한 작전주. 70분의 1토막, 추락은 어디까지.]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갑자기, 주가 폭락이라니.”

“아이구야. 망했네. 망했어!”

강태준이 조업에 열중한 동안 국내 주식시장은 대혼란의 연속이었다. 대증주 거래가 정점에 달했던 1962년 5월의 거래소 입회장 매매 물량을 받아 내던 흥신증권 대리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 의식을 잃고 졸도해 버린 것.

사람들은 애써 외면한 사실이지만 증권 파동의 전조는 지난 1월부터 존재했다. 농협이 보유한 한전 주식 4만 주가 쏟아져 나오고 거래소 지분의 과반을 가진 흥신증권은 일구, 명동증권 3사는 함께 대증주를 사들여 값을 계속 올렸던 것이다.

한마디로 폭탄 돌리기. 3월부터 증시는 급등락을 반복했지만, 매수 측이 떠받쳐 준 덕에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어에도 한계가 있는 노릇. 흥신을 비롯한 3사는 유상증자 청약 기간에도 시세를 떠받치려 매수에 총력을 기울임에도 현금이 바닥났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쟁사의 공격을 막아 내긴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대증주 매물을 계속 받아 내던 증권 3사가 나자빠지자 결제 대금 580억 환 가운데 352억 환이 묶이고 말았다. 사태 수습에 나선 거래소는 정부로부터 긴급자금을 수혈받아 해합으로 간신히 사태를 틀어막았지만 이미 때늦은 수순.

신뢰를 잃어버린 주식시장은 주저앉았고, 롤러코스터를 타던 증권시장은 급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결국 증권거래소까지 장기 휴장에 들어가는 사태까지 빚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군사정권 초기 5천 3백여 명의 청약자를 파국으로 몰고 간 ‘증권 파동’의 전말이었다. 주식거래가 아예 중단되자 패가망신한 투자자들이 속출했고, 목을 매 자살하는 경우까지 빈발하며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원양조업을 나간 강태준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은 그렇게 갓 출범한 주식시장이 폭풍을 맞고 좌초해 버린 시점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한 김포공항 앞, 뭍으로 올라서는 사람들의 얼굴은 거뭇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땅을 딛자 어지러움을 느낀 것인지 휘청이는 강태준의 모습에 김요한이 서둘러 부축했다.

“어이쿠 조심하십쇼. 선장님.”

“배를 너무 오래 탔나. 땅이 다 흔들리는구만.”

국내 직행으로 오는 항공편이 없는 관계로 스페인 마드리드부터 프랑스 파리,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돌아온 터라 땅을 밟는 기분이 생소했지만, 더 신기한 건 그들을 맞고 있던 인파였다.

“강 선장님! 여기! 여기부터 봐 주십쇼!”

“최연소 선장으로서 7번 연속 만선을 하셨다는데 그 비결이 뭡니까?”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는 모습에 강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졸지에 인터뷰를 하게 된 강태준. 졸지에 밀려나게 된 오재갑이 이마를 좁혔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부담스럽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습니까. 아무래도 국내에 뭔 일이 터졌나 보죠.”

덤덤한 김요한의 대답에 오재갑도 긍정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선전을 한다는 건 시선 돌릴 명목으로 물타기가 필요하다는 증거 아니겠나. 재탕 삼탕에 걸친 인터뷰를 끝마치고 나자 뒤늦게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 요란하기도 하구먼. 고생 많았다. 태준아.”

“어머니.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뭐 딱히 걱정할 게 있겠느냐. 그보다 우리 아들, 잘생긴 얼굴이 까맣게 탔구나.”

“하하. 이거야 뭐, 배 타는 사람의 숙명이죠.”

“언제 온다고 말 좀 해 주지. 목 빠지게 기다렸잖아요.”

카메라를 피해 잠시 피해 있었는지 뒤늦게 약혼녀 설유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달 사이 더 세련된 모습으로 화한 설유하는 커리어우먼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이쿠야, 귀하신 판사 나리께서 입국장까지 직접 왕림하시다니 이거 황공무지로소이다.”

“아휴, 얼마 만인데, 뭔 일 제쳐 놓고서라도 달려와야죠. 그보다 이거 까진 거 봐. 긴 토시라도 하지 그랬어요?”

팔뚝에 남은 잔 상처와 화상으로 벗겨진 피부가 그간의 사투를 짐작게 한다.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한 덕분. 내심 속상해하는 설유하의 반응에 강태준이 대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적도 일대는 워낙 더워서 토시 같은 거라도 입으면 땀띠가 나서 오히려 더 괴롭습니다. 게다가 어린놈이 선장을 달았으면 솔선수범해야지. 그늘막에서 놀고 있으면 얄밉잖습니까?”

“그래도 요령껏 해야지. 이렇게 미련하게 몸을 굴리나. 몸 상해서 누가 책임져요?”

“이게 다 훈장 아니겠습니까. 딱히 큰 탈 없이 조업도 끝냈으니 다행이죠.”

“큰 탈이 없기는요. 듣자 하니 한바탕 바다에서 난리굿을 벌였던데.”

“다친 사람 없으면 된 거죠. 선원들 안전이 제 밥줄 아닙니까?”

“이이가 정말.”

설유하의 잔소리가 길어질 듯하자, 어머니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며늘아기야? 태준이가 내 아들이긴 해도 원체 쓸데없는 고집이 있단다. 근데 재갑이는 어디 있니? 혼자만 영 안 보이는구나.”

“아, 그 녀석은 아직 파고파고항에 있습니다. 이번에 선장으로 승진했거든요.”

“아니, 재갑 씨가 벌써 선장이라고요?”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 혼자서도 무방하죠. 아마 그 녀석이 엔간한 선장들보다 실력이 나을 겁니다.”

강태준의 호언장담에 춘삼이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와, 재갑 형도 참 독하네요. 집이 안 그리운가. 그래도 그렇지. 그걸 그 자리에서 수락하다니.”

“쉽게 안 오는 기회인데 놓칠 수야 없지 않나. 다 때가 있는 거야. 이참에 눈도장 찍어야지.”

수석 1항사로 올라간 지 일 년밖에 안 되어 선장직을 인계받은 셈이니 오재갑도 능력이 보통이 아니다. 역시 될성부른 떡잎은 다르다고 할까.

강태준의 칭찬에 설유하가 약간 샐쭉한 눈매를 했다.

“하긴. 재갑 씨도 보통 분이 아니죠. 근데 혹 배 탄 동안 딴 데 한눈팔지 않았죠? 여기저기 수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아이구야. 그러고 싶어도 마땅한 상대가 없습니다요. 마님. 사모아 그 동네는 뚱뚱한 게 미덕이라. 용가리 통뼈들만 모아 둔 곳인데 무슨 썸씽이 있겠습니까.”

“흠, 그런 것 치곤 엄청 열심히 돌아다녔던데요. 재갑 씨 말론 우폴루 쪽에서 댄스파티도 참석한 적도 있다던데?”

“거, 그 자식 입 싸네. 그거야 정보 수집차 참석한 거죠. 미 대사관에서 각국 선장들한테 초청장까지 보냈는데 혼자 뺄 수야 없잖습니까. 허리가 절구통만 한 여자가 코앞에서 벨리댄스를 추길래 식겁하고 나왔지만 말입니다.”

1년간 쌓인 이야기가 많은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간 밀린 대화를 하며 회포를 푼 강태준은 다음날 바로 태동산업 본사에 들렀다. 부산 청하진에 자리 잡은 본사 건물은 예전과 달리 꽤 번창해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강태준을 본 직원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올렸다.

“강 선장님! 이번에도 한 건 올리셨던데요?”

“고마워 미쓰 김.”

“위층에서 수산부장님이 대기 중이세요. 아무래도 수당이랑 급여 건 이야기부터 하실 거 같아요.”

“뭐, 항상 고마워.”

“그럼 파이팅!”

응원을 받은 강태준이 3층으로 올라가자. 수산부장직을 맡은 김정욱이 보였다. 초행길에 불미스럽게 잘리긴 했지만, 심 사장 입장에서는 하나뿐인 외조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일까. 배에 태우는 대신 관리직에 박아 놓은 것이다.

“어이쿠야 영웅 나리 오셨군. 듣자 하니 이번에도 만선이시라면서?”

“오랜만입니다. 초사님, 영웅은 무슨. 남사스럽게. 선장이 고기 잘 잡는 거야 당연한 의무죠.”

“흐흐. 겸손하시긴 소문이 여기까지 자자하더구먼. 범고래 대가리도 따고 엄청나게 쓸어 담으셨다던데? 덕분에 쪽바리들 코가 납작해졌더구먼.”

“에이, 띄워 주는 걸 보니 이상한데요. 그보다 원래 입금되기로 했던 수당이랑 급여는 언제 해결됩니까? 귀국 전에 지불한다고 했는데, 아직 입금이 안 되었더군요. 선원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입니다.”

“좀 기다려 보시게. 이번 달 말까지는 첫 정산금이 들어갈 예정일세.”

“아니, 재깍재깍 입금할 것이지. 뭘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그 정도면 최대한 서두른 걸세. 해무청 놈들이 워낙 빡대가리라. 참치납품처 인보이스(INVOICE) 해석이 잘못돼서 서류 발급이 지연되었다는군. 덕분에 은행에서 정산금 지급이 늦어져서 골치가 아파.”

“흠. 그거 믿어도 됩니까?”

“진짜라니까. 세무서에 수출 대금 면세 관련 제출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이고. 추가로 환전수수료랑 개인별 제세공과금이랑 경비 정산하려면 일이 장난이 아니야.”

“변명은 되었고, 그럼 일단 서류부터 봅시다.”

안경을 꺼낸 강태준이 수당 내역을 세세히 살폈다.

“뭡니까. 이거 뭔가 미묘하게 계약이랑 다른데요. 7회 만선 조건을 채울 경우엔 본사 관리비를 제외하고, 유류나 어구 구입비, 입어료에 식료품 같은 제반 경비 항목은 전부 사측에서 부담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뜨끔한 김정욱이 어색한 표정으로 급히 얼버무렸다.

“하하 그랬던가? 이건 실수. 바로 지우도록 하겠네.”

“그리고 이건 뭡니까. 환전수수료가 달러당 20환이라굽쇼? 이거는 좀 과하지 않습니까?”

“이보게 인건비는 생각 안 하나? 우리 사정도 고려해 줘야지. 세무서랑 은행 댕겨올 때 품이 들지 않나. 세금 관계랑 관련 서류 대행해서 회사에서 일괄 처리하려면 이 정도는 약과야.”

“일단 그렇다 치죠. 제일 중요한 게 보합금인데 1차도 입금 안 되었으면 나머지는 언제 정산된다는 겁니까?”

“스타키스트에 넘긴 물량이 소화되면 그때 나올걸세.”

“확답을 주셔야지요. 그럼 나머진 다음 달이면 되겠습니까?”

“그건 좀 곤란하이. 우리도 현찰이 부족해서 말이야. 선심 좀 쓰지. 우리가 어디 떼어먹기라도 하나?”

“오래 걸리면 뭘 얼마나 쓰란 겁니까?”

“한…… 6개월 정도?”

강태준이 표정은 싸늘하게 굳자, 이윽고 민망해진 상대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게 웃깁니까?”

“거, 미안하이.”

“아니, 솔직히 까놓고 말해 봅시다. 목숨 걸고 조업하고 왔더니 정산까지 반년을 더 기다리라니. 이건 당초 약속이랑 많이 틀리지 않습니까?”

강태준이 언성을 높이자. 김정욱이 쩔쩔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자자.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내 돈을 언제 안 준다 했나? 자네도 사업가니 잘 알잖나. 회사가 다 자기 자금 가지고 운영하나, 자금이 일시적으로 부족할 때도 있는 거니 사정 좀 봐주게.”

“흥. 그게 어디 제 탓입니까? 엄한 곳에 쓰니 그렇지. 요사이 성락원 투자 건 때문에 말이 많던데 그것 땜시 그런 거 아니요?”

콧방귀를 뀌는 강태준에 정곡을 찔린 김정욱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귀신을 속이지. 내 밖에 있다고 모를 거 같소? 그쪽에 관광단지 조성한다고 중앙지 신문에서 엄청나게 설레발이더만.”

“그, 그게 소문이 그렇게 났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요. 심 사장님이 투자한답시고 벌여 놓은 일이 한두 개가 아니던데요. 영화사 쪽에도 거금을 투자했다더니 대놓고 인터뷰까지 했던데 말입니다.”

“…….”

할 말을 잃은 김정욱에 강태준이 굳은 얼굴로 힐난했다.

“이건 아니죠. 직원들 급료랑 수당 줄 인건비를 다른 비목으로 전용하면서 따로 투자할 돈이 있다니 그건 참 자기 편의적인 말씀입니다.”

“말은 바로 하지. 내가 투자했나, 심 사장님랑 윗선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일을 가지고,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인연을 좀 생각해서라도 봐주시게. 자네도 내 덕에 그래도 빨리 선장 달지 않았나?”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강태준으로서는 실로 기막힌 소리였다. 뻔뻔하기도 유분수지. 배 한 번 같이 탄 것이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고 들먹이는 건지. 엄밀히 따지면 최악의 충돌을 막은 건 강태준이니 저를 살려 준 은인 아닌가.

김정욱도 막말을 뱉고는 아니다 싶었는지 슬슬 시선을 피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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