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고래 VS 인간
아무리 근속 관계라지만 계약상 특별 조항이 걸린 이상, 태동산업에서 과연 협조할지가 미지수였다.
“한국 배가 프랑스와 거래 조건을 논의하다간 조업 기간이 끝날 것이 뻔하고 뒷돈을 주고 들어간다 해도 나포될 위험이 있다라. 결국 수지를 맞추려면 몹쓸 놈의 갱단과 한판 붙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하지만 일본 어선이 빠지면 남는 배는 저희뿐입니다. 범고래가 바보도 아니고, 그럼 우리가 주 타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경쟁자가 빠지면 단독 조업 아닌가. 리스크가 크다는 건 그만큼 먹을 것도 많다는 소리니까.”
결국 해로의 결정권은 선장이 전적으로 쥐고 있는 만큼 추가적인 논의는 불필요하다. 모두를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 이런 논의는 오래 가 봐야 불안만 커질 뿐 밀어붙이는 게 답 아니겠다. 마음을 굳힌 강태준이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아 참, 오 항해사, 오늘 양승 작업은 자정 전에 끝날 예정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끝나는 대로 엔진 끄고 바다 위에 표박시키자고. 새벽 4시에 깨워 주게.”
그사이 해도실에 들어간 강태준은 해도를 다시 점검했다. 근래 제일 큰 문제는 이상 기후가 겹쳐 해류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파악이 어렵다는 점. 이곳의 해류는 대체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주류였지만 최근 해류의 흐름이 널뛰기를 하다 보니 정확한 선위를 파악하기도 그렇고 어군 추적도 어려워졌다.
‘해류 흐름을 찾는 게 문제인데 참으로 어렵군.’
어군 탐지는 일단 원래 잘 잡히던 곳에서 유추해 추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해와 같이 여러 우연이 겹쳐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면 경험 많은 선장이라도 적응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강태준이 해도와 씨름하는 사이 선원들은 일찍 취침해 들었다. 어느새 꿈속에서 한바탕 새치와 힘 싸움을 한 강태준이 일어나 보니 온몸의 근육통 때문인지 목 뒤가 뻑뻑하게 굳었다.
깜빡 잠에 들었었나. 시계를 보니 3시를 조금 넘은 시간, 새우잠을 잔 게 유효한지 조금 몸을 추스른 강태준이 갑판 위로 나와 보니 2등 항사인 오재갑이 열심히 수온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벌써 깨셨습니까? 좀 더 주무시지요?”
“거참, 부지런하구먼. 물 온도는 어때?”
“19도입니다. 간밤에 많이 내려갔더군요. 아마 아침이 돼서 오를 듯한데 괜찮으십니까? 커피라도 타 드릴까요?”
“괜찮아. 잠시 바람 좀 쐬면 되네.”
선수로 향한 강태준은 가볍게 어깨를 풀면 기지개를 쳤다. 선선한 바람을 쐬니 뻐근했던 기분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늘의 별이 총총하게 박힌 것이 수평선도 분간되지 않는 칠흑이었다. 해면 아래 별무리가 내려앉은 듯 잔잔했다.
바위나리와 함께 아기별이 빠진 장소처럼 황홀했고,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듯 갑작스럽게 바다 위로 야광빛이 올올히 솟구쳐 올랐다.
“저거 보십시오. 선장님. 뭔가 신기한데요.”
“폴리눌라군.”
“그게 뭡니까?”
“산호 유생의 일종이지. 조초산호가 뿌리는 알인데. 마침 번식 철이었나 보군. 일 년에 한 번쯤 있을 진귀한 장면이야.”
“아름답군요.”
연 1회 늦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보름달 또는 초승달이 해지기 전후에 동시에 산란한다. 왜 이 시기에 산란하는지 딱히 밝혀진 근거는 없지만 어떤 학자들은 수온이라던지 명암 주기의 영향으로 복잡하게 얽힌 현상이라고 했다.
산란기의 산호는 페로몬같이 특유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먹잇감에 포착되기도 쉽다. 먹이를 쫓아온 듯 바다에는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갖가지 부유생물들이 넘쳐 물색이 탁해질 정도였다.
알과 뿌연 정자가 연이어 떠오른 모습에 간만에 난리가 난 것은 오징어들이었다. 호광성 동물인 오징어가 힘차게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하는 사이 해수를 따라 부유하는 폴라눌라 유생을 잡아먹기 위해 고기들이 일제히 몰려드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날이 끝내주는구먼.”
“정말 좋은 어장입니다. 샤치 떼만 없으면야 만선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원래 단꿀에는 벌레가 많이 끼기 마련인 법이지.”
선상 위에 선 강태준은 바닷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선선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뱃전을 치고 돌아 나갔다. 잔잔한 바다 뒤로 물결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 가운데, 흰 물거품 같은 파도 잔주름처럼 접혔다. 보기에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이상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이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꺄르르 하는 소리가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소음처럼 괴기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소리를 들은 오재갑의 표정도 심상찮게 변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망할 놈의 포식자들이 주위에 있다는 소리지.”
“네? 뭐 말입니까.”
“샤치 놈들, 놈들이 아직 우리 주위에 있는 거야.”
어둠 속에 보이진 않지만, 놈들은 분명 이 주변에 있다. 그 직감은 본능의 영역이었다. 기분 나쁜 움직임은 금세 선원들에도 전달되었다. 외투를 걸치며 나온 김요한이 몸을 떨며 옷깃을 여몄다.
“이거 우리 주변에 어슬렁거린다는 건데, 어째 으스스 합니다요.”
“영악한 놈들은 조업선을 발견하면 절대로 그곳을 떠나지 않지. 유영하는 고기를 사냥하는 것보다 포획된 어획물을 따 먹는 게 더 쉬우니까.”
놈들은 정탐하듯 숨을 잔뜩 죽이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 어장을 내버리고 옮겨 나갈 다른 어장도 마찬가지로 불황에다가 샤치의 피해가 대단할 것이다.
‘진퉁이나 짝퉁이나 둘 다 쉽지 않은 상대군.’
진짜 범고래들을 따돌리고 조업을 성공시킨다라. 쉬운 미션이 아니다. 강태준은 어찌 보면 무모하다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할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역시 이번 기회에 저 난폭하기 그지없는 포유류 갱단과 맞붙어 이겨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근거 없는 오기가 아니다. 껍질은 젊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선장으로서의 내공은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싸움은 피할 수 없겠지. 전원 기상! 선원들을 모두 깨우게.”
타- 타- 타-.
잠시 후,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밤공기에 흩뿌려지며 동력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진 슬로 어헤드!”
강태준이 엔진 작동 상태를 확인하며 텔레그래프를 뒤로 젖혔다. 부저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배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갑판장이 고함을 질렀다.
“요로시하게, 거기 뭐 하나? 줄 당기고!”
“키, 스타보드 이지!”
타륜을 6~7도에서 가량 돌리자 선미부에서 비수류가 왈칵 뿜어나왔고 배는 천천히 꿈틀거렸다.
배는 조금 전진하다 말고 서서히 선수부가 오른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별들이 흘러가는 모습이 빨라지며 배가 핑그르르 돌았다. 적어도 반경 1킬로미터의 원을 그리며 회두할 예정. 숨어 있던 포식자들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범위다.
지금껏 은밀한 정탐을 계속하던 놈들이 때가 되었다며 출전 태세를 갖출 것이 분명했다.
배 꽁무니로는 곡선 모양의 항적이 그려지고 있었다.
버저 소리가 다시 멎는가 싶더니 선체가 부르르 떨었다. 뱃전이 파도를 가르고 빠르게 해수면이 왼쪽으로 흘러갔다. 뱃머리가 첫 출발점으로 거의 되돌아온 것을 확인한 강태준이 기관 전속 전진 명령과 함께 키를 크게 좌회전시켰다. 회전을 끝낸 배가 항진하는 모습을 확인한 강태준이 김요한을 불렀다.
“엔진 하프 어헤드로! 현재 선수는?”
“40도입니다.”
“좋아 280도에서 정침한다.”
강태준이 살핀 시계는 이제 3시 45분이었다. 일출까지 이제 막 1시간 반 남짓 남았다.
강태준이 생각하는 이미 1시간을 머릿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미속 전진. 엔진 알피엠 올려!”
“들었지! 호시비하시란다!”
갑판 작업등을 모두 켜자 잠에서 깨어나듯 요란한 기관음을 내는 배.
마치 해전을 치르는 기분이군.
앞을 보니 선수가 가벼운 피칭을 하며 밤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속도는 시속 15노트.
힘차게 선속으로 달리는 배였지만, 돌고래라면 몰라도 진퉁 샤치 놈에게는 우습지도 않은 속력이다.
놈들의 최고 유영 속도는 25노트.
탄환처럼 달리던 고래들이 추격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자 강태준이 재차 명을 내렸다.
“바로 투승이다! 투승 개시! 랫고!”
포식자가 득실거리는 해역이었지만 선원들은 군말 없이 말을 따랐다.
투승을 계속할수록 강해지는 저항. 항장력이 300kg에 다하는 강한 구라론줄이었지만 강한 파도에 비하면 턱없이 미약했다. 데크 위로 몰아치는 파도에 피칭하는 배. 비옷을 입은 선원들이 물보라를 맞으며 사투하는 사이 강태준이 재차 소리를 질렀다.
“지금 몇 바스켓 나갔어?”
“서른 개쯤입니다.”
“그럼 일단 열 개 더 던지고 나서 중단하도록 해. 스크류 샤푸트에 줄 감기지 않게 조심하고.”
40바스켓에 투승을 중단하라니. 한 바스켓에는 3~40미터 간격으로 여덟 개의 낚시가 걸리니 다 합쳐야 320개 정도. 이 대양에 그 정도 물량을 뿌려 봐야 고기 한 마리 잡기도 의심스러웠지만, 강태준의 표정이 워낙 진지한 탓에 아무도 더는 말을 걸지 못했다.
“40바스켓 투승 완료.”
“좋아! 정북으로 변침 후, 전속 전진한다!”
몸의 중심을 가누며 낚싯줄을 투승하던 선원들이었다.
선미에서 신호가 오자 강태준이 바로 다음 명을 전했다.
“즉시 변침 90도 투승 재개하도록. 앞으로 한 시간마다 90도씩 좌현으로 변침한다.”
투승이 끝날 때는 시작하는 위치에 접근하게 되니 거기서부터 다시 걷어 나갈 생각. 마치 방향키를 잃어버린 것처럼 삐뚤빼뚤 사각형을 그리며 돌며 다시 찔끔찔끔 주낙을 뿌렸다.
그렇게 투승이 끝나고 양승조가 갑판에 도열하자 주갑판의 양승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선원들에게도 이런 식의 투승 방법은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주낙이라는 애초에 연승이 목적인데 그걸 일부러 끊어 먹고 토막 내자는 소리 아닌가.
선원들이 궁시렁대든 말든 강태준의 신경은 온통 범고래 떼에 쏠려 있었다. 쌍안경으로 계속 수면 위를 살폈지만, 녀석들은 물속 깊은 곳에 잠수한 듯 아무 데도 띄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나올 생각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게 해 줘야겠지, 양승 개시!”
이번에 감아 들인 주낙은 떼놓은 40바스켓이었다.
아랫줄에 짤린 주낙이 딸려 나온다. 과연 낚시를 걷어나가기 얼마 안 되어 저쪽에 던지다 만 바스켓 중간부터 수십 마리나 되는 범고래들이 우글우글 몰려나왔다.
“아무래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똑똑해 봤자 결국 동물이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샤치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다 40바스켓은 애초에 버리기로 작정한 미끼. 사실 이쪽 해역에서 조업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최상위 포식자들이 설쳐 대기 전에 던져 줘 버린 거다.
제2 지평호가 멀어지자 허탕을 친 범고래들은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도 뜀뛰기로 접근해 왔다. 마치 토끼가 뭍을 박차듯 껑충껑충 내달리는 모습에 뿌연 거품이 일었다.
“전속으로 전진! 놈들을 따돌리는 거다.”
배가 기관음을 뿜으며 멀어지자 배의 항적을 따라 뒤쫓아오는 범고래들. 흰색과 검정이 어우러진 유선형의 몸뚱이를 해면 위에 드러내자 매끈한 몸통이 눈에 뜨인다. 하지만 흰 포말을 내뿜으며 내달리는 모습은 영화 속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옵니다!”
“무시해!”
몸체를 물 위로 내밀어 꼬리까지 떠올린 대장이 깊이 잠수해 총알처럼 내달린다. 그리고 한 무리의 범고래 떼들이 대장의 뒤를 따랐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