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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28화 (128/361)

128화 바다의 제왕

흰 포말이 이는 바다. 저 멀리 큰 백파와 함께 갈매기 떼들이 보이자 전방을 살피던 김요한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런 젠장, 벌써 어장을 선점한 조업선이 있구먼요.”

“그게 누군가?”

“일본 참치 선인 거 같은데요? 이름이…… 요코하마호라는데?”

“허, 뭘 뜯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나?”

타륜을 다시 넘긴 강태준이 쌍안경으로 배를 살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약 70여 톤 남짓한 목선으로 만들어진 일본 배였다.

연식이 꽤 오래된 듯 페인트가 곳곳에 벗겨진 배는 막 주낙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갈고리에 걸린 고기를 보니 조업이 그렇게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거이거, 아무래도 저쪽도 크게 당한 모양인데?”

“누구한테 말입니까?”

“샤치 떼들 말이야. 아, 저기 도둑놈들이 있구먼.”

길게 물결을 그리는 범고래 떼가 주낙에 걸린 물고기를 따먹고 있다.

조업 중인 선원들은 양승기를 돌리며 분투했지만, 그건 마치 범고래들 코앞에 음식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낙 위로 올라오는 고기를 마치 감꼭지 따듯 털어먹는 놈들.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고소한 마음이 들기보다 화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자식들, 아주 지능적으로 사람 돌게 하는구먼요.”

“그러게 말이다. 대담하군.”

“어? 근데 저게 뭐 하는 겁니까?”

참다못한 요코하마 호에서 갑자기 모터보트 한 대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간부 선원으로 보이는 고참 한 명과 젊은 백인 두 명이 한 조를 이루고 있었다.

해면에 착지하기 무섭게 서치라이트를 켠 보트는 윙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갔다.

“빠가야로!”

완전히 꼭지가 돌아 버린 듯 총을 든 선원은 몹시도 광분해 있었다. 큼직한 장총을 마구 쏘아 재끼자 날아간 총탄이 해수면을 찢어발기며 물보라가 튀었다.

“저런 미친놈. 저런 걸 어디서 구했지?”

“그게 뭣이 중한가? 그래. 걍 쏴서 다 죽여 버려!”

선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준 일행도 내심 선원들을 응원했다.

그간 하도 시달려서 맺힌 것이 많았던 탓.

총알이 수면을 튕기며 날아들자 범고래들 역시 물 아래로 숨어들어 갔다.

더욱 분노한 듯 총을 쥔 선원은 해수면을 향해 연이어 장총을 격발했다.

잠시 후, 기세 좋게 총을 난사하다가 총알이 다 닳았는지 철커덕하고 격발이 멈춘 보트.

탄창을 서둘러 교체하려던 찰나, 갑작스레 범고래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쿵!

배를 주변을 격렬하게 돌던 범고래들이 그대로 배를 들이밀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엄청난 힘에 못 이긴 보트가 핑그르르 돌자 키를 잡은 선원이 휘청였다.

그러나 공격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큰 울음소리를 낸 고래 떼들이 번갈아 가며 방향키를 사정없이 들이받았던 것이다.

“어어!! 미친! 저거 엎어지는 거 아닌가?”

“저저. 도와줘야 하지 않습니까?”

사태를 주시하던 선원들은 마치 제 일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모선에 있던 선원들 역시 서둘러 구하려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목선 앞으로 수십 마리의 범고래들이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터보트 위에서 장총을 쥔 남자가 부랴부랴 바다를 향해 다시 한 발을 날렸다. 그러나 남자의 저항은 거기까지였다. 총성이 끝나기 무섭게 화악 물살이 솟구치더니 범고래 하나가 코앞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 X자 모양의 흉터가 선명한 범고래의 이빨이 선명하게 코앞을 비추자 기겁한 남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연이은 총성과 함께 배가 홀랑 뒤집히면서 바다에 빠진 사내들.

물에 빠진 엽사가 허우적거리기도 잠시 꼬르륵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Help!”

“Save me!”

총을 쏜 남자와 같이 타고 있던 백인 선원 하나가 서둘러 모선을 향해 수영했다. 득달같이 모선이 달려와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향해 서둘러 구명줄을 던졌지만, 뒤따라온 범고래는 그대로 구명튜브를 씹어 터트려 버렸다.

긴박한 상황에도 할 수 있는 남자가 일은 없었다. 손을 허우적대며 물에 빠진 선원들은 이미 저항 의지를 잃은 뒤였지만 범고래는 집요했다.

잠시 후 해일처럼 큰 그림자가 위를 덮치더니 장난감처럼 선원의 몸통을 문 녀석이 바닷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꼬륵 거리는 거품과 함께, 수면 위로 번지는 피. 물감처럼 붉은 기운이 번져 올라오는 모습에 요코하마 호의 선원들이 절규했다.

“오, 마이 갓! 갓 뎀!”

“센초(船長)! 센쵸오오오!”

고래가 사람을 죽이다니. 코앞에서 본 건 아니지만 제2 지평호 선원들 역시 엄청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함에 파리해진 얼굴들. 선원들이 동요하자 눈치 빠른 강태준이 서둘러 주변을 환기했다.

“뭣들 하나? 다들 멀뚱히 보고 있을 땐가? 당장 해양경비대 쪽으로 연락하게.”

“예…… 엣!”

얼마 지나지 않아 전보가 도달했고, 팔라울리 쪽에서 미군 소속 정찰기 두 대가 출동했다. 그 사이 일본 대사관에 보고가 올라갔는지 사모아에 대기 중이던 총영사가 신호를 보냈고, 기지장이 voice를 잡고 연신 교신을 주고받았다.

경비정 1,500톤급 두 척과 헬리콥터가 떠서 주위 선박이 집결하자 조업은 잠시 보류되었다.

포르투갈과 대만, 스페인, 일본 배 등 수십 척이 동원되어 본선을 기점으로 5마일 간격으로 수색 작업을 펼쳤다.

조사단과 함께 소식을 들은 인근 해역에 있던 배들이 죄다 몰려들자 사고 발생 해역 근방은 배들로 가득 찼다. 특종감을 찾는 기자들까지 가세했지만, 의미 없는 수색이 계속되면서 조업에 극한 지장을 주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선원들이 조사단에 항의했다.

“주변 해역까지 죄다 뒤지는 건 시간 낭비입니다. 물속으로 끌려간 꼴을 똑똑히 보았다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쓸데없는 짓입니다.”

“실종되었으니 대충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시체 일부라도 수습하는 것이 도리일세.”

무려 한 배의 선장이 불법 개조한 무기를 들고 바다에 총질하다 꼴 받은 범고래에 잡아먹혔다고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실제 사실관계는 명백했지만, 요코하마 호 선원들은 이미 입을 맞춘 듯 딴소리를 했다. 그 점은 미국 경비정도 마찬가지.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언론의 관심과 성난 유족들을 생각하면 뭐라도 하는 척을 해야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실종자 수색이 이루어지는 동안 조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던 밤 11시경, 파도를 타던 강태준은 배 한 척과 조우했다.

레이더 면상에서 깜빡이는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응? 저건?”

배의 발광 신호를 포착한 강태준도 마주 화답 신호를 보냈다. 라이트를 껌뻑이자 잠시 후 저쪽에 탄 배의 선원들이 함께 건너왔다. 상대는 그의 선배이자 은사인 양재문 선장이었다. 물기로 축축한 모자를 털어 낸 양재문이 인사를 건넸다.

“양 선장님!”

“이거 레이더 신호만 보다 지나칠 뻔했군.”

이 넓은 해역에서 마주치다니 강태준도 매우 반갑기 짝이 없었다.

“중간에 운반선 쪽에 한 번 들렀거든. 거기서 신선한 채소와 부식을 좀 챙겨 왔는데 좀 많아서. 아무래도 자네들이 필요할 것 같아 말일세.”

“오 이렇게 감사할 데가. 고맙습니다.”

강태준에게 남은 부식을 넘겨준 양재문과 그간의 조업과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지랖을 떠셨더군. 덕분에 난리도 아니야.”

“운반선에서 보셨다고 하셨는데 조사단에서 뭐랍니까?”

“그 배 말인가. 알아보니 모터보트 방향키 부분만 겨냥해 들이받았더군. 범고래와 부딪쳤을 때 이미 키가 망가졌다고 하더라고.”

“고래 힘이 그 정도였나요?”

“힘도 힘이지만 배의 구조를 잘 아는 놈들이지. 최소한 어느 쪽을 공격해야 배가 망가지는지 대충은 알고 때린 것이 분명해. 영악하기 짝이 없더군.”

포식자가 약점을 공격하는 거야 사실 본능인 만큼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범고래는 사실 역할 분담이 완벽하게 이뤄진 조직구조를 가진 생물이다. 향유고래 같은 큰 먹잇감을 공격할 때는 협동전을 하는데 공격조와 도주로를 차단하는 수비조의 역할이 나뉘어 있을 정도니 유기체로서 소한의 전략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말.

실제로 수비조에 속하는 범고래들은 먹잇감이 잠수해서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 경로를 차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어. 야쓰오 씨말일세. 실력 있는 선장이셨는데 마음이 아프더군.”

“아는 사이셨습니까?”

“개인적으로 친분이 좀 있긴 하지. 젊을 적 포경선 탈 때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 사고 당시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자네들도 직접 보았다고 하던데.”

강태준의 설명을 들은 양 선장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이쿠야. 그래서 그랬군. 아쿠 그놈을 만났구먼.”

“아쿠라니 그게 뭡니까?”

“범고래 중에 이마에 X자로 칼집이 난 녀석이 있지 않은가……. 일본어로 아쿠가 악마란 뜻이 아닌가. 하도 당한 놈이 많아서 넌덜머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군.”

“나름 명성을 떨친 놈이었군요.”

“그래 예전에 그 양반. 예전에 동생도 화를 당했다지. 그래서 언젠가 그놈을 만나면 쏴 죽일 생각으로 항구에서 불법 개조한 총기를 머리맡에 두고 있었다는 거야.”

“아, 그럼 이마에 생긴 흉터가?”

“그렇지. 원수를 봤으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겠나. 암튼 꽤 안타깝게 되었어. 원수를 갚으려다 오히려 본인이 당하다니. 하늘도 참 무심해. 고향에 노모 한 분이 계실 걸로 아는데 자식을 둘이나 앞서 보낸 걸 알면 얼마나 충격이 클지…… 덧없구만, 덧없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가족과 떨어져 이역만리에서 객사라니. 왜인지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공기가 가라앉자 양 선장이 무릎을 털며 일어섰다.

“끙 차, 그럼 난 가 보겠네. 아무래도 조업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귀국해야겠어.”

“벌써요?”

“여기 샤치 떼가 온 사방을 뒤집고 있는 마당에 조업은 하나 마나 아닌가. 다른 곳도 사정은 영 별로라더구만. 뭐 목표치의 9할 정도는 채웠으니 적당히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자네는 계속 잡을 건가?”

“저야 뭐, 아직 어창을 반밖에 못 채워서, 해 볼 만큼 해 봐야죠.”

“그래. 뭐 똑똑한 사람이니 잘할 거라 믿네. 그렇다고 너무 오기 부리지 말고.”

당부를 마친 양재문이 다시 모선으로 갔다. 안전 항해를 빌며 항구로 달려가는 배의 뒤꽁무니를 보며 강태준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 후에도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자, 조사단에서는 범고래가 보트 선원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에 자극을 받은 범고래로 인해 발생한 헤프닝이라는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이제 수사 종결을 한다고?”

“어제부로 유가족과 협의를 마쳤다는군요. 입막음조로 꽤 두둑이 쥐여 준 모양입니다.”

“다행이군. 어차피 뻔한 쇼인데 뻘짓거리는 그만해야지. 그럼 조업은 어떡한다던가?”

“일본 배들은 조업 포기랍니다. 다른 어장으로 옮겨간다는군요.”

“어디로?”

“폴리네시아 쪽 수역으로 간다는군요. 아무래도 범고래가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오재갑의 말에 따르면 사고를 당한 선장은 다름 아닌 니찌레이 소속이었다. 니찌레이 본사와 미쓰비시 측이 입어료를 추가로 내고서라도 해역을 바꾸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건 이번 사태를 꽤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프랑스령으로 장소를 바꾼다고. 입어료를 감수할 정도면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군.”

“사정이 저 정도면 우리도 옮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다른 곳에서도 사정은 비슷해. 이동시간을 고려해 보면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걸세. 옮겨서 탐색하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나.”

이 해역을 벗어나 새로 어장을 찾으려면 장장 동북쪽으로 수백 킬로는 이동해야 한다. 새 어장에 간다고 바로 다시 조업하는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 어군 탐색을 해야 하는 데다. 벌써 연료를 상당 부분 소진한 상황이니만큼 이대로 항차가 종료되면 목표치를 채우기 힘들다.

무엇보다 한국은 일본과 사정이 많이 달랐다. 프랑스 쪽 관할 해양부서와는 정식으로 조업 쿼터에 합의가 없어. 입어 척수나 입어 조건상 계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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