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샤치 출현
투승 개시, 침로 1시 80분 방향.
기록을 남긴 강태준은 몰려오는 노곤함에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일주일 만에 3개의 어창 중 하나는 절반 정도 채웠으니 나름 선방한 셈이랄까.
강태준은 조타용의 높다란 의자 위에 올라가 몸을 뒤로 젖혔다. 쿠션감이 좋은 의자는 등받이용으로 좋았다.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고 이따금 출렁였다. 해면은 거울처럼 맑아 아래 유영하는 물고기가 보일 정도.
파도 위에 뜬 배는 그림자도 없이 그냥 건들거리며 떠 있었다.
생선 비늘처럼 반짝이던 잔파도가 배를 희롱하는 동안. 갑판에서는 열 명도 더 되는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프로펠러가 도는 선미 꽁무니에서는 물이 왈칵 쏟아졌다.
강태준은 항사에게 뒷일을 맡긴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오뚜기처럼 뒤뚱거리는 배 위에 네댓 마리나 되는 고기들이 뒹굴고 있었다. 컨베이어 아래 부이가 구르고 있는 것이 대략 서른 개. 양승이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는지 배의 우현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줄로 현장을 따라 열심히 낚싯줄을 다스리고 있었다.
사이드 롤러로 줄을 감자, 구라론으로 된 주낙이 해면 위로 끊임없이 감겨 올라온다. 강태준이 사태를 점검하는 중 갑자기 양승기가 멎는가 싶더니 선원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월척이다!”
사이드 롤러에 바싹 붙어 있던 최영호가 고함을 질러 대었다. 긴 꺽다리로 버티고 선 헷또가 신호를 보내자 갑판에 있던 선원들이 일제히 현문 쪽으로 몰려갔다.
과연 잔뜩 움켜쥔 낚싯줄은 팽팽하게 긴장된 채로 물속 깊이로 내뻗쳐 있었다. 해면으로부터 슉슉 물 베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올올히 방울져 내리고 있었다.
“오. 이제 감이 오나 아나? 이제 초짜 티는 벗었는데?”
“밥 먹고 이 짓만 몇 개월인데…… 바보도 아니고, 이젠 지도 사람 구실 해야지요.”
최영호는 머쓱하게 씩 웃었다. 그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서투른 실력 덕에 꽤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였다.
“어이, 농담은 나중에, 일단 놓치지 않게 조심해.”
“아. 옛!”
박상구가 낚싯줄의 중간 허리를 잡자 최영호도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고참 선원들이 주낙을 거둬들이는 동안 남은 선원들은 이미 대나무 갈퀴를 움켜쥐고 대기했다. 어획물이 가까이 오면 단매에 정수리를 내려찍어 버릴 제압할 요량이었지만 고기는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이거 되게 무거운데요. 고기가 거꾸로 매달린 거 같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그것도 못 당겨내?”
사정없이 타박하는 입과는 달리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견습들이 힘을 보태자 움켜쥐고 있는 낚싯줄은 배의 전진과 함께 팽팽해지며 항로 쪽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잠시 후, 마치 부상하는 잠수함처럼 부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멈칫했다.
낚싯줄 끝에서 아무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손끝에 느껴지는 허망함에 선원들의 기대는 곧 실망감으로 변했다.
“이게 뭐꼬?”
반쯤 먹다 만 것처럼 대가리만 남은 물고기가 낚싯줄 끝부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무척이나 해괴했다. 너덜너덜한 살점과 찢어진 피막이 흔들리는 모습에 인상을 쓴 선원들 이내 상태를 확인한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젠장~~! 이거 뭐야?”
“스벌, 샤치다. 샤치가 지나갔어.”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의 모습에 탄식하는 사람들. 어획물을 갑판 위에 놓고 보니 남은 고기라고는 겨우 주둥이랑 정수리 부분 정도, 아가미덮개부터 꼬리까지 휑한 것이 마치 구운 생선을 발라 먹은 듯이 살점만 뜯겨 나가 있었다.
낙담한 선원들이 좌절하는 모습에 연식이 짧은 김요한이 어안이 벙벙했다…….
“샤치요? 뭐길래?”
“흑범고래(Pseudorca crassidens)라는 거지. 참돌고래과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녀석인데 이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범고래와 비슷하게 생겼어. 몸집도 비슷하고 다만 돌고래랑은 달리 윗 주둥이가 둥그런 녀석인데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지.”
“아니, 그 귀여운 돌고래가 이런 짓을 한다고요?”
김요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새삼스럽게 고기에 난 상처를 들어 보았다. 사정없이 물어뜯긴 빅아이의 땡그랗게 큰 눈은 이미 생기가 빠져나가 있었고, 목 밑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성한 머리 부분에도 할퀸 듯한 이빨 자국이 그로테스크하게 남은 모습에 갑판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귀엽긴 얼어 죽을. 그놈들이 얼마나 독한지 아나? 자네도 몇 번 당하면 절로 욕이 나올걸.”
“그래도…….”
“수족관에서 광대 짓이나 하는 놈들이랑은 궤가 달라. 이건 눈다랑어인데 60kg은 더 나갈 놈이 말이야.”
“언제 죽었을까요?”
“핏물이 빠진 걸로 봐서는 최소 서너 시간 전에 당한 거 같군. 암튼 오늘 조업은 완전히 공쳤어.”
갑판장이 모가지만 남은 고기의 잔해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지자 철푸덕 소리와 함께 물 아래 가라앉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불길한 예측이 들어맞아서일까. 이후의 조업은 영 엉망이었다. 남은 낚시에도 아까 본 것처럼 볼썽사나운 고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올려왔던 것이다. 사슴에 되새김질하듯 샤치 떼에 쫓기는 어군들은 혼란 속에서도 눈에 띄는 먹이를 덥석덥석 집어삼켰고 더욱 많은 어획물의 잔해가 낚시마다 매달렸다.
낮 동안 내내 한 마리의 고기도 정상적으로 낚은 것이 없을 지경이니 선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당연한 일.
뒤늦게 몇 마리의 고기가 걸려 오긴 했지만, 그걸로 텅 빈 어창을 채우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상한 어체를 본 오재갑이 걱정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지독하군요.”
“샤치 떼가 조업 해역 주위에 있다라.”
고기는 부지런히 건져 올려졌지만 올린 어체 가운데 성한 것은 별로 없었던 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얄밉게도 흑범고래는 감싼 낚싯줄만 피해 발기듯이 베어 먹었다.
인간 입장에서는 어떻게 낚시를 피해 도망치나 싶었지만, 녀석들 입장에서는 숨 쉬듯 당연했다. 70미터 부근부터는 물 안을 분간할 수도 없는 인간과 달리 놈들은 1백 미터 깊이의 낚싯줄에 매달린 어획물을 똑똑히 구별할 수 있는 시력을 갖추고 있다.
희생된 물고기는 씨알이 굵고 기름진 알바코들이 주였다. 적어도 2톤이 넘는 어획물이 노략질 때문에 날아가 버리자 선원들도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남은 고기에도 상처가 남은 덕에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어획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고기잡이가 뜸해지자 일부 선원들은 대나무 갈퀴를 놓고 남은 생선이라도 어떻게든 살려 보려 애썼다. 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아가미와 내장을 끄집어낸 다음 솔로 내장을 벅벅 닦아 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갑판 위에서 뺑이질을 하던 중 최영호가 흰 물거품이 나는 곳을 가리키며 분기탱천했다.
“저저, 저런 개잡놈들을 보십쇼.”
“우릴 놀리는 거지. 배때지를 찢어 버릴 놈들 같으니라고…….”
강태준의 눈에 뜨인 것은 한껏 배를 채운 흑범고래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이었다. 수십 마리의 떼를 지은 녀석들이 물구나무를 선 채 꼬리로 바닷물을 치며 물장구를 치거나 배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분통이 터진 갑판장이 밀대 대신 작살을 움켜쥐었다.
“써그럴 잡것들. 다 쳐 죽여 버릴까 부다.”
“냅 두게. 어차피 못 잡아.”
“하지만…….”
“쓸데없이 체력 낭비하지 말게. 놈들이 원하는 것도 그런 거야.”
고기가 안 잡혀 열받은 와중에 희롱을 하니 허탈감이 드는 사람들이었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침착하기 사람들을 다독였다.
“그보다 요사이 잡은 고기는 다 버렸나?”
“그나마 이놈 하나 남았습니다만 뭐 팔 수도 없고 그렇죠, 뭐.”
요 며칠 잡은 물고기 중에 그나마 성한 놈은 송곳처럼 긴 뿔을 가진 마일린이 유일했다. 덩치가 5미터가 넘고 유니콘처럼 긴 뿔을 지닌 녀석에게만은 바다의 깡패들도 쉬이 덤벼들 수 없었던 모양. 하지만 온몸에 비늘이 벗겨진 것이 상업성과는 이미 거리가 멀었다.
샤치 떼들의 극성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서너 마리가 나타나 반 토막쯤 입질하고 돌아갔지만,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은 무리가 떼 지어 와서 낚시에 매달린 어획물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요절내 버리는 것이다.
더 얄미운 점은 이들 샤치들은 싱싱하고 좋은 물고기를 잘 구별한다는 점이었다. 고기의 어느 부분이 낚시가 끼었으면 그 부분만을 남기고 지느러미고 뼈다귀고 아주 깨끗이 뜯어 발겼다.
어떨 때는 낚싯줄이 고기의 몸뚱어리를 뚤뚤 감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들 샤치들은 낚싯바늘이 없는 부분만 기가 막히게 찾아내 그 부분만을 발겨 먹었다.
“놈들 눈엔 우리가 호구로 보이는 모양이군.”
“개자식들, 총이라도 있었음 대가리에 바람구멍을 내줬을 텐데.”
화난 선원들이 학깃대를 휘저어도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간의 학습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배를 보아도 아무런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던 것. 그렇게 며칠간 허송세월하고 나니 얼굴에 초조감이 짙어졌다…….
“상황이 좋지 않군요. 이대로는 조업에 영향이…… 아무래도 장소를 바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 조업선들은 어쩌고 있다던가?”
“안 좋죠. 지금 조업 장소를 옮길 생각을 하나 봅니다.”
“벌써? 포기가 빠르군.”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대결 아니겠습니까? 놈들 안방에서 싸우는 셈이니까요.”
원래 돌고래란 것은 수만 년에 걸쳐 물에 적합하게 진화해 온 생물이다. 덕분에 돌고래는 멀리서도 배의 기관음을 훌륭히 들을 수 있고, 작업등 등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감지 능력도 뛰어나다. 더욱이 어린 애 지능 수준으로 영악하기까지 하니 당시의 기술적 한계를 감안하면 놈들을 완전히 따돌리기란 불가능하다고 할까.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여러 어선 간에도 통신을 요구하는 일도 점점 잦아졌다.
“다른 배들은 어떻데?”
통신실에서 나온 오재갑에 강태준이 물었다. 조금 전 매일 세 번 있는 1차 어황 교신을 수신하고 나오는 참이었다.
“대환장 파티네요. 근래 샤치의 공격을 안 받은 배는 스무 척이 고작이랍니다.”
“우리만 당한 게 아닌 모양이군.”
“죽 쒔죠 뭐. 뭐. 잘 잡아 봐야 하루 조업량이 채 2톤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나마 조업이 되는 곳도 며칠만 지나면 샤치가 나타나서 사정없이 훑어가 버리니까요. 일단 놈들이 나타나면 그날 조업은 다 끝난 거죠.”
오재갑은 소금기 때문에 푸석푸석해 보이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강태준은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수신한 어황 속보를 다시 확인했다.
-XX호 작샤치 출현, 정북 05도, 30, 동 56도 15, 침 2백 70도, 동경 56도 5분 침로 2백 80도로 어장 이동 중.
-OO호. 작후 샤치 출현 엘 5 빅, 10, 마 20 약 1톤 수침 28. 침 90 종북 04도 15. 처음부터 샤치 출현. 2차 교신 피해 보고.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