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남태평양, 사모아
“설마, 나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광필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에이 형님 아니죠? 설마 나보고 어장 정상화를 하라고? 형님?”
“야, 미안하다. 남은 인재가 너밖에 없는 걸 어떡하냐. 게다가 너는 애초에 전공 아니야?”
“아니 농담이 심하시네. 설마 저보고 이런 깡촌 내려와서 혼자 뺑이 치라 이 말이요?”
“임마,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하는 거다. 그리고 너만 일할 거는 아니지. 추가 인원은 니 맘대로 뽑아도 된다.”
“아, 안 해. 나 절대로 안 합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일 만하다 뒈질 일 있나? 나 절대 안 해. 안 해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광필이에 강태준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백화점 지배인 직은 딴 놈한테 맡겨야겠구만.”
“엉, 백화점이라니? 건 또 무슨 소리요?”
그 말에 오재갑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게 어쩌다 보니 저희가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무역협회에서 벌과금 충당하려고 매물로 나온 물건인데 저희가 운영을 맡게 되었거든요.”
“백화점이 뉘 집 개 이름인가? 구라 아닙니까?”
“구라는 무슨 이거 봐라.”
강태준이 관재국 발신 스탬프가 찍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서류를 꺼내 확인하자.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란 제목 아래 도장이 꾹 찍혀 있었다.
“아니 여기는 무역협회 건물 아닙니까? 중구 남대문로 쪽에 있는.”
“이번에 벌과금이 왕창 나와서 완전 털렸거든. 마침 대한부동산 주식회사랑 분쟁도 있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국가에 헌납했다는군. 상공부 무역국에서 우리 쪽에 운영을 맡겨 보는 게 어떤가 해서 말이 나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불하받기로 했어.”
“공짜는 아닐 텐데 사정가격이 얼맙니까?”
“5천만 환, 일단은 선금으로 500만 환부터 내고 나머지는 3년 거치 후 7년 원리금 균등 분할 상환 방식으로 분납하기로 했다.”
“그게 뭔 뜻입니까?”
“3년간은 일단 경영정상화를 해야 하니 이자만 내고, 4년 차부터 원금이랑 이자랑 분납하는 방식이지. 년 700만 환씩 상환하면 되지,”
“아니, 10년 지나면 부동산값만 몇 배는 뛸 텐데. 지하와 1∼3층의 매장만 해도 300여 개가 넘을 텐데? 거저 아닌가요?”
“정상화 전까지 2~3년간 수익 내긴 어렵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이지. 뭐, 왔다 갔다 하려면 힘들겠지만…… 그러면 재갑이가 대신 운영하는 걸로.”
“그러면야 저야 감사하죠.”
“에이 스탑! 스탑!”
잽싸게 말을 가로막은 광필이가 손을 비비며 헤헤거렸다.
“형님. 제가 언제 안 한다고 했습니까요?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왔다 갔다 하면 힘들 텐데 굳이 그런 무리 안 해도 된다. 게다가 대한부동산 주식회사 쪽이랑 협의할 부분이 남아서…….”
“에구 형님, 저 일 좋아합니다! 그깟 출장 좀 다니는 거야 사소한 문제죠.”
“뭐, 그렇다면야.”
의욕을 불태우는 광필이의 행동에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희희낙락하는 광필이에도 오재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이거 시위 문제 매듭지으려면 장난 아닐 텐데요. 재무부 관재국에서 무역협회에 일방적으로 백화점 운영권을 넘기는 바람에 대한 대한부동산에서 운영, 관리권을 반환받겠다고 사원들을 동원하여 농성을 계속하는 중인데.”
“뭐 관재국에서 백화점 운영, 관리권은 양도해 주겠다 했으니 알아서 조정하겠지. 그거야 부동산 신탁회사에서 관재국이랑 협의할 사안 아니겠나?”
그 과정에서 다소의 불협화음이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정을 모르는 광필이만 죽어날 테지만 그때는 이미 강태준은 국내에 없을 것이다.
* * *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사모아령,
부우우우웅!!
섬의 동남 쪽에 위치한 파고파고 항. 만입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반 캠프와 스타키스트 두 통조림 공장이 서 있다. 굴뚝에서 증기가 내뿜어지는 공장 옆 부두에는 각양각색의 국적선들이 늘어선 가운데 반 캠프 전용 부두 앞에는 태극기를 휘날리는 한국 어선들이 줄지어 계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국령인 동사모아는 인구가 3만 남짓으로 주도인 투투일라섬을 중심으로 아우누, 타우, 스웨인즈 마누아 등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해역으로 유명하다.
주재원과 어제 입항한 제2 지평호는 제7차 항을 위해 사모아를 떠났다. 20여 척이나 모여들었던 배들이 순서대로 출발하는 동안 한산한 이역의 항구에 출하에 고동 소리가 길게 메아리를 쳤다. 마스트 위에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부는구만.”
“조금 덥군요. 며칠만 지체하지 않았어도 최적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겠나? 녀석이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이렇게 빨리 떠날 이유는 없을 텐데 말이지.”
“죄송합니다.”
반창고를 크게 붙인 김요한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새로 뽑은 2등 항해사인 녀석이 바로 이번 문제의 주범이었다. 홀 서빙을 하는 원주민 처녀를 사이에 두고 일본인 선원 하나와 시비가 붙었다 패싸움까지 번진 것. 싸움은 일방적으로 이겼지만, 시비 중에 병에 머리가 깨진 상대 하나가 12바늘이나 머리를 꿰매면서 출항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이번에야 합의로 끝나서 다행이지만 담부터 조심해. 그렇게 아무나 건들고 돌아다니면 풍기문란죄야 임마.”
“억울합니까. 전 진짜로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요. 서빙 하는 아가씨가 먼저 접근해서 말 한 번 붙여 본 게 다입니다요.”
“임마, 변명은. 그러게 임자 있는 가시나는 왜 건드려?”
“무슨 말씀을. 그거야 상대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던데요. 원래 인생이란 게 즐기면서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머리를 빡빡 민 갑판장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 건달 내연녀 건들다 데여서 배 타 놓고는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저것도 병입니다.”
“에이, 그거 아니라니까요. 그 치사한 자식이 내기에서 딴 돈을 사기라고 하면서 절 파렴치한으로 몰아가지 뭡니까?”
“그럼 뭣 땜시 너 하나 죽이겠다 항구를 뒤져? 누구 말로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더만 깡패 마누라 건들다 걸려서 빤쓰 차림으로 도망쳤다던데?”
“아니, 절 뭘로 알고 그런 말씀을?”
“뭐긴 뭐야, 개양아치 새끼지. 뭐, 암튼 이번 손실액은 니 봉급에서 깐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사랑합니다. 형님!”
“징그럽게, 한 대 맞을텨?”
말은 짓궂었지만, 선원들은 질책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사모아로 출항하는 일본 어선들은 최고 80척. 한국 배가 들어오고부터 알게 모르게 텃세를 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 항해사가 일본인을 상대로 제대로 빅엿을 먹였으니 시원한 감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출항한 제2 지평호는 하루도 쉬지 않고 광활한 남태평양을 달렸다.
조업 간격은 삼 일 주기로. 하루를 조업하면 이틀을 달리고. 이틀을 조업하면 하루를 쉬는 주기.
며칠 동안 고기가 많이 올라온다 싶은 곳은 샅샅이 뒤지면서 어군을 살폈다.
때로는 살찐 암퇘지만 한 크기의 참치가 낚시마다 매달려오기도 했고, 재수가 없는 날은 한 마리도 못 낚을 때도 있을 만큼 실적은 들쭉날쭉했다. 햇살이 갑판 위를 때려, 불판 위의 고기처럼 달아오를 때면 호스에서 뿌린 물로 갑판을 식혔다. 그렇게 약 한 달 후, 제2 지평호는 타히티섬에 기항했다.
실적과 상관없이 쏘다닌 만큼 연료를 소모한 상황이라 보급이 절실했다.
항구에 정박하기 무섭게 자유에 목마른 선원들은 한잔할 겸 밖으로 나간 동안 선장인 강태준은 배를 지켰다. 침실에 엎딘 채 모처럼의 자유시간을 만끽하는 동안 강태준은 약혼자인 설유하와 어머니 등등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하염없이 불타는 적도의 태양을 보면 머리가 띵합니다. 어느 순간 머리가 띵해 오는데 너무 뜨거워서 살갗이 타는지도 모를 정도더군요. 오늘도 뜨거운 햇살을 피하러 야자수 밑으로 오면 코코넛 열매에 얼음을 담근 음료를 팔더이다. 코코넛을 우유에 탄 음료인데 한 잔에 40센트나 합디다…….
얼음 몇 잔을 탄 것으로는 말도 안 되는 횡포지만 그게 얼마나 먹고 싶은지. 그 분유처럼 달달한 냄새를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근데 한 잔을 사 마셨는데 걸레 빤 맛이 나지 뭐요. 상한 게 아니냐 물었더니 원래 그런 맛이라는데 참. 아마 그런 음료는 평생 먹어 보지 못했을 겁니다.
강태준은 현지에서 구매한 사진 엽서에 담담히 일상을 눌러 적었다. 어언 못 본 지 벌써 10개월이 넘어가니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고심하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편지에는 정성이 묻었다.
편지를 다 쓰고 난 강태준이 선물로 보낼 소포를 들고나오자 갑판장인 박상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에휴, 참 누가 보면 결혼한 줄 알겠소. 그렇게 지극 정성인 경우도 없을 거요. 형님.”
“꼬박꼬박 보고서는 써 줘야지. 골인 전에 골키퍼가 골 못 넣는 게 아니지 않나.”
그 말에 김요한이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약혼녀가 보통이 아니신가 봅니다. 누군지 궁금한데요?”
“보통 사람이 아니긴 하지. 무려 판사님이시라네.”
오재갑의 말에 김요한이 깜짝 놀란 듯 들고 있던 호스를 떨어뜨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믄. 무려 서울지법 판사님이라고.”
“허이구야. 마누라 되실 분이 판사님이라니. 오금이 저려서 살겠습니까?”
“남자는 돈 잘 벌고 밤일 잘하면 완빵이지. 판사라고 뭐가 두려워. 침대 위에서 콱 쥑여 뿌면 끝인겨.”
선미 갑판원인 김호남이 자신 있게 중얼거렸다. 애만 7명을 내리 낳은 김호남은 금실 좋은 부부로 유명한 인사다. 머리를 빡빡 깎아서일까. 이마가 빛나 보이는 갑판장이 주낙을 만지며 대꾸했다.
“시답지 않은 소리 말고, 토끼처럼 애만 순풍순풍 싸재끼는 게 다행인가.”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거, 보고 싶구먼 임자.”
“에라이. 난 집 들어가는 게 무섭다 무서워.”
“뭐가 문제요 형님은?”
“이노무 마누라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주식에 투자한다지 뭔가. 야금야금 버는 거 같긴 한데 재산 다 털어먹을지. 몰라 불안하이.”
“주식이요?”
“그래. 작년 말에 한전 주식 배당했을 때 주식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나. 친하게 지내는 뚜쟁이 하나가 그때 재미를 봤는지 충동질한 모양이더라고.”
“얼마나 재미를 봤는데 그러오?”
“시가로 공모를 해서 샀는데 투자액의 10배 이상씩 급등했다는군. 덕분에 1환이었던 거래소 주가는 무려 37환으로 껑충 뛰었다는 거야.”
“대단하구마. 수익률이. 그래서 뭘 산다는 건데?”
“이번에는 대증주에 관심을 두던데 난 잘 모르겠다만. 액면가 50전짜리를 한 주당 14환 50전으로 발행한다는데 말이야. 너무 비싸지 않나.”
“어후, 주당 가격이 그리 높아? 엄청 비싸구먼.”
선원들이 관심을 보이자 옆에 있던 김요한도 끼어들었다.
“그래도 한 방에 10배면 해 볼 만한 투자 아니오? 내도 하고 싶구먼.”
“뭐, 생각해 보니 그렇네. 정부도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하는데 이참에 편승해서 나쁠 거 없지.”
“남의 돈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말게. 사람은 불안해서 미치겠구먼.”
“그거야 뭐 벌 때 버는 게 좋지 않겠수까? 우들이 배 타는 이유가 뭐요. 다 돈 때문이 아닌가?”
헷또인 최영호의 말에 모두 고개를 공감했다. 원양어선에서의 조업은 첫 투승을 시작한 이후엔 철야를 가리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매일 투승 4시간 양승 14시간씩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살인적인 작업량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