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징발 보상
마치 아량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에 기가 막힌 이억수가 격하게 항의했다.
“아니 이보시오. 10만 환도 아니고, 10억 환이라니. 이 돈이 뉘 집 똥개 이름도 아니고. 이건 말도 안 되는 금액 아닌가?”
“그걸 왜 나한테 따지고 그러나? 적당히 좀 해 먹지 그랬소. 애초에 세금을 똑바로 냈다면 애초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아니 이런 거액을 어찌 구하라는 말이요?”
“한 번에 내기 어려우면 분납해서 내면 되지. 내달까지 기한이 나올 테니, 일단 10프로만 현찰로 납부하도록. 대신 남은 벌과금에 대해서는 연 11퍼센트씩 이자가 붙는 것은 잊지 마시고…….”
“내달까지 1억 환이라니.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소이까?”
“그건 내 알 바 아니죠. 집을 팔든 몸을 팔든 어떻게든 해야지. 오늘 집안 사정을 보니 충분히 그럴 재력은 있어 뵈는데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당장 끌고 가지 않은 것만 해도 편의를 봐준 걸로 아십쇼. 이곳 전체가 빨간딱지로 가득해지는 꼴을 변하게 될 테니까. 아, 여기 이건 오늘 공무집행에 수고한 직원 출장비로 쓰겠수다.”
금두꺼비를 태연하게 품 안에 집어넣은 채인철이 사라지자 요원들이 물건을 실어 날랐다. 뒷골을 잡은 이억수가 부르르 떨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중정에서는 마치 보란 듯이 연일 부정 축재자의 집 안에서 나온 물건이라며 귀금속과 각종 사치품들을 산처럼 전시해 놓았다. 당연히 그걸 본 언론에서는 옳다구나 하면서 떡밥을 물었다.
[세금 낼 돈 없다더니, ……양주, 금궤, 골동품 줄줄이.]
[고액 체납자 꼼짝 마. 1억 환대 통장압류만 1,599건]
“허허. 임자도 경성일보 기사 보았나. 기업가 놈들이 똥줄이 아주 타나 보이.”
호의 일색인 언론에 은근히 들뜬 박정명. 덩달아 높아지는 지지율에 함박웃음을 짓는 그였지만 정호근의 표정은 심각했다.
“각하, 재계 분위기가 영 좋지 않습니다. 다들 처벌이 과하다는 의견이 많습니까?”
“여론? 무슨 여론 말인가 대중이 이렇게 호응해 주고 있는데.”
“각하. 백악관에서 이번 일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를 해하는 행위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경고하더군요. 경제인에 대한 과한 처벌은 기업들의 의욕 감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요.”
“임자는 걱정이 너무 많군. 코쟁이 놈들이야, 애초에 말만 번지르르한 자들이 아닌가. 애초에 자국의 국익과 부합될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을 놈들이야. 게다가 그딴 걸로 사업 못 할 요량이면 아주 접으면 그만 아닌가?”
“각하 무슨 황망한 말씀을.”
“사업가 입장에서는 이윤 획득이 최우선 명제일 텐데 돈 못 벌면 당장 그만둬야지.”
그러자 눈치를 보던 남형욱 역시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각하. 하지만 정권 초기부터 굳이 재계와 대놓고 척질 거야 없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자발적인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투자? 말 잘했네. 지금까지 국내의 경제인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나. 사라 호사건 때도 보지 않았나. 나라가 망하건 말건 돈놀이에만 혈안이 된 놈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어. 어찌 저런 승냥이 같은 자들을 믿고 자립 경제를 이룩할 수 있겠나?”
“…….”
소위 재벌이라는 기업들의 실태를 확인한 박정명의 목소리는 어딘지 격양되어 있었다. 수사가 진척될수록 부패의 범위나 규모 면에서 얼마나 국가가 썩어 있는지 알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정 축재 통고액을 줄이기 위해 조사단과 결탁해 통고액을 조작하기까지 하려다 역으로 조사단 전원이 구속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편의를 봐주려 해도 원 적당해야지. 지들끼리 아웅다웅하느라 경제인 자율로 투자업종 하나 조정하지 못하는 자들을 믿고 산업발전을 논할 수야 없지 않은가. 폐품은 고쳐 써도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닐세.”
“그렇다면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안이라…… 내 전략은 단순하네.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쓰자면 더 능력 있는 자에 맡겨야지. 내 예전에 군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관 때문에 강제로 강론에 참가하게 된 적이 있었다네.”
“그때 인상 깊게 들었던 구절이 있지.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걸로 장사해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녀석도 그 배를 남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을 파서 돈을 감춰 뒀다는 거야. 주인이 돌아와서는 남은 둘은 칭찬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줬다는 말일세.”
“달란트의 비유 말이군요. 각하께서 카톨릭 교리에도 해박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하. 내가 종교에 딱히 해박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나름 시사성이 있는 것 같아 말이야. 우리나라도 특혜 없이 자생적으로 성장한 기업가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사람은 드물지 않겠습니까. 한국에서 행세께나 하는 기업가치고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뭐 예외적인 인물이 몇몇은 있겠지만요.”
“그러면 뭐 강제로라도 물갈이를 하는 수밖에.”
재계를 비롯한 각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박정명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참에 아주 부패한 사업가들의 기를 꺾어 놓을 참. 덕분에 세무 조사에 걸린 사업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장석운 정부 때처럼 규제가 있을 것을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군사정부 쪽에서 강행 돌파를 선택하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국민의 지지가 높아지자 군부 정권에서는 귀속 재산 처리법 제 19조 3항을 준용하면서 압박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해당 조문은 매수대금 납부 기간 중 일반물가의 변동이 현저하다면 이후의 납부 금액을 유동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규정이었는데 이를 악용해서 세금 납부를 기피한 기업들이 상당했던 것이다.
매년 30프로가 넘는 살인적인 물가상승 덕분에 늦게 내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
하지만 박정명은 귀속재산의 현물 가치를 재평가하고, 200% 이상 증액시킴으로서 꼼수를 원천 봉쇄했다. 그렇게 정부가 한창 경제사범 때리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검찰에 계류 중이었던 김광필의 사건 역시 흐지부지되면서 전면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사건이 물밀듯이 몰려드는 마당에 이런 사소한 일에 더는 인력을 배치할 수 없는 이유였달까. 광필이가 서울 동부지검에서 나오는 그 날, 수사관 몇몇이 살갑게 인사를 올렸다.
“형님. 찬찬히 살펴가십쇼. 건강 조심하시고요.”
“오냐, 나중에 혹시 법원 짤려서 갈 곳 없으면 우리 쪽으로 와. 내가 한자리 마련해 줄 테니.”
“오, 진짜죠? 그 말 잊지 않깁니다.”
어느새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수사관과 인사를 나눈 광필이가 힘차게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쨍쨍한 것이 벌써 완연한 초여름. 강태준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광필이가 손을 들었다.
“여, 형님 벌써 오셨습니까?”
“욕봤다. 그간 고생 많았어.”
“고생이랄 것도 없었슴다. 걍 푹 쉬다 나왔죠.”
“그래도 구치소에 수용되었는데 편했을 리가 없지. 몸은 좀 괜찮으냐?”
“에이, 가혹 행위는 없었습니다. 신명부 그놈이 좀 눈치가 빠르더군요. 이억수가 나가리되었다고 하니 바로 태도가 바뀌더군요.”
“하하. 그래?”
오재갑 역시 안도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사건 담당 검사가 눈치가 빨라서 다행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형님.”
“그런가? 내가 딴 건 몰라도. 운빨은 있나 보이. 전쟁 총알도 막 피해 가는 사나이 아닌가. 하하.”
“허풍하고는. 오라버니 흰소리 말고, 이거나 한입 묵어 보세요.”
함께 온 점례가 희고 부드러운 두부를 불쑥 내밀었다. 쪄 낸 지 얼마 되었는지 먹음직스럽게 생긴 두부에선 더욱 김을 모락모락 뿜고 있었다. 뜨끈한 두부가 꽤 먹음직스러운 느낌이었지만 광필이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아니. 누가 보면 내가 죄라도 진 줄 알겠네. 저리 치워.”
“누가 죄졌다고 했나? 액땜하자는 거지요.”
“됐다. 내 콩이면 신물이 나서 두부김치도 안 먹는 거 몰라? 군대 있을 때 콩비지, 콩밥, 콩국, 콩만 3년 내내 먹었다고. 뭔 콩에 웬수 진 것도 아니고.”
“그, 그래요?”
질색하는 광필이에 실망하는 점례. 강태준이 에둘러 권했다.
“임마, 그래도 좀 먹어 봐라. 너 준다고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쑨 건데, 사람 만든 성의 정돈 생각해야지.”
“정말로 니가 직접 쒔다고?”
“됐어요. 싫다는데 강요할 수야 없지요.”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서운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비난의 눈초리에 압박감을 견디다 못한 광필이가 마지못해 두부를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먹으면 될 거 아냐?”
“자, 아~!”
차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억지로 삼킨 그였지만 잠시 후, 은근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생각보다 맛있는데?”
“생각보다가 아니라 원래 맛있는 거거든요?”
“오 그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군.”
“뭐라고요! 그럼 내놔요. 당장.”
“야, 치사하게 줬던 거 뺏는 게 어딨냐?”
놀리듯이 우걱우걱 남은 두부를 털어 넣는 광필이. 너털웃음을 지은 강태준이 재촉하듯 채근했다.
“어서 빨리 배나 채우라고. 빨리 갈 데가 있으니까.”
“아니 방금 풀려난 사람한테 어딜 또 가자는 겁니까?”
“그건 도착하고 말해 줄게. 잠자코 따라와라.”
“에이, 이럴 거 같으면 그냥 구치소나 며칠 더 있을 걸 그랬네.”
광필이는 계속 궁시렁대면서도 잠자코 차 안에 올라탔다. 고개로 이어지는 길을 넘어 차량은 계속 달렸다. 밖을 보다 지친 광필이가 슬그머니 조는 사이 저 멀리 언덕과 모래 해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시림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진입하자 이정표 끝으로 익숙한 등대가 모습을 보였다.
“임마야 다 왔다. 일어나.”
“아이구야. 여이가 어딘교?”
눈을 비빈 광필이가 밖을 보니 일행들은 이미 차 밖에 나와 있었다. 오래된 포대 진지와 격납고 등이 남아 있었고. 옆에 오토바이를 개량한 차량이 있다. 활처럼 휜 모습의 땅 위로 섬 몇 개. 거북이 모양의 섬이 다른 섬을 향해 기어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절벽 위의 기암괴석과 녹색이 어우러져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전경 좋네. 뭔가 익숙한 지형이구먼요. 뭐지, 예전에 와 봤던 곳인데…….”
강태준이 손으로 멀리 오른쪽 지평선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여기 거제야. 저쪽이 우리 집이 운영하던 멸치 어장이 있던 곳이지.”
“예? 그럼 설마?”
“징발 보상 나온다는구나, 이 일대 땅 돌려받는단다. 전부.”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미리 이야기해 주지. 왜 빨리 이야기 안 해 줬소?”
깜짝 놀란 복만이가 되묻자, 뒤에서 팔짱을 낀 설유하가 웃으며 말했다.
“결정된 건 최근이거든요. 정부 쪽에서 보상 일정 확정되었어요. 뭐 이렇게 보상이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혁명 공약 인쇄 건이 참작된 것 같아요. 이참에 포로 수용소 쪽도 철거하기로 했으니 마침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죠.”
“암튼 형님 축하합니다. 이제 날개 다셨군.”
그러나 강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축하는 아직 일러 한 번에 다 돌려받는 건 아니거든. 점유권 문제도 남아 있고. 어구랑 사람도 구해야 하고. 어장 인계받고 정상화하려면 최소 1년은 넘게 걸리겠지. 그사이에 원양어선도 타야 되고, 그리고 재갑이는…….”
“저도 본사 일로 바빠서요.”
“안 선생이랑 기철이야 제품 개발로 바쁘지. 그래서 말인데…… 누군가 수고를 해 줘야 할 거 같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예감에 광필이가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의 눈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