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19화 (119/361)

119화 각자의 셈법

“이건 대체?”

“이번 일에 대한 수고비입니다. 방 과장을 제외한 야간조는 일단 고향으로 내려가던지. 각자 안 보이는데 숨어 지내십시오. 며칠 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피해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간 귀를 열어 두시고요.”

열외로 빠진 방 과장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럼, 저는요?”

“방 과장은 그냥 평소처럼 근무하시면 됩니다. 이 시점에서 개점 휴업을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테니 누군가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세요. 방 과장은 오늘 새벽에 여기 없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면, 사장님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여 일이 잘못되면…….”

“제 걱정일랑 마십시오. 저는 부산 쪽에 내려가 있을 겁니다. 잠시 며칠만 자중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어차피 강태준의 말을 따르는 것 외엔 다른 방도도 없다. 강태준은 곧바로 부산으로 향했다. 쿠데타를 일으키긴 했어도 거사는 아직 미완성이었던 만큼 복만이도 내심 쫄리는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형님, 근데 정말로 만약에 말입니다. 이거 실패하면 우리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미 일본 가는 배편을 마련해 뒀으니 걱정 마라. 마침 제2 지평호 개조가 대략 끝나기 직전이니 따로 둘러댈 말도 있지 않나. 내가 선장을 맡기로 했으니 확인차 출국한다고 하면 이상할 것 없어.”

일이 잘못되면 적당히 무연고자 명의로 세탁해 새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은가.

달러화로 현금을 마련해 두었으니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최악의 경우 남태평양 사모아 쪽 부근에서 잠적해 버리면 될 터, 강태준으로서는 경우의 수에 대한 판단이 끝났다.

그사이 남산의 방송국을 점령한 박정명은 쿠데타군은 남산의 중앙방송국을 포위하고 스튜디오로 진격했다. 당직 근무로 잠에 혼미한 박세정 아나운서에게 총구를 겨누고 혁명 공약 보도를 강요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여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국가를 구하기 위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군사혁명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혼란을 수습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국으로 전파가 송신되자, 혁명 공약이 뿌려졌다.

“호외요!! 호외!!”

“이게 무슨 소리야? 혁명이라니?”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사태를 관망하던 미군은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았다. 주한 미합중국 대리 대사인 마셜 그린(Marshal Green)은 미 8군사령관 맥그루더와 함께 경무대를 급히 찾았다. 윤 대통령과 면담을 요청한 그린은 즉각 미군 개입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자 윤병선의 이마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고얀 사람. 총리가 정부와 국민을 버리고 달아나다니. 내가 아무리 실권 없는 대통령이라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각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진압 명령을 내려 달라 이거요?”

“총리께서 행방불명이시니 결정권은 각하께 있습니다…….”

“쿠데타에 얼마가 가담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지금 내전을 추인하라는 말이요.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소.”

“상황이 유동적이고 아직 진압의 기회가 있습니다. 야전군 일부 병력과 미군 1개 기갑대대를 동원하면 쿠데타군을 진압하는데 충분합니다. 지금 당장 명만 내려 주시면…….”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하오.”

당연히 진압을 승낙할 줄 알았던 대통령이 강짜를 부리자 그린은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 각하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시고 하는 말씀입니까?”

“지금 전방군을 빼내 내전을 벌이면 북괴가 침공해 올 우려가 있소.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마당에 아군끼리 싸워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소.”

“아니 나라가 뒤집힐 판국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뭐가 더 중요한지 감이 안 오십니까?”

해괴한 논리에 어이가 없어진 맥그루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린 대사가 재차 대통령을 설득했다.

“각하, 쿠데타군 숫자는 추정상 고작해야 3,600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서울만 봉쇄하고 수뇌부를 고사시킨다면 저희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 될 소리요.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이라도 벌이라는 말입니까?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볼 수 없소.”

전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윤병선은 군을 움직이는 것에 극한 혐오감을 보였다. 그린과 맥그루더는 계속 군사 행동 추인을 촉구했으나, 꽉 막힌 윤병선이 계속 고집을 부렸다. 당최 상대가 말을 들어 먹지 않자 흥분한 그린 대사 대리가 윤병선을 힐난했다.

“아니,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쿠데타를 방기하겠다니 그 무슨, 국헌문란을 방지해야 할 반역도당을 방치하는 것은 의무 위반입니다!”

“대사 그건 잘못된 말씀이요. 내가 생각하는 애국이란 동족 간 유혈사태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요.”

“지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씀이십니까? 사태를 냉정히 보십시오. 각하 더 늦어지면 기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운명이겠지. 어찌 되었든 외세의 개입을 추인할 수는 없소.”

그린과 맥그루더는 장장 3시간여 간 병력 동원을 허가해 주기를 간청했으나 윤병선은 끝내 추인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설득을 포기한 맥그루더는 허탈감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군. 자기가 어떤 위치에 처했는지 모르는 건가. 이건 군부 정권을 추인해 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나?”

“정황상 이미 반군에 회유당했을지도 모르지요. 유병락과 5·16 몇 달 전에 쿠데타 계획을 윤병선에게 제보했다는군요. 대통령직을 보장해 줄 테니 거사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면 윤병선으로서는 나쁜 딜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기회주의자들 같으니. 그거야말로 철없는 기대가 아닌가. 정권을 잡은 인간이 순순히 룰을 따를 거라 생각하다니. 다음 순서는 자기라는 걸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그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 오히려 개입을 요구해도 시원찮을 판에 아군이 태클이라니. 답답해진 맥그루더가 되물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야 없지 않소? 펜타곤에서는 뭐라 합니까?”

“Wait and See, 잠자코 기다리라는군요. 아무래도 피그스만 사태로 인해 입지가 좁아지는 바람에 추가 개입을 적극 자제하는 것 같습니다.”

“허어, 이런 비상 시국에 장 총리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피그스만 사태는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미국이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지원해 쿠바 남부를 공격하다 실패한 사건이다. 게릴라전과 항공 지원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나름 야심 찬 계획이었다.

아이젠하워에 비해 애송이 같다는 평가를 지우고 싶었던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쿠바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CIA의 호언장담만 믿고 계획을 승인했지만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 결과 미국의 첩보 공작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를 갱신하면서 케네디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권에 위협을 느낀 쿠바가 소련에 SOS를 치면서 냉전이 격화되었고, 정권 초기 좁아진 케네디로서는 처신에 신중할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섣부르게 개입하다간 내정간섭을 넘어 문제를 키울 수 있었던 만큼 미 정부는 일단 관망을 택했고, 맥그루더로서는 판을 빤히 보고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정부군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17일 밤 9시, 모든 진압 준비를 마쳤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아무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던 것. 1군 사령관인 이한송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째서 진압 명령이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 비상 시국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고 기다려 봄세. 곧 명이 내려오지 않겠나.”

“무슨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반역 도당이 수도를 벌써 점거했습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무슨!”

때마침 윤병선 대통령의 비서관으로부터 서찰이 도달했다. 군 사령부 및 각 군단 사령부에 보낸 문건이었다. 명령을 기다렸던 이한송의 손이 빨라졌다.

허나 잠시 후, 내용물을 확인한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편지를 떨구었다.

“상부에서 뭐랍니까?”

“아군끼리 서로 충돌하지 말라는군. 사태를 관망하라고 말이야.”

“예?”

총리가 부재한 상황에 군 통수권자가 움직이지 않으니 더는 할 도리가 없었다. 장기영이 체포되었고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튿날, 오전 박정명 소장이 경무대를 찾자, 윤병선 대통령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결국, 올 것이 왔구먼.”

“각하! 제가 박정명입니다. 근심 끼쳐 죄송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 충정에서 목숨 건 혁명을 감행했습니다.”

“애국이라 내가 생각하는 애국은 절대로 동족 간에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거요.”

“오늘 전국적으로 선포된 계엄령을 추인해 주십시오.”

“추인할 수 없소.”

“그렇다면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정오근 중령!”

“예!”

“각하를 정중히 모시게.”

쿠데타에 군과 정권의 희비가 엇갈리면서 정권의 요직에 위치한 관료들 또한 전격 체포되었다. 국방부 장관인 현석준을 비롯 각 부서의 장,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결말을 맞았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오늘부터 일체의 장석운 정권을 인수한다. 오는 5월 22일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영도 아래 포고 제6호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 활동이 완전히 금지할 예정이며…….

군사혁명위원회란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박정명은 장신영을 의장직으로 세우고 자기가 부의장직에 앉았다. 당연하겠지만 장신영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바지사장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할 얼굴마담 역할이었다.

박정명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밤새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했던 장석운 총리는 언론의 입을 빌려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쿠데타 직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복만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형님, 총리가 하야한답니다. 아무래도 대세가 굳어진 듯싶습니다.”

“벌써 그 이야기가 나왔나?”

“네. 확실합니다. 아무래도 잡은 줄이 썩은 줄은 아니었나 봅니다.”

쿠데타의 성공 소식을 들은 백경출판 직원들 역시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재갑 역시 기꺼운 기색이었다.

“예상이 얼추 들어맞아서 다행입니다. 형님.”

“이제 어디 도망 안 가도 되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헌데 이런 어설픈 계획이 성공하다니. 정말 세상일에 운이란 게 있나 봅니다.”

“원래 운칠기삼 아니겠는가. 인생이란 게 그런 법이지.”

쿠데타가 성공한 건 박정명이 특별히 주도면밀했거나 국민의 지지가 확고해서 와는 거리가 멀었다.

CIA 쪽에서든 미 8군 쪽, 한국군 정보부 쪽에서도 박정명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총리가 모처에서 주기도문만 외우고 있지 않았어도. 아니면 군 지휘관 중 하나가 단호하게 대처만 취했다 해도 모의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정권의 무능과 안이함이 화를 부른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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