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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18화 (118/361)

118화 어부지리

하지만 이제 아쉬운 것은 이쪽. 이억기가 비굴할 정도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다음부터는 저희도 주의하겠습니다. 그래도 오늘만 편의를 봐주시면…….”

“이보시오, 이 상무, 우리만 전기 안 쓴다고 그게 될 일인가, 우리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 태일, 딴 데서도 돌리고 있지. 청계나 다른 출판사에서 동의하면 우리도 자발적으로 내리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그럼. 장담하지. 언제 약속 안 지킨 거 봤나? 대신 그렇게 되면 자네도 약속 지켜.”

“물론입니다. 그거”

이억기가 곧장 옆 인쇄소로 향하자 편집국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뜻대로 해 주실 겁니까? 그러면 저희 물량 못 맞춥니다.”

“응? 언제, 내가 해 준다고 했나?”

“하지만 동의받으면 풀로드에서 낮춰 준다고.”

“그건 대충 둘러댄 거고 누가 저놈 말을 듣겠어? 퍽이나. 쌍욕 먹고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 아니겠나.”

“그럼.”

“이억수 그 자식 한번 X돼 보라지. 야 재수 없으니, 소금 뿌리고 문 잠가라.”

과연 강호 인쇄소 사장이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이억수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광분한 사장이 부지깽이를 들고 일갈했다.

“야 쌍노무새끼야. 2배라니 누구 코에 붙이라고. 장사 말아먹을 일 있어?”

“사장님. 그게 아니라…….”

“시방 니 한번 죽어 볼텨? 얼른 꺼져 이 새끼야!”

본전도 못 찾고 바로 쫓겨난 이억기. 다른 출판사들의 반응 역시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네만 그건 못 하겠는데. 비즈니스는 시간 엄수가 생명이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나도 이번엔 양보 못 하겠네.”

“퍽이나. 이억수 그 인간이 언제 약속 지킨 적 있나. X 까라고 해! ”

말을 붙이기도 전에 육두문자를 내뱉는 업주부터, 더 말도 붙이지 못한 채 쫓겨나길 수차례. 다른 업체들도 순순히 동조하는 회사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간 갑질로 일관했던 행동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

그렇게 되니 애가 타는 것은 발해출판. 오매불망 답을 기다리던 이억수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왜 아직도 전력 사정이 회복 안 되는 거야?”

“그게, 귓등으로도 안 듣습니다. 아무래도 설득이 안 되는 모양인데요.”

“아니 돈을 더 준대도 싫다니. 이유가 뭔데?”

“그게 신규 계약 독점 조건이 걸려 있다고 안된다는데요. 거기에 위약금을 대신 내줄 게 아니면 꺼지라고.”

“야, 이 멍청한 자식이 그래서 그냥 왔어? 어떻게든 일단 내준다고 했어야지!”

“그…… 그게 바로 계약서를 쓰라고 들이밀어서.”

말다툼이 길어지자, 옆에 있던 차지만이 크게 흥분해서 침을 튀겼다.

“이런 씨부랄, 지금 장난하나? 그래서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저, 조금만 설득할 시간을 주시면.”

“쌍, 지금 장난해? 쌍 대가리에 총을 한 방씩 쏴 버릴까 부다!”

“대, 대위님!”

길길이 날뛰는 차지만을 진정시킨 것은 김필중이었다.

“참게! 지금 호들갑을 떨어서 좋을 것 없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안 돼.”

“아니 형님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그 말에 김필중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사장, 어째 방법이 없겠나? 자네만 믿었는데 이러면 정말 곤란하지.”

살기를 띤 눈빛을 보니 단순히 말로만 지껄이는 게 아니다. 눈깔을 희번덕거리는 차지만이 권총을 만지작대자 이억수의 등으로 땀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거 더 자극하면 죽을지도 몰라!’

꿀꺽 침을 삼킨 이억수가 박 기사를 돌아보며 일갈했다.

“에이 썅, 그럼 일단 우리도 출력 올려!”

“예? 그건 곤란한데요. 잘못하면 과전류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휴즈 대신에 구리선으로 연결해 놓으면 되지 않나. 어떻게든 풀로 가동해 봐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하지만 사장님. 그럼 사고가 날 위험이.”

“야, 시팔,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때야. 까라면 까!”

박 기사로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지만 결국은 고용인인 만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속도가 올라가자 소음은 더 커졌다.

덜커덕 소리를 내던 기계가 요란한 굉음을 내더니 불안한 듯 흔들렸다. 잠시 후, 하강하던 전력이 정상을 찾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들. 치킨게임이 계속되자, 다른 쪽에 기계를 돌리던 업체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로드 속도를 내린 것이다.

덜컥거리는 기계에서 종이가 빠른 속도로 찍혀져 나오자 박 기사가 되려 얼떨떨해했다.

“됩, 됩니다요.”

“그래 하면 되잖아. 겁보 새끼들이 감히 하하! 역시 된다니까.”

초긴장 상태였던 이억수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으쓱했다.

그러나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도 잠시.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전깃불이 깜박깜박하는 사이, 어디선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것.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박 기사가 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사장님,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데요.”

“뭐, 뭐라고? 어서 기계부터 멈춰!”

“어어어! 이거 잘못하면 불나겠습니다! 스톱, 올 스톱!”

안색이 창백해진 박 기사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직원들이 순간 분주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할 만치 철컥대던 기계가 아픈 사람처럼 덜덜 떨더니 갑자기 꽝하고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며 전원이 꺼졌다.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인 공장 안. 순간 화르륵 소리와 함께 불길이 일었다.

“시펄, 젠장!! 불이야!!”

“야, 불났다, 빨랑 물 가져와 물!”

폭발에 놀란 직원들이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인쇄 기계가 풀로드를 운전모드로 변형하자 과전류가 발생했고, 외부 주상 변압기와 판넬이 과열되어 타 버린 것이었다.

억지로 전기를 끌어오려다 오히려 변을 당한 셈.

매캐한 냄새와 함께 완전히 타 버린 회로, 이억수는 망연자실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인쇄용 판넬이 타 버린 거 같습니다. 순간 정전과 함께 순간 과전류가 발생해서 주요 차단기가 전부 트립되었습니다.”

렌턴으로 기계를 들여다본 박 기사의 말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이억수가 다급히 물었다.

“그러면 인쇄는? 복구하는 데 얼마나 걸려?”

“당장 재가동은 불가능합니다. 수리에만 최소한 몇 시간은 필요합니다. 지금은 예비용 운전 판넬이 없어서.”

“임마. 당장 복구해 당장!”

“회로기판이 녹아서 운전할 수 없습니다, 주변 지역도 모두 정전된 것 같습니다.”

확인 사살에 가까운 대답에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차지만이 철컥 권총을 이억수의 머리에 들이밀었다.

“시팔. 야 개소리 말고! 이 새끼들이, 그래서 복구가 가능하다는 거야 뭐야.”

“오, 오전까지 시간을 좀 더 주시면…….”

“지금 장난해! 임마, 이건 목숨이 걸린 일이야. 복구해 당장!”

진짜 총을 본 사람들의 표정은 벌써부터 하얗게 변했다.

흥분한 차지만의 행동에 경직된 듯 사시나무처럼 떠는 이억수였다.

오줌을 지린 듯 바지가 축축해진 이억수.

가만히 보고 있던 김필중이 천천히 총구를 손으로 잡고 타일렀다.

“차 대위, 진정해. 지금 닦달해 봐야 소용없지 않나.”

“여기서부터 차질이 발생하면 어떡합니까, 혁명이 코앞인데 지금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서 해결책이 있나?”

“그건…….”

“일단 대안을 찾아야지. 박 기사, 지금 주변에 인쇄 가능한 인쇄소가 어디 있지?

“주변이 모두 정전된 상태라, 저쪽도 타격을 받았을 테니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저희만큼 설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아 시간 내에 물량을 소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말에 김필중이 질끈 눈을 감았다. 예편으로 직접 쿠데타에 참가할 수 없게 된 그로서는 지금 이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다. 만약 이번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입지는 물론이거니와 일의 승패조차 장담할 수 없다. 머리를 굴리던 그에게 홀연 얼마 전 강태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 이게 운명이란 건가. 사람이 죽으리란 법은 없군.’

생기가 돌아온 김필중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 말했다.

“그럼 퇴계로로 가지. 차 대위 한시가 급해.”

“퇴계로요? 거기는 대체 왜.”

“거기 대체재가 있다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워야 하지 않나?”

* * *

아침 새벽이 밝아 올 무렵 퇴계로의 백경출판 앞.

헤드라이트를 튼 트럭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렬로 선 채 부지런히 한가득 종이 박스를 옮기는 직원들.

갓 인쇄한 묶음을 마저 옮기고 난 강태준이 땀을 훔쳤다.

“끙차, 이게 마지막입니다. 총 34만 장이네요. 너무 적지 않은가 모르겠군요.”

“정말 수고했네, 강 사장. 자네가 없었으면 어떡할지 아찔하군. 이 공은 내 잊지 않겠네.”

악수를 청하는 김필중은 몹시도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뭘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다만 너무 빨리 인쇄하느라 좀 흐릿하게 나온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검수를 제대로 못 한 점이 걸리네요.”

“이 정도면 충분해. 자네한테 빚을 졌군.”

“무슨 말씀을…….”

“아니야. 혹 일이 잘못될 경우 내가 권총으로 협박해서 강제로 일을 시켰다 진술하시게.”

김필중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그 역시 얼결에 일을 벌이긴 했지만, 아직 쿠데타가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강태준이 염려 말라는 듯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그러잖아도 오늘로 부산에 내려갈 예정이었습니다.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며칠은 죽어 지낼 참입니다.”

“그래. 일이 정리되면 곧 연락하지. 난 이제 가 보겠네. 어서 가서 소장님을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

“살펴 가십쇼.”

차지만이 슬쩍 모자를 벗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김필중과 안부의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차를 타고 나섰다.

한바탕 전투와도 같던 인쇄가 끝나고 나자 멍하니 지프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직원들.

우두커니 선 채 그 모습을 주시하던 복만이가 멍청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진짜 쿠데타가 벌어지다니, 정말 형님 말씀대로 돼 버렸네요. 세상이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떻게 되긴. 평소처럼 살면 되지.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사는 거야.”

“아니, 뭘 그렇게 무책임합니까?”

“무책임하긴 남 인생 걱정해 줄 여유 없다. 게다가 아직 안 끝났어들. 인쇄 원판이랑 남은 자료는 전부 소각한다. 서둘러!”

강태준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세상일이란 게 당최 모르는 것 아닌가.

혹시 일이 잘못되면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증거를 삭제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증거 인멸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은 물량은 김필중이 탈탈 죄다 실어 간 터라 딱히 정리할 물건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드럼통 안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기 무섭게 분쇄된 종이들이 빠르게 타올랐다.

화염에 감싸인 종이가 타탁타탁 소리를 내며 사그라드는 모습에 목장갑을 낀 손을 터는 강태준. 그걸 보던 방국진이 뒤늦게 보고를 올렸다.

“전부 다 정리되었습니다.”

“확실하나?”

“잘못 인쇄된 이면지와 추가 자료는 전량 소각하고, 인쇄용 도료도 모두 폐기했습니다. 이면지도 마찬가지고요. 누가 들어와도 증거 찾기 어려울 겁니다.”

방국진의 말에 한결 가벼워진 강태준이 공을 치하했다.

“거,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민감한 일인데 순순히 잘 따라와 주셔서 고맙군요.”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하긴 했습니다만,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남은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강태준이 손짓하자 오재갑이 묵직한 돈 봉투를 가져와 하나씩 분배했다. 봉투에 든 액수를 확인한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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