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정전 유도
둘둘 만 보고서를 내민 춘삼이에 강태준이 물었다.
“내용물은 뭔지 확인했어?”
“예 말씀대로 창고에 8절지를 박스째로 들여놨더군요. 나머지 수량도 여기 다 적어 놨습니다.”
“발해출판 쪽과 평판은 어때? 주변 사장들이랑 관계는?”
“말도 마십쇼. 개새끼라 욕만 안 했을 뿐이지 엄청 험악합니다. 야간작업 시간도 조율 없이 지 꼴리는 대로 돌린다고 악명이 자자하더군요. 덤핑 쳐서 물량 빼먹은 적도 많고 시범 케이스도 조진 경우도 있어서 여러 번 싸웠다네요. 그나마 덩치가 워낙 크니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진 못할 뿐이죠.”
“그놈 성정이 원래 그렇지. 수고했어. 그럼 일단 철민이랑 대기해.”
잔뜩 긴장했던 춘삼이가 김샌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에…… 그게 끝입니까?”
“그럼 뭐 추가로 시킬 줄 알았나?”
“아니. 그게…… 저 짝에서 먼저 시비를 털었으니 저희도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할까 싶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춘삼이에 강태준이 지그시 웃으며 대꾸했다.
“왜. 불을 지르라던지. 아니면 확 습격해서 때려 뿌수라던지. 그런 소리를 기대했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약간 실망한 어투에 강태준이 가볍게 타일렀다.
“임마, 우리 예전처럼 양아치 아니다. 협잡질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하는 거지. 일단 문명인답게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일단 지시 있을 때까지 편하게 대기해. 며칠 내 야근 작업이 있을 테니.”
“예. 알겠습니다.”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춘삼이였지만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녀석이 밖으로 사라지자 고개를 빠끔히 드러낸 복만이가 나타났다.
강태준의 부름에 휴가까지 써서 나온 탓인지 표정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이번 일, 춘삼이 점마한테는 끝까지 말씀 안 하실 겁니까?”
“임마 니가 쟤 입장이면 내 말이 어떻게 들릴 거 같냐? 너라면 믿겠냐?”
“쿠데타가 임박했다라…… 솔직히 믿기 힘들겠죠.”
“그래. 그리고 문제 생기면 적당히 빠져나갈 사람도 있어야지. 아직 어린 녀석까지 덤터기 쓸 일은 아니지 않나? 일단은 깊이 모르는 게 정신 건강상 좋아.”
복만이가 툴툴거렸다.
“형님께서 그렇게 배려가 넘치실 줄이야. 그거 눈물 나게 고마운데요. 이왕이면 저도 후방으로 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가늘고 길게 오래 살고 싶습니다만…….”
“배가 불러가지고. 임마, 어차피 너는 이번 일에 빼도 박도 못해. 운명 공동체라 이거지.”
한 아름 종이 박스를 안고 온 오재갑이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곤 중얼거렸다.
“어차피 기호지세가 아니겠나? 같은 배를 탔으면 끝까지 가야지.”
“재갑이 형은 쫄리지도 않습니까? 나라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데 이리도 태연하시다니,”
“뭘 새삼스럽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 보면 누가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지.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거기 편승하는 편이 더 현명한 게 아니겠나?”
오재갑의 말에 복만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 분 다 쿵짝이 아주 잘 맞습니다요. 근데 어쩌실려고요. 애초에 이억수 쪽이 침 바른 물건인데 어떻게 가로챕니까? 사령부 찾아가서 혁명을 준비하신다니 그 포고문 저희가 대신 인쇄하겠습니다, 해 봐야 대가리에 총구 겨누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들어야지.”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발해출판 주변에 인쇄소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지. 춘삼아, 지도부터 가져와 봐라.”
“예.”
강태준은 춘삼이가 전해 준 지도를 펼쳤다. 며칠간 철민이와 함께 그린 지도 위에는 주변 인쇄소들의 정확한 위치와 취급 물량, 소비전력과 설비, 최대 소화 가능 물량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후우, 생각보다 꽤 많군.”
“요새 우후죽순 많이 생겼더군요. 여기, 태일, 강호랑 청계, 문덕 인쇄소는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긴 하지만 나름 참고서와 도서 인쇄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지도를 보니 발해출판을 중심에 두고 동서로 태일, 강호가 포진해 있고, 남북으로 청계와 문덕 인쇄소가 위치해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사이즈를 본 강태준이 평수를 확인했다.
“근데 나머지 회사도 규모가 상당한 거 같은데?”
“네네. 발해출판이 워낙 대형이라 그렇지. 다른 인쇄소도 어디 구멍가게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죠. 그래도 짬밥으로 치면 꽤 전통이 있는 인쇄소들이니까요.”
“이억수를 상대로 버틸 깡이면 보통이 아니겠구만. 이 인쇄소들이 풀로드로 가동하면 물량을 어느 정도까지 뽑을 수 있나?”
“온종일 돌리는 조건으로 대략 20만 장 정도는 너끈할 겁니다. 네 군데에서 같이 돌라면, 아마 60만 장 내지 70만 장까지는 찍어 낼걸요.”
“고작 그거밖에 못 찍어?”
“고작이라니, 그 정도도 엄청난 겁니다. 형님. 아시잖습니까. 전력 수급 문제도 있고, 같은 계통이라. 인근 인쇄소에서 한 번에 같이 돌리면 부하가 엄청 걸리니까요.”
유심히 주변을 살피던 강태준이 보고 있던 지도에 연필로 크게 원을 그렸다.
“그러면 우리가 찍어 내기로 한 물량은 대신 여기 업자들한테 돌려. 특히 이 네 개의 업체에는 최대로 다다음 달 예약분까지 전부.”
“아니, 전부요?”
“그래. 가능하면 일정은 사흘 뒤부터. 최대한 빠듯하게 만기는 5월 17일이 좋겠군.”
“지금 물량을 전부 찍으려면 밤을 새워야 할 텐데요. 너무 촉박합니다.”
“그래. 나머지 자잘한 업체들에는 5월 15일쯤에 발주해. 물량 할당하고 조건을 붙여. 먼저 마치는 업체에 추가발주 검토하겠다고.”
“그렇다면 업체끼리 경쟁을 시키라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그래야 일정 맞추려고 밤새 돌릴 거 아닌가?”
강태준의 말에 복만이가 답답한 듯 지껄였다……
“아니 시방 그게 뭔 소리랍니까. 저쪽서 인쇄 물량을 뺏어와야 할 판에 한가롭게 동화책이나 찍으라니. 지는 당최 뭔 소린지 이해가 안 됩니다.”
궁시렁대는 복만이와 반대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오재갑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물었다.
“일부러 전력 계통에 부하를 준다라? 그 말씀입니까?”
“그래. 한꺼번에 전력을 소비하면 정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 그렇게 되면 물량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거 아닌가.”
그 말에 복만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그런 전략이 먹히겠습니까?”
“왜 아니야. 최근 전력 소모가 급격히 늘지 않았나? 전력이 부족해 순간 정전이 오거나 과전압으로 기계가 맛이 가 버리면 시간 내에 복구 못 해. 그렇다면 우리 쪽에 기회가 올 수도 있어.”
“아니, 저쪽이 바보도 아니고 그게 통한다고요?”
오재갑이 대신 말했다.
“발해출판에서는 몇 년간 정전을 경험한 일이 거의 없다더군. 전력 관리를 잘한 건지, 운이 좋았는지 운행 중 전력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었다는 걸세. 최근 몇 년간 보조 발전기도 쓴 적이 없었다면 그 부분에 대비가 소홀해도 이상할 것 없지 않나?”
“게다가 놈들이 윤전기를 돌릴 시간은 야밤이야. 보통은 전력이 부족할 일이 없는 시점이지.”
“하지만 설마 그 정도 대비도 안 해 놨겠습니까? 그쪽도 빠가가 아닌 이상 이런 중차대한 일에 최소한의 대비책 정도는 마련했을 텐데 말입니다.”
“했겠지. 뭐 사소한 사고 정도야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강태준이 준비에 착수한 사이 장석운 측도 쿠데타 대비 없이 손만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만승 정권 때 장석운의 비서실장이자 조폐공사 사장인 선우원은 장석운에게 쿠데타의 가능성을 경고하며 누차 조기 진압을 요청했다.
“총리 각하, 군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각하. 박정명을 비롯한 8기생들이 회합을 하고 있다 합니다.”
“섣부른 억측일세. 근래 군부에서 잡음이 많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 쿠데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각하, 이렇게 낙관할 일이 아닙니다. 정황이 지나치게 수상한 것이 CIA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 조치하지 않았소. 예편을 앞둔 군인이 무슨 큰일을 벌인다고. 그럼 체포라도 하란 말인가?”
“필요하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긁어 부스럼일세. 듣자 하니 박 소장 그 사람 부하들한테 신임이 나름 두텁다고 하던데 어차피 일주일 지나면 그만둘 사람을 자극할 이유가 없지 않나?”
“각하 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박 소장은 예전에도 남로당 일로 문제를 일으킨 전력이 있습니다. 군내 불순 세력들과 연계하면 충분히 쿠데타를 획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끄응. 그거야말로 음모론일세. 장신영 총장도 장담하지 않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미국이 개입할 거라고.”
전작권을 가진 미군이 승인하지 않으면 한국군이 독자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미국이 개입해 줄 거라는 믿음에 어이가 없는 선우원이 다시 말했다.
“총리 각하. 국내 소요사태가 일어난다고 미군이 개입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권국가로서 더 이상의 내정간섭을 허용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허어. 가뜩이나 숙군 문제로 민감한데 들쑤셔서 자극할 이유는 없잖나. 괜한 분란 조장하지 말고, 쉽게 가지. 어차피 낼모레면 그만두는 사람인데 뭘.”
선우원이 재차 진압을 권했지만 장석운은 지나치게 태평한 태도로 일관했다.
장석운의 눈을 막은 것은 미국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그의 신뢰는 신에게 바치는 믿음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김필중의 역정보 공작이 빛을 발한 덕이었다. 사실 거사 계획은 사실 여러 방면으로 새고 있었다. 이미 5월 12일 혁명 세력 일부가 통근버스 안에서 옆자리 동료에게 준비 상황을 발설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고를 받은 윗선에서는 안이하기 짝이 없었다.
“박정명 그 양반이 반란이라고? 절대 그럴 리가 없네.”
“신빙성 없는 일에 헛심 빼지 마. 자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같은 보고가 벌써 여러 군데서 올라왔지만, 육본의 무관심과 나태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잔뜩 긴장했던 김필중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6.25 때 그 난리를 겪고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군요. 이게 고마워야 할지.”
“윗놈들이 안이한 게 뭐 하루 이틀입니까. 장신영 총장이 반란에 연루되었다 가짜 뉴스를 퍼트린 게 유효했나 봅니다.”
“그놈이 소극적으로 나온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호재일세. 다행이군. 정말.”
정변 세력은 보안에 극히 철저했고 사적 모임을 자제하는 등 안보에 만전을 기했다. 전화나 모임이 있을 때면 사장, 총무, 공사장 등 모호한 용어를 사용해 사업상 만남으로 위장해 증거를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정변을 일으킨다는 억측으로 장성들을 체포하기엔 증거가 없었고. 오히려 그러려면 장신영이 저 자신을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그렇게 5월 15일 밤, 12시를 기해 8기 주동자들은 박정명 소장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번 궐기를 위해 동원된 핵심은 수도권 북쪽의 경기도 김포 최전방을 경계,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 여단 병력 1,500명.
장신영 관할 밖의 제1 해병 여단과 공수단을 비롯해서 서울 동부 제6군단 소속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30사단 일부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서울 북부의 5사단 그리고 춘천, 부산 등 각 대도시에 주둔 중이던 군을 일제히 궐기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반란군이 출동하자 쿠데타 소식은 장신영에게 곧장 보고되었다.
“각하. 쿠데타입니다. 박정명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정말 반란이라고? 반란이란 말인가?”
“예! 6관구 사령관인 박정명이 군을 이끌고 서울 한강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제6군단과 30군단 일부도 동조한 거 같습니다.”
“진짜로 반란이라니 어찌 이런 일이. 박 소장이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였다는 말인가.”
충격을 받은 장신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북괴와 대치되고 있는 와중에 최전방 전력을 빼돌리다니. 박정명이 거사에 동참하자며 은근 회유하기까지 했지만, 단순한 불만에서 비롯된 망상이라 치부했던 그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