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발해출판
깜짝 놀란 방 중령이 부르짖었다.
“소장님! 재고해 주십시오.”
“벌써 두 번이나 미룬 계획이 아닌가. 이대로 가면 혁명은 시도도 못 해 보고 흐지부지될 판이야. 영 어설퍼 보여도 이대로 밀고 가는 수밖에.”
“하지만, 소장님. 계획이 노출되었다면 전면 다시 검토하는 편이…….”
쓴웃음을 지은 박정명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저쪽도 우리 수를 읽고 있다면 오히려 지금처럼 방심할 때가 기회일세. 예편 예정된 장교들만 수십 명인데 이제 돌이킬 수 없지 않나. 인사 개편이 끝나고 나면 다음 기회는 영영 없어, 우리에게 선택지는 이제 없네.”
“그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리가 소모품입니까. 장장 8년을 전장에서 뺑이 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집에 가라니, 이런 홀대가 어디 있습니까?”
“시국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부패한 정치인과 용공 분자들 탓입니다. 사회의 적폐를 몰아내고 싹 쓸어 버려야 합니다.”
함께 모인 영관급 장교들 역시 대부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모인 것은 이미 한 달 뒤로 예편 일자를 통보받은 박정명과 육사 8기생들 그리고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소위 비주류들. 감군은 기정사실이었고 감군 대상자로 꼽힌 영관급 장교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육사 8기들이었다. 육사 8기는 위아래로 치이면서 가장 소외당한 계층이었다. 예를 들면 육군참모총장이던 장신영은 나이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을 다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불과 3살 연하인 김필중은 만년 중령 신세를 면치 못할 만큼 인사 적체가 극심했다.
인사 적체로 승진길이 막힌 영관급 장교들의 탈출구는 고인 물들을 몰아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군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 말은 8기에게 퇴로가 막혔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했다.
전의를 다지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박정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구의 이일주 참모장에게 언질을 주었다네. 거사는 열흘 뒤. 더는 미룰 수 없을 거 같아.”
“장석운 총리를 잡는 게 문제겠군요. 어떻게 할 겁니까?”
“사로잡아야지. 우리 뜻에 따르게 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말을 마친 박정명이 눈짓하자 남형욱이 미리 가져온 설계도를 앞에 펼쳤다.
“이건 총리가 머무는 대도호텔 모사도일세. 생각보다 보안이 허술하더군. 건물 양쪽 면에 철제 비상계단이 있어.”
“비상 탈출할 때 따로 펼칠 수 있도록 해 뒀군요.”
“다만 위에서 내리는 건 가능해도 반대는 불가능해. 정문 출입은 힘들겠고, 위로 오르려면 로프가 필요할 거 같네.”
“그러면 건물을 타고 올라갈 팀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 특공조가 필요하지. 저항이 거셀 테니. 좀 위험할지 몰라.”
그러자 잠자코 있던 유병락 대령이 결연히 나섰다.
“대마를 잡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 일은 우리 공수팀이 맡겠습니다.”
“유 대령이 나서 준다니 든든하군. 그럼 최소 4팀이 필요할 거야. 엘리베이터조, 비상구조, 층계조, 정문조를 각 편성하고 18명씩 병력을 투입해 집무실을 단번에 급습해야 해.”
혁명에 성공을 위해서는 기습밖엔 답이 없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중심부를 선제타격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총괄 기획 및 조정 역할을 맡은 김필중의 주도하에 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박정명은 마침내 안방에서 옷장 깊숙이 넣어 둔 공책 한 권과 서류를 꺼냈다.
“그건 뭡니까?”
“우리들의 공약일세. 미리 준비해 둔 거지.”
그가 꺼낸 것은 혁명 공약과 혁명 취지문 포고문 초안이었다. 김필중이 소리 내어 앞머리를 읽었다.
혁명 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사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이와 같은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며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방송국을 장악하는 즉시 이 포고문을 발표할 걸세.”
연판장을 돌린 장교들이 지장을 찍는 절차를 가졌다. 이제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표식이었다. 공약을 확인한 군인들은 흥분과 긴장으로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인장을 확인한 박정명이 강조하듯 말했다.
“이번 일은 속도가 핵심이야. 포고문을 살포하는 데는 32절지 크기로 대략 40만 장 정도가 필요하다는군. 인쇄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이억수 사장이 장담하기로는 7만 장을 인쇄하는 데 대략 1시간이면 된답니다. 인쇄하면 자정부터 시작할 경우, 6시간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김필중의 답변이 만족스러운 듯 박정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무난하이. 포고문 인쇄는 혁명군이 서울 시내로 진입한 뒤에 바로 시작하도록. 혹시, 거사가 발각되어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붙들려 가는 일이 있더라도 15시간만 버티게. 그 안에 모든 일이 마무리될 테니. 공장 직원들이 작업 도중 기밀이 누설되지 않게 만반을 기해야 하네.”
“그거야 물론입니다.”
“차 대위, 임자는 후방 지원하면서, 김 중령과 경호원 3, 4명과 함께 직접 인쇄 작업을 감독하게. 그리고 순찰 경관이 오거든 입을 막고 잡아 둬.”
“예. 명심하겠습니다.”
“사즉생 필즉사! 용감히 싸워 해내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명심하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제부터는 D데이니 H아워니 시간 변동은 없다.
혁명이 성공해서 대의를 이룰지. 아니면 실패한 반역도가 되어 역사 속의 비료로 화하고 말지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박정명은 확신했다. 혁명이 무조건 성공할 것임을.
광기 어린 눈빛이 기묘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며칠 후, 견지동.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지나가는 자전거에 벙거지 모자를 쓴 거지 하나를 따라 허름한 가죽옷을 입은 녀석이 골목 뒤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두침침한 골목 구석, 함석 쓰레기통 옆에 숨었던 춘삼이가 돌아온 철민이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데려왔구먼. 윤한아, 어려운 부탁일 텐데 와 줘서 고맙다 야.”
“형님, 이번이 한 번입니다. 이런 거 부탁하면 정말 곤란합니다요. 저 이제 이런 거엔 손 뗐다니까요.”
철민이가 데려온 녀석은 발해출판 하청 직원인 김윤한으로 한때 춘삼이와 같은 보육원 생활을 했던 녀석이다. 성년이 되어 보육원에서 나와 우연히 옵셋기 원판 가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운 좋게 사장의 눈에 들어온 것. 그러다 이번에 발해출판에서 증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파견을 나왔던 것이다.
“야,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내가 공짜로 해 달란 것도 아니고 후하게 수당도 쳐줬잖아.”
“암튼, 약속대로 물건만 뭐 있는지 확인하고 나오는 겁니다. 창고 기물에 함부로 손대면 난리 납니다. 이억수 그 인간 그런 부분은 편집증 같은 게 있어서. 불시에 창고 검사를 하는 게 취민데 혹 물건 반출하면 귀신처럼 알아차려서 들들 볶더군요.”
“알아. 내 무슨 도둑질이라도 시키는 줄 아나…….”
몇 번이나 강조하는 윤한이의 말에 따라나선 춘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근데 뭐 요새 별반 수상한 소리는 없고? ”
“글쎄요. 원래 이 사장님 변덕이 죽 끓듯 하시니. 새삼스럽지 않지요. 요새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밑에 사람만 죽어납니다. 조금만 불량이 나와도 바로 빠꾸를 먹이니까. 그래도 저는 대놓고 조인트 당하는 입장은 아니니 뭐, 어 근데 이거 왜 안 열리지…….”
거대한 트럭들과 책을 옮기는 지게차들 뒤편으로 철문 하나가 나 있다. 다시금 용을 썼지만, 철문은 여전히 단단히 잠겨 있었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듯 윤한이가 수선스러웠다.
“이거 잠겨 있는데요? 평소에 그냥 열어 두는데…….”
“띨띨하긴, 열쇠는 어디 있어?”
“그거야 편집국장이 관리하지요. 이거 성가신데. 혹 모르니 위로 올라갔다 올까요?”
“멍청하긴, 쓸데없이 의심 살 일 있나? 거기 철사 하나 줘 봐.”
춘삼이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가느다란 철사를 자물쇠 안에 넣고, 비트는 폼이 전문가의 솜씨. 잠시 후 딸깍 소리와 함께 두꺼운 자물쇠가 열리자 뜻밖의 묘기에 철민이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형님,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겁니까?”
“예전 겨울에 구리 선 팔아먹다 걸려서 며칠 철창신세를 진 적 있거든. 그때 구치소에서 도둑놈들 뒷수발 들다가 배웠지. 내, 이 짓거리는 다시 안 하려고 했는데. 아 됐다.”
딸깍!
끼이이이이잉!
창고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너무 커 얼굴이 창백해졌다.
위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가슴을 쓸어내리는 둘이었다.
“십년감수했군. 거 디지는 줄 알았네. 문이 뻑뻑하면 말을 해 줬어야지.”
“자자, 빨리 살펴보십시오. 시간 없어요. 점심 끝내고 비번 돌아올 때까지 길어야 30분입니다.”
재촉하는 윤한이의 말에 슬그머니 들어간 철민이와 춘삼이가 좌우를 살폈다. 아연판과 잉크를 비롯한 각종 인쇄 용품이며 재고로 보이는 책들과 박스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수십 권 정도의 재고가 쌓인 가운데 반품 도서나 파본이나 재생불가로 폐기할 도서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이야, 바리바리 쌓아 놨구먼. 이게 다 재고품인가?”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일단 뭐든지 쌀 때 사 놓는 거죠. 잉크나 종이가 썩지는 않잖습니까?”
책들이 쌓여 있는 철제 구조물은 칸막이가 된 채 일반렉과 하이렉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일반렉은 위 사진들에서 5단이었고, 각자 구분 번호가 붙어 있었기에 재고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쉬웠다. 높이가 11미터가 넘는 하이렉 쪽의 구역에는 천장이 경사가 진 채 위로 더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재고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조명이 가려져 어두워져 있다.
주변을 둘러보던 철민이가 종이를 살폈다.
“형님. 이거 보십쇼. 전부 8절지입니다.”
“그래?”
“신문사에서 쓰는 갱지랑은 비교가 안 되네요. 품질이 무지 좋은데요. 이 결 좀 보십쇼.”
손등으로 종이를 쓸어 보니 과연 질감부터 부드럽다.
꽤 비싼 값을 할 것 같은 종이에 철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비싸겠네. 이 정도면 얼마나 되나?”
“창고를 꽉 채운 걸 보니 일천 박스는 족히 되겠는데요.”
“배본사에 맡기지도 않고, 이 물량을 그냥 쌓아 둔다고?”
창고 내부를 살펴보니 과연 쟁여 둔 물량이나 잉크가 넘칠 만큼 구비되어 있는 것이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좀 이상하긴 하군요. 이 사장님 같은 구두쇠가 이런 물량을 따로 남기다니. 총무님도 재고관리에 소홀한 사람이 아닌데.”
“비싼 종이를 일부러 쟁여 뒀다라. 분명 뭔가 준비하는 게 있는 게 있겠지.”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근데 굳이 이렇게 염탐까지 해야 할 일입니까?”
“몰라. 일단 확인이 우선이랬으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짱구 굴려 봐야 똥밖에 안 나온다면 생각을 안 하는 게 도리어 편하다.
서둘러 재고 확인을 끝낸 춘삼이가 강태준에게 보고를 올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