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혁명이냐 쿠데타냐
숨이 찬지 가쁜 숨을 고르던 김필중이 하늘을 보며 숨을 토했다.
“허이구 힘들구먼.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그래도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늘기는 아주 늙었지. 20대 같았으면 지금도 쌩쌩했을 터인데.”
“하하. 사람이 나이 먹는 건 자연스러운 거죠. 여기 물입니다.”
가져온 물병을 건네받은 김필중이 찬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반 정도 물을 들이켠 그가 시원하다는 듯 캬 소리를 내더니 강태준에 물병을 재차 건넸다.
“간만에 몸 푸니 좋군. 근데 나는 왜 만나자고 했는가?”
“사람 만나는 데 이유가 딱히 필요합니까. 이것부터 받으시지요. 여기 선물입니다.”
“선물은 무슨 선물?”
물건을 전달받은 김필중이 그 자리에서 포장을 벗겼다. 내용물을 확인한 김필중이 깜짝 놀랐다.
“이건. 하늘고래 아닌가?”
“이번에 보직 이동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셨잖습니까? 가시기 전에 약소하지만 하나 준비해 봤습니다. 자제분한테 필요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제 자식 선물을 싫어할 부모는 없다. 김필중 역시 만면에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약소하기는. 딸아이가 정말 좋아하겠군. 이거 애들이 얼마나 사 달라고 조르던지, 이거 한정판이로군. 돈 주고도 못 구하는걸, 이걸 어떻게 구했나?”
“사실 저희 출판사에서 찍은 책입니다. 몇 권 정도는 따로 빼 뒀지요.”
김필중이 고개를 흔들며 놀랍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경황이 없어서 몰랐구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거 정보과 장교 체면이 말이 아닌데. 이거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
“하하. 요사이 바쁘시다 들었는데 충분하게 그럴 수 있죠. 그보다 맘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맘에 들고 말고, 이런 귀한 걸 주다니. 헌데 이거 어쩌나 나는 특별히 줄 게 없는데.”
“에이, 지금껏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잖습니까. 저번 고춧가루 납품 건도 그렇고. 그냥 작은 보답입니다.”
“허어. 그건 내가 부탁한 일 아닌가. 그리고 사실 보직 이동은 물 건너갔다네.”
이미 다 알고 온 강태준이었지만 금시초문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 이번에 예편해. 아무래도 더는 못 다닐 거 같아서 말이야.”
“예? 이렇게 갑작스럽게.”
“항명 일로 윗선에 미운털이 박힌 거지. 방첩대장이 자꾸 나대면 주변이 다칠 수 있다 협박하지 뭔가. 강제로 짤리든지 아님 알아서 순순히 물러나던지. 양자택일을 하라는데 별수 있나. 뭐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한 바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듣자니 좀 씁쓸하더구만.”
“아니, 그럴 수가. 오히려 짤릴 사람은 그쪽 아닙니까.”
사실상 강제 예편당한 셈이지만 김필중은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허허, 차라리 잘 되었지.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면서 만년 중령 노릇 하는 것도 질렸는데 말이야. 일개 중령이 참모총장을 끌어내렸으면 각오는 해야 하는 법이지.”
“그럼 달리 가실 자리는 봐 두셨습니까?”
“어디 그런 게 있겠나. 쉬는 동안 찬찬히 생각해 봐야지. 내 사정은 들어 봐야 기분 나쁘기만 하니 자네 사정이나 좀 듣지. 그간 어떻게 지냈나?”
관심을 보이는 김필중에 그간 돌아가던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 수완에 감탄했는지 김필중이 추임새를 거듭했다.
“대단하구먼. 1만 부도 아니고 10만 부라니. 그 정도면 해외에선 베스트셀러급 아닌가?”
“공식 통계가 있다면 그랬겠죠. 해적판만 아니었어도 더 많이 팔았을 겁니다.”
“그럼 엄청 바쁘겠구만. 출판 일이란 게 생각보다 장난이 아닌 걸로 아는데.”
“요새 기계를 좀 더 들여놔서 견딜 만합니다. 한 시간이면 16절지 분량으로 최대 5만 장까지 찍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
“오 그렇게나 많이? 거의 중견 신문사에 준하는 수준 아닌가?”
“에이, 그 정도까진 안 되지만 대충 동네서 방귀 뀔 정도는 됩니다. 급하게 대량으로 인쇄할 일이 생기시면 찾아 주십시오. 인쇄소는 퇴계로 한국 극장 인근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젓는 김필중이었다.
“부탁할 일이 있으려나. 군에서 쫓겨날 몸인데 뭘.”
“하하, 세상일은 모르지요. 저희 인쇄소에서 삐라나 광고지도 잘 만듭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특별히 파격가에 모실 테니 말이죠.”
“하하. 꼭 기억하겠네. 그보다 땀 때문에 찌뿌둥한데 어때 간만에 사우나나 가지.”
“그거 좋지요. 내기는 제가 이겼으니 비용은 중령님께서 내는 겁니다?”
“아유 벼룩의 간을 빼먹게나.”
목욕탕서 먼지를 씻어 낸 둘은 삶은 달걀을 나눠 먹으며 땀을 식혔다.
오후가 되어 헤어지는 길, 김필중이 웃는 낯으로 농을 건넸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 좀 하고 지내지. 모르는 척 말고.”
“물론입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강태준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던 김필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늘한 눈빛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다. 김필중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쿠데타가 성공할지는 미지수지만, 보험을 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보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분명히 계획이 새어 나간 게 분명합니다.”
어느새 나타난 채인철 소령이 옆에 시립하고 섰다.
“냄새를 맡았다라. 결국 김정렬이가 불었나?”
“예. 자기 혼자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 영 불만이었나 봅니다.”
“멍청하긴. 고작 몇 달만 참으면 될걸.”
사실 항명에 대한 처벌이 표면적이었지만, 실상은 쿠데타에 대한 견제 목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군부에서 수상한 책동이 있다는 폭로문이 군 당국과 총리실까지 올라갔다는 보고가 있었으니까.
물론 김정렬 대령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부분이 없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정군 운동을 주도한 죄로 처벌을 받은 16인 중 혼자만 불경죄로 파면되어 집행유예 1년 처분을 받았던 것.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풀어 줬다는 것은 결국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을 잡지 못했다는 소리.
“운신의 폭이 좁아지긴 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으니 말이야.”
“그러게요…… 거, 누군가?”
갑작스런 인기척에 번개처럼 권총을 뽑아 든 채 소령이 소리가 난 방향을 겨누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림자를 보며 김필중도 안전장치를 풀었다.
“누구냐, 순순히 신원을 밝혀라.”
“워워, 형님도 참.”
손을 들고나온 상대의 얼굴에 긴장이 풀린 김필중이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차 대위? 뭐 하나 거기서.”
“허허, 접니다. 나름 안 들키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귀신은 못 속이겠군요.”
중절모를 쓰고 있던 행인이 허리를 쭉 펴더니 실실 웃음을 지으며 손을 벌렸다.
김필중의 후배이자, 정보과 출신의 차지만 대위다. 안주머니에 총을 다시 집어넣은 김필중이 마뜩잖은 눈으로 말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자넨 소장님을 보필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혹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항시 긴장을 늦추지 말라 일렀거늘…….”
“형님도 참,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쇼. 소장님께서 시킨 일입니다.”
“소장님께서?”
“예. 당장 모셔 오라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거사 일정이 앞당겨질 거 같습니다.”
표정을 지운 차지만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그 말뜻을 이해한 김필중이 안색을 굳혔다.
“그럼 지체할 시간 없군. 바로 출발하게.”
“모시겠습니다.”
과연 골목길 뒤 가니 작은 지프차 한 대가 보인다. 지프에 올라탄 둘이 찾은 곳은 신당동에 위치한 박정명 소장의 자택이었다. 박정명의 안사람인 옥 여사가 서둘러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혹시 뒤에서 방첩대나 범죄수사대는 따라붙지 않았지요?”
“예, 숙모님. 소장님께서는 좀 어떠신가요??”
“들어가 보세요. 안에서 논의 중이시니.”
과연 방첩대 산하 506부대 대장 유병락 대령과 범죄수사대(CID) 소속 방문국 중령, 유병락 대령, 그리고 예비역 소장인 김한동 소장 등이 미리 선객으로 와 있었다.
김필중이 들어오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예우를 갖췄다.
“이거 누군가. 김 중령 아닌가. 이거 무사히 살아 돌아왔군.”
“어이쿠야. 근데 여기 무슨 술판이라도 합니까. 대한민국 주당으로는 일등만 모였군요.”
“하하. 김 중령까지 왔으니 일단 상이라도 봐 오지. 임자. 여기 막걸리라도 좀 내오게나.”
옥 여사가 상을 내오자 다시 한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 조촐하게 차려진 상 위로 매콤한 골뱅이 무침과 오징어 파전이 놓였다.
수척해진 얼굴을 본 박정명이 가만히 잔을 따라 주었다.
“임자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나 때문에 욕봤군.”
“하하. 어찌 그게 장군 탓입니까. 뭐 근데 방 중령님 조사할 때, 모포 꼴랑 두 개 던져 주는 건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방문국 중령이 눈을 찡그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원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 아닌가. 그 부분은 내 사과하지.”
“됐습니다. 거사를 치르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 보다 들으셨습니까, 최근 여론조사 결과 고작 3.7%만이 현 정권을 지지할 만큼 민심이 이반 되었다는군요.”
“장석운이도 똥줄이 타나 보지. 데모금지법까지 입안할 정도면 말 다 했지. 평소 민주화에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하시더니만 발등에 불 떨어지니 말 바꾸기 하는 걸 보소. 내로남불도 이만한 내로남불이 없소.”
“원래 민주화니 통일이니 지껄이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권력을 잡기 위한 핑곗거리지요.”
남형욱 중령의 말대로 당시 장석운 정부는 반공 임시 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입안했고, 이에 따라 반대의 목소리가 전국으로 번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데모 금지가 절대 악법이라며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
경찰이 제지하려 했지만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대구에서는 최루탄이 난무하는 등 대대적인 진압이 이어졌고,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흘렀다. 박정명 또한 소식을 들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구파에선 정권이 용역까지 동원했다 맹비난하더군. 하지만 이미 데모의 기세가 꺾인 뒤라 아무래도 이번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건 어려울 거 같네.”
“예. 저도 동감입니다. 아무래도 이 정도에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폭동진압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으나 이야기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4월 19일 기다렸던 데모는 창녀와 포주들이 매춘을 합법화하라는 시위가 다였던 것. 혼란을 틈타 거사를 진행하려 한 쿠데타 세력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위에서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인사 개편까지 진행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손발이 묶이기 전에 빨리 터트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시위가 커지기는 글렀습니다. 어차피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어요. 이제는 결단할 시간입니다.”
그간 사용한 공작금을 300만 환, 데모할 때 뿌릴 전단까지 2만 장이나 준비했지만, 데모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해병대 소장 출신인 김한동의 말이었지만 방 소령은 신중론을 폈다.
“이미 신중해야 합니다. 저희 패가 다 드러난 마당에 경거망동하다간 한 번에 일망타진당할지도 모릅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끝장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쪽이 우리 패를 전부 알고도 그냥 내버려 뒀다는 게 무슨 소리겠습니까. 그쪽에서 쿠데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요. 주시하다 한 번에 묻어 버리겠다는.”
모두 박정명만을 바라보자 박정명이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사는…… 예정대로 속행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