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13화 (113/361)

113화 줄타기 전략

“그 기레기…… 아니 그 인간이 웬일로.”

“아무래도 저번에 오성 쪽으로 옮기면서 5단 광고 의뢰를 받았는데 발해에서 받을 돈이 꽤 남았다는군요. 근데 이억수가 입을 씻는 바람에 회사에 찍혀 사정이 좀 곤란해졌다고. 덕분에 앙심이 맺힌 모양인지 꽤 적극적입니다. 미군 부대 출입 규제만 풀어 주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군요.”

“흠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물어뜯을 능력은 되고?”

“이억수 약점은 자기가 잘 안다네요. 사생활이 지저분한 놈이라, 유부녀 킬러라던지, 여대생과의 불장난 정도면 괜찮은 제목으로 뽑힐 거 같다는데요?”

“그럼 하는 거 봐서 결과 보고 판단하겠다고 해. 알아서 싸워 주겠다면야 사양할 건 없겠지.”

이억수의 여성 편력 정도는 강태준도 대충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요리할지는 실력을 봐야 하지 않겠나. 오재갑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이억수의 행동이 조금 의문점이 있긴 합니다.”

“뭐가 말이야?”

“이억수 그 자식이 싸가지는 밥 말아 먹은 인간이긴 해도 사업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 유능하다는 평이 있지 않습니까.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굳이 무리수를 남발하면서 소송을 강행하는 이유가 뭘까 이해가 안 돼서요. 출혈경쟁을 해 봐야 자기도 다칠 것이 뻔한데, 사실 이런 소송전은 스크래치 내기밖에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군. 이억수가 인성은 최악이지만 사업 수완만큼은 타고난 사람이니.”

“네. 맞습니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 의심스럽긴 합니다.”

“믿는 구석이라…….”

강태준은 서재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국가는 통제 불능의 혼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비 기자들이 주로 뜯어먹으려는 대상에는 기업이나 정부, 경찰, 군 등 어디든 돈 되는 곳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가장 타겟이 되는 것은 군부였는데 가난한 와중 그나마 물자가 쌓여 있는 곳이 군이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아노미 상태. 통제 불능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누군가는 딴생각을 하기 마련.

‘생각해 보니 쿠데타가 일어날 시점이 멀지 않았어.’

후발주자였던 발해 원양이 60~70년대 온갖 특혜를 받고 날아오른 이유는 단 하나.

군사 쿠데타 당시 혁명 공약을 인쇄한 공으로 정권의 특혜를 독식해서가 아니던가.

혁명정권이 들어선 후, 수산 진흥 기금을 독식한 이억수는 권력의 비호를 받아 급성장했다는 사실은 발해 원양에 몸담았던 강태준이 누구보다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이 지배하는 고도성장기에는 더욱더. 이제껏 그가 소극적이었던 것은 정치에 깊이 발을 담그기 싫었던 까닭.

정치권에 너무 가까워 봐야 돈 나오는 화수분 취급밖에 받지 못할 뿐.

하지만 이억수가 칼을 겨누고 있는 지금 강태준의 선택지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지.’

포문을 먼저 연 건 저쪽. 선을 넘는다면 결국 응징할 수밖에.

심호흡을 한 강태준이 설인모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설 소령님께, 그동안 옥체 무강 하셨습니까. 날씨가 점점 풀려 가는데…….

다행히 약속을 잡은 강태준이었지만, 며칠 후 연지동으로 간 강태준 앞에는 도로를 메운 시위대가 몰려나와 있었다. 피켓을 든 시위대는 차량 앞에서 행진가를 부르며 기세 좋게 걸어가고 있었고, 이마에 띠를 두른 학생이 확성기를 켜고는 소리를 질렀다.

[가라 북으로, 오라 남으로]

[평양으로 가자! 일어나라 청년 학도들이여!]

자주통일을 부르짖으며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의 행동에 강태준은 이마를 좁혔다. 이만승 실각 후, 학생들은 사회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해 혁신계의 지지 아래 점차 세를 넓히고 있는 와중이었다.

여기서 태풍의 핵이 된 것은 작년 발기대회를 가진 한국대의 전국통일연맹.

5월 초 전국 17개 대학 대표가 전국통일 전국학생연맹을 결성해서 개최해 결성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장석운 정부는 정부 승인 없는 학생들 간의 남북회담은 절대로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미 지도력을 상실한 장석운의 말은 학생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철 지난 코르덴 바지에 낡아 빠진 와이셔츠를 입은 대규모 인원들이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동안에 시장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무런 제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경찰들 역시 그저 사태를 지켜볼 뿐 방관하기만 하였다.

“스벌 오늘도 장사 공쳤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간이 남아도나, 어케 하루가 멀다고 맨날 데모질이여.”

“저놈들이야말로 똥물에 튀길 놈들이지. 탄광에 보내서 똥 빠지게 굴러 봐야 인생 힘들 줄 알제.”

“임마. 흰소리 말어 아들 듣겠다.”

막강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데모대의 위력 앞에서 사람들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애꿎게 해코지당하고 싶지 않았던 강태준도 그저 데모대의 행렬을 주시했다.

일단의 군중이 사라진 뒤, 다방으로 들어간 강태준은 설인모와 조우했다.

오랜만에 본 설인모는 어깨 견장에 말똥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

“오늘 날이 뭔가 소란스럽더군. 간만에 보네 매제. 오느라 수고 많았어.”

“예, 영전 축하드립니다. 이제 중령님이시군요.”

“하하. 제부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 영 쑥스럽군. 뭐 군대가 체질인가 보지. 그보다 결혼은 언제 할 건가?”

“아직 이르지 않겠습니까. 유하 씨 시보 딱지도 아직 안 뗐는데, 쓸데없이 부담 주기 싫습니다. 자리 잡고 여유 생기면 그때 차차 정해야죠.”

“어후, 그럼 갸 좀 빨리 데려가라, 여자애가 뭐 기가 드센지. 고시 합격한 이후로 영 통제가 안 되네. 오빠 말을 개코로 들으니.”

“하하. 그거야 일시적인 거겠죠. 사회생활 하다 보면 좀 바뀌지 않겠습니까.”

“걔가 어디 그럴 애인가. 암튼 요사이 세태가 보통이 아니야. 일국의 총리를 지 집 똥개처럼 까는 기사가 나고 말이야. 자네도 그 만평 봤나? 병선이와 석운이 말일세.”

“예. 좀 보기에 불편하더군요.”

장석운 정부의 현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신문만평에서였다. 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만평에서 장석운 총리와 윤병선 대통령을 개에 빗대어 싸잡아 비난한 것이 일종의 밈처럼 변해 버렸다.

공보비서관이 항의하자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사장인 이관진이 윤전기를 멈추게 했지만 한 번 떨어진 정부의 위신은 회복되지 않았다.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 언론이란 것들이 정권을 동네북으로 아는 건지. 비판만 한다고 언론의 자유를 찾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게 다 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문사들이 조간 팔고, 석간 팔고, 부지런히 팔아먹으려면 기삿거리가 필요하잖습니까?”

“그게 안 좋다는 거야. 정론지들조차 사이비 신문사에 편승해 돈 뜯어먹기 바쁘고, 정부는 혼란을 수습할 생각은 없이 서로 당권싸움에 매몰되어 내분만 일삼으니. 언론에 먹잇감만 제공하는 꼴 아닌가? 사실 학생들도 문제야. 근래 통일운동이니 뭐니, 용공 분자들한테 매몰되어 어처구니없는 순진한 주장들을 하는 꼬라지 하고는. 판문점에서 북한 학생과 아리랑을 부르겠다니 이게 무슨 망발인가.”

“철부지들이라 그렇죠. 세상일이 어찌 이상적으로만 흘러가겠습니까?”

강태준 역시 통일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이해하고 있고, 정치 판도가 변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일견 공감하는 바가 있긴 했지만, 현실적 대안 없이 낭만주의에 빠진 담론은 냉전이 격화되는 이 시대에 비추어 공허하기 짝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렇게 사회문제를 성토하던 설 중령이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슬쩍 말을 돌렸다.

“이거 나 좀 봐, 사람 앉혀 놓고 내 이야기만 한 거 같구먼. 그보다 무슨 일로 불렀나?”

“혹시 김필중 중령님과 말씀 여쭐 수 있겠습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커피를 홀짝인 설인모가 슬그머니 다리를 꼬았다.

“김 중령님을 뵙는다고? 흠. 그건 어려울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습니까?”

“요새 군부가 하극상 문제로 시끄러워서 말이야. 정군 운동 때문에 똥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중령님을 음해하려고 벼르고 있어.”

“정군 운동이요? 요새 말이 많이 들리긴 하더군요.”

“그래. 학생들도 한목소리를 냈는데 사회 중추라는 군부 내 장교들이 아무런 자정 노력도 없으면 좀 쪽팔리지 않나. 보다 못한 김 중령께서 총대 메고 나섰는데 뭐 결과는 처참하지. 윗선에서 눈에 불을 켜고 하극상이라고 난리들이야.”

“용감한 일을 하셨군요.”

“뭐 그 덕에 우리 같은 법무관들도 개고생이지. 사실 장교들이 병사들 식단에 장난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거든. 공병용 불도저나 정부용 GMC를 빼돌려 유용하는 자들도 부지기수고. 몇 달 전에도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네.”

“무슨 일입니까?”

“미군이랑 훈련을 했는데 엉뚱하게 좌표가 틀어져서 한참 헤맸지 뭔가. 이유를 알아보니 사단장이란 놈이 독도법도 몰라서 엄한 곳에 군을 배치했더군.”

“에? 설마요? 그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내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있나. 미군 쪽엔 겨우 둘러대서 수습하긴 했지만 내 얼굴이 다 화끈하더군. 별 달고 독도법도 모르는 병신이 장군이란 게 코미디 아니겠나. 근데 지 가오 떨어졌다고 거품을 물고 지랄하는 꼴이 참. 뭐, 그 일 덮는다고 보직 이동도 하고 승진했지만 말이야.”

“원래. 병신한테 병신이라 말하면 더 열 받는 법이니까요.”

신랄한 표현이 맘에 드는지 설인모가 껄껄 웃었다.

“맞는 말이지. 암튼 항명사건도 있고, 요새 시끄러운 상황이라. 되도록 만남을 자제하는 게 좋아. 혹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말이야.”

“잠깐이면 됩니다. 뭔가 청탁 같은 문제는 아니니 염려 놓으십시오. 저 아시잖습니까. 그런 거 잘 못 하는 거.”

“자네가 정 그렇게 부탁하니 한번 이야기는 해 보겠네.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나.”

강태준은 무슨 이유인지 알고 있었다. 설인모는 말은 아꼈지만, 한동안 방첩대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는 건 행보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며칠이 지난 뒤, 김필중에게서 편하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나기로 한 곳은 평소 동호회원들과 함께 가던 학교 운동장.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김필중이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드리블을 하고 있었다.

강태준을 본 김필중이 슬쩍 공을 튕겼다. 부드럽게 공을 받은 강태준의 모습에 김필중이 미소를 지었다.

“어이고, 강 사장 오셨나? 요새 통 안 보이더니, 어째 후덕해진 거 같아.”

“일에 바빠서 운동할 여유가 없었죠. 그보다 김 중령님께서는 어째 턱선이 샤프해지셨습니까?”

“뭐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많았지. 그럼 간만에 몸도 풀 겸, 우리 한 게임 하는 거 어떤가?”

강태준이 익숙하게 공을 돌리며 도발하듯 말했다.

“좋지요. 자신 있으십니까?”

“몸도 기계랑 마찬가지라 안 쓰면 녹슬지.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의 자네한테 질 거 같지 않은데.”

“허.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요. 어디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좋지. 우리 내기할까? 간단하게 만 환 빵 어때?”

“좋습니다.”

한동안 몸싸움을 벌이던 둘은 땀을 거하게 쏟은 뒤 바닥에 대자로 엎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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