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태풍 속의 찻잔
드르릉~ 쿨!
취조실에서 제집 안방처럼 코까지 골며 태평스럽게 자는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수사관들.
이제껏 하고 많은 인간을 만나 봤지만 이렇게까지 무데뽀로 나오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거참, 저 새끼 완전 강심장이구먼.”
“이거 제대로 임자 만났네. 배짱 좋네요. 저 자식 입 열게 만들기 쉽지 않겠는걸요.”
“니미, 주먹이 우는데 확 저걸 확 패 버릴 수도 없고.”
“거 참으십쇼. 나중에 문제 생기면 골치 아프니 그보다 검사님은? 또 어디 내빼신 겁니까?”
“모르지. 또 어디 근사한 술집에서 접대받고 계실지. 원래 인화력 하나는 갑이신 분이니까?”
“젠장, 골치 아프게 또 근처 주점부터 뒤져야 하나?”
“앗, 지금 오십니다요. 형님. 조용히!”
쉿 하고 입가를 가린 태 수사관. 때마침 어슬렁거리며 사건의 담당인 신명부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도록 무슨 짓을 하다 나타났는지 알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모습에 김 수사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휴 냄새, 검사님. 또 술 드셨습니까?”
“뭐, 나보다 김 수사관이 훨씬 베테랑 아닌가. 나보다 피의자들 다루는 솜씨가 훨 나은데, 그럴 땐 빠져 주는 게 오히려 도움이지.”
머리가 까치집이 된 신 검사가 야리꾸리한 냄새를 풍기자 수사관들이 코를 움켜쥐며 거리를 벌렸다.
“어이쿠, 하수구 냄새도 아니고 지독합니다요. 좀 씻고라도 오시지. 대체 뭘 드신 겁니까?”
“뭐. 냄새? 술로 이 닦고 왔는데.”
“에구 디러. 절로 가서 이라도 닦고 오십쇼. 검사 체면에 그게 뭡니까?”
“그래, 냄새나?”
“썩은 내가 진동합니다요.”
궁시렁거리던 신 검사가 손바닥으로 제 입 냄새를 맡더니 헛구역질을 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온 검사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허, 미안. 안주로 홍어 좀 씹었더니 영 독하구먼. 거, 조사는 좀 진척은 있나?”
“아니요. 세상에 저런 피의자 녀석은 저도 처음 봅니다. 아주 독한 놈입니다요. 구치소가 지 안방이나 다름없던데요.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아주 개념이 없는 건지.”
수사 정황을 보고받은 검사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물건이구만. 대학까지 나온 놈 아닌가. 천지 분간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닐 테고, 꼴에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그러잖아도 윗선에서 연락이 왔다네.”
“윗선이라면 누구 말입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수사관에 신 검사가 밸트를 끄르며 투덜거렸다.
“어디긴 어디야 금배지 단 분들이지. 한쪽에선 족치라고 지랄이고, 다른 쪽에서는 빨리 풀어 주라고 난리법석이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아주 똥 밟았어.”
“저도 당최 이해가 안 되긴 합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방귀 좀 뀐다는 양반들이 한둘도 아니고 집단으로 총출동하고 나섰는지?”
“그러게 말일세. 자존심 싸움인지 아님 진짜 뭐가 걸린 건지. 젠장 간만에 용돈 좀 챙긴다 싶었는데 싸하구만.”
수사관 입장에서도 이번 사건은 영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 폭행 문제인 줄 알았던 사건이 이 정도로 커질 줄 누가 알았겠나.
그렇다고 뒷돈을 받아먹은 입장에 바로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 후회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눈 딱 감고 기소해 버리는 건 어떤가요? 그래도 하는 척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 미쳤나? 임마. 6수 해서 겨우 합격했는데 여기서 그만두라고?”
“에이. 설마 옷 벗겠습니까? 어차피 엮인 거 눈 딱 감고 한쪽에 붙어먹는 편이 낫지요.”
태 수사관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신명부였다.
“미쳤냐? 나중에 문제 생김 챙겨 줄 거 같아? 저쪽이야 꼬리 짜르고 뭉개면 그만이지만 난 아니야. 우리 집에서 소 팔아서 나 뒷바라지했는데 짤리면 어쩌라고. 불알 두 쪽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마누라랑 바로 이혼 각이다. 나 여기 오래 다녀야 돼.”
“그럼 우짭니까?”
“소나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인사이동이 얼마 안 남았으니 기다려 봐. 보직 옮길 때까지는 뭉개자고.”
일단 개기다 보면 담당 검사가 바뀔 테니 일단 기다려 보자는 주의.
고래 싸움에 피를 보느니 그냥 못하겠다 방치하면 되는 일 아닌가.
보신주의자인 신 검사다운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 검사의 생각일 뿐. 사건 진행이 지지부진하단 소식에 이억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아니, 검찰 놈들 행동이 왜 이렇게 굼떠. 위에 기름칠 안 했어?”
“일단 기소 의견으로 송치하긴 했습니다만, 신명부 그놈아가 워낙에 몸을 사려서, 사후 처리가 많이 늦는다네요.”
“뭐 그런 자식이 걸려가지고는. 그 새낀 왜 그런데 돈이 부족해서 그래?”
“먹긴 했는데 아무래도 부담스러워하는 거 같습니다.”
“이런 시발넘이. 그럼 존나 갈궈서라도 어떻게든 하라고. 강태준이 그 새끼 엮어 넣어야 할 거 아냐. 이참에 본때를 보여 줘야지.”
“그보다 형님. 근데 정말 이렇게 사건을 벌여도 되겠습니까? 형님 저 빵 가는 거 아니죠? 강태준 그놈아도 맞고소했던데.”
은근히 불안해하는 동생이 아니꼬운지 이억수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 새끼가. 애초부터 그러기로 합의해 놓고 왜 그리 말이 많아. 그럼 병원에 처박혀서 병자 시늉이나 하던지.”
“오, 진짜 그래도 됩니까?”
“호오, 아주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주랴? 임 비서 빠따 갖고 와!.”
“하, 형님. 스탑…… 말로 합시다. 말로!”
형을 피해 부리나케 도망치는 녀석에 이억수가 한심하다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새가슴 자식이 감빵이 무슨 대수라고. 저거 군대라도 보냈어야 했나?”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니 불안하겠죠. 이번 계획이라도 넌지시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좀 안심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동생을 두둔하는 수행비서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이억수였다.
“허, 설마 저놈은 입이 싸서 그릇이 안 돼. 그보다 인쇄 준비는 마쳐 놨나?”
“예. 시험 가동을 해 봤는데 충분하더이다. 명만 내리시면 반나절 안에 물량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됐어. 입단속들 잘해 놓고. 아무 때나 인쇄 시작할 수 있게 세팅 맞춰 둬. 숙직실에 담당자 상시 대기시켜 놓고. 알겠나 임 비서?”
계속 강조하는 이억기의 말에 수행비서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우리도 공신 되는 거야. 눈꼴 사나운 놈들도 이참에 죄다 끝장이라고.”
“헌데 사장님, 정말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겠습니까? 하두 루머들이 많아서.”
“우리 집안 큰 어른 중 하나가 이일주 참모장이신 거 알지. 이 내가 직접 들은 말이야. 빨갱이들은 깨끗이 쓸어 버려야지. 마침 좋은 선례도 있지 않나 버마의 아웅산 말이지…….”
“그래두 혹시라도 실패할 일은…… 없겠지요?”
“뭘 재수 없는 소릴. 그럴 일은 절대 없어야지.”
원래 호랑이 등에 올라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굴려 가며 돌아가는 사태를 관망하는 동안 1961년 사회는 극도의 혼란기에 진통을 앓고 있었다.
이만승 하야 후 정권을 잡은 장석운 총리는 1차 내각을 구성한 지 불과 2주 만인 9월 7일 각료 4명을 바꾸는 등 6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단행했지만, 여전히 혼란은 계속되었다.
원인은 도시 중산층과 영세사업자를 대신한다는 신파와 농촌을 주력으로 삼는 구파는 뚜렷한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로 권력 다툼에만 골몰했기 때문. 장석운은 총리 취임과 더불어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을 목표로 내걸고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한다 천명했으나 사회 불안이 가중되면서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불만 역시 점점 격화되었다.
“물가가 날이 새면 오르니, 경제는 뒷전이고 정치인들은 정쟁에만 눈이 벌게져서는. 구파고 신파고 맨날 쌈박질이여.”
“그러게 뭔 놈의 나라가 장관을 시도 때도 없이 바꾸는지. 내무부 장관이 이번엔 한 달 갔나.”
“장관만 바꾸면 다행이게. 그보다 허구한 날 데모나 하니 지긋지긋해 죽겠어.”
“그러게. 요새는 재미가 들렸는지. 국민학생들도 시위한다는군.”
“무슨 시위 말입니까?”
“선생님한테 전근 가지 말라 시위한다는군.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고. 육군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 시위를 하고 이제는 하다못해 경찰 놈도 월급 올려 달라 시위를 한다네.”
“배때가 불렀구먼 경찰이 시위라니 일은 안 하나.”
“데모하다 고소당하면 누가 책임져? 덕분에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삼 할이나 낮아졌다는군.”
“덕분에 깡패 새끼들이 이렇게 많이 보이는 거구먼. 허, 이만승 그 양반이 물러나면 세상 좋아질 줄 알았더니. 말세야 말세.”
이제 사람들은 끊이지 않는 데모에 슬슬 지쳐 가고 있었다.
장석운 정권이 들어선 이래 시위 참가자만 100만여 명. 매일 평균 7~8회 이상 반복되니 도저히 생활할 수 있지 않았던 것이다.
참다못한 사람들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를 할 정도니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
경제활동이 심한 타격을 받은 사회에서는 만성적 실업문제가 불거졌고, 물가가 폭등하며 각종 불만이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분노에 휩싸인 사람들은 가십거리에 더욱 열광했고 기자들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과도내각에서 신문 발행의 허가제를 없애고 등록제로 바꾼 이후 자유주의적인 언론 정책은 그대로 장석운 정권에 승계되었다.
억눌렸던 한이 많아서일까. 사람들은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이만승 정권의 흑막을 파헤치는 일에 열을 올렸던 잡지사들은 폭로전에 열을 올렸다.
창당과 결성에 대한 광고가 나오는가 하면 헐뜯고 비방하는 성명전이 난무하는 상황.
신문이나 권력이 백으로 통했던 과거를 상기해서인지 언론으로 노골적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모리배들이 판을 쳤다.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의 횡포로 사단 기능이 마비될 정도에 이르자 참다못한 5사단 사령관이 중대장급 장교들을 모아 두고 기자에게 금품이나 식사를 제공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지만, 사태는 심각할 정도까지 악화되었다.
자유가 방종으로 그리고 폭력으로 변질되기까지 고작 몇 달.
강태준도 그런 사이비들의 공격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종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한낮의 대혈투, 집단 패싸움 그 결과는]
[참전 용사에서 범죄자까지. 출판사 사주는 건달 출신?]
노골적으로 특정 회사를 겨냥한 찌라시에 노기철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치사한 놈들일세. 지들 표절한 건수는 쏙 빼놨구먼그래. 아주, 장작부터 지피려는 거구먼.”
“명예훼손이랑 모욕죄로 당장 고소 조치하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려는 홍사천 변호사에 강태준이 말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황색 언론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죠. 돈 먹이고 물타기 하는 거야 한두 개입니까. 관심 주면 더 물어뜯는 게 쓰레기들 특성이니. 당분간 물고 씹게 놔두세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정권이 바뀐 이후로 일간지 숫자가 열 배나 더 늘었잖습니까.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 봐야 돈만 요구하는 놈들이 태반일 테니. 헛심 빼지 마십시오.”
“말씀은 맞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경고장 정도는 보내 놓겠습니다. 적어도 자제는 하겠지요.”
거기까지는 말릴 생각이 없던 강태준이 뒤를 보며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을.”
“의욕이 넘치시는군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다니.”
“다 바라는 게 있어서가 아니겠나. 아무래도 우리 일을 잘 처리해야 유하 씨 스카웃 가능성도 커질 테니까. 어쨌든 한 대 맞았으니 돌려줘야지. 쓸 만한 하이에나를 구했나?”
그 말에 재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마침 적당한 녀석이 있더군요.”
“누구?”
“김신제 기자 말입니다.”
의외의 이름에 강태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