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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11화 (111/361)

111화 플리바게닝

“크흠…….”

뼈 있는 지적에 할 말이 없어진 이억수가 약간 불편했는지 녹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느새 식사를 반 이상 비운 강태준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저도 계속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쌍방 과실이니 불미스러운 일은 이쯤에서 덮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럼 대충 말로 때우겠다?”

“사실 사건 발단은 발해에서 우리 책을 표절한 건 사실 아닙니까. 계속 싸워 봐야 결국 변호사만 배 불려 줄 일, 굳이 서로 피를 볼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 체면상 그건 좀 안 되겠군. 내 아우 놈이 흠씬 두들겨 맞고 병실에 입원까지 한 마당에 이렇게 슬쩍 넘어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날 우습게 보겠나?”

“글쎄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 사장님께서는 꽤 수완 높은 사업가라 들었는데요. 우리 서로 솔직해지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쁘신 양반이 아무 이유 없이 절 만나자고 하시지는 않았을 테고, 목적이 배상비라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코웃음을 친 이억수가 빈정이 상한 듯 지껄였다.

“그렇게 따지면 적어도 1,000만 환은 받아야겠는데? 정신적 손해배상금도 포함해서 말일세.”

“요구 조건이 과하군요. 빙빙 돌리지 말고 이해 가능한 조건을 제시해 보시죠. 참고로 저는 인내심이 길지 않습니다.”

강태준이 똑바로 주시하자, 젓가락을 내려놓은 이억수가 강태준을 주시했다.

“뭐 그렇다면 톡 까놓고 말하지. 태동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어떤가. 그럼 나도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하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평호랑 달리 우리 쪽 선원들은 아무래도 원양조업 경험이 부족하니 이쪽에 와서 도움 좀 달라는 거지. 마침 태동에서 제2 지평호의 건조가 늦어지는 걸로 아는데, 그렇게 세월아 네월아 기다려서야 어느 세월에 돈을 벌겠나 단기로 이쪽 일도 맡아 보는 건 어떤가 말이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제안에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보고 그쪽 배를 타라고요?

“뭐 그렇게 되나? 일종의 스카웃 제의라고 할 수 있겠군.”

“그 말이 진심이십니까?”

“좋은 게 좋은 게 아닌가? 자네도 돈 벌려고 하는 일이니 비율은 태동보다 높게 쳐주지. 선장직은 백 프로 보장하지. 자네가 탈 배는 이걸세.”

강태준의 코앞에 보여 준 사진은 꽤 늠름해 보이는 배였다. 연식이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외관상으로는 깔끔한 것이 딱히 하자가 보이지는 않았다.

“태청호야, 비록 중고 선박이기는 무려 300톤급의 배지. 고작해야 100톤짜리인 제2 지평호와 체급을 비교하면 무려 2~3배나 큰 배지. 보합비율을 생각하면 어때, 구미가 당기는 조건 아닌가?”

강태준은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일전에 지평호로 첫 출항 때 얻은 성과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태준으로서는 영 미덥지 않은 소리기도 했다.

“갑작스레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군요. 게다가 고물 배랑 새로 건조하는 신규 선박은 안전이랑 운행 가능 횟수 등 세부 사안에서 차이가 큽니다. 관리 측면에서도 말입니다.”

“허허. 그렇게 너무 불신하지 말게. 껍데기만 빼고 싹 뜯어고친 배니. 운행에 지장이 없으면 그만이지 않나.”

“제가 굳이 발해원양으로 전직할 생각도 없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태동의 심 사장님께 신세도 졌던 터라. 도리상 배반할 생각은 없습니다.”

“허허, 자네도 야심 있는 남자 아닌가. 내 보기에 그 정도 의리파는 아닌 거 같은데, 어차피 자네도 추후 독립을 생각하고 있지 않나? 우리는 충분히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그거야 아직은 먼 이야깁니다…….”

“잘 생각해 보게. 난 자네와 상부상조할 것이 많아. 원양어선 사업 면허를 받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수출 쪽 인맥이 빵빵하니 영업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 듣자 하니 MSG 공장을 운영하는 중이라면 효율성 면에서 사탕수수가 필요하지 않겠나. 나랑 손잡으면 일이 무척 쉬워질 거야.”

“생각보다 남 일을 잘 아시는군요. 뒷조사라도 하셨습니까?”

“뭐, 뒷조사까지야. 이 업계야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소식 아닌가. 내가 좀만 힘쓰면 웬만한 어려움쯤이야 금방 정리할 수 있지. 물론 소정의 수수료 정도는 받겠지만 말이야, 더욱이 자네가 발해원양으로 온다면 임원직은 물론, 발해 원양 지분도 줄 수 있다네. 그 정도면 좀 혹하지 않은가?”

“지분이요?”

이억수가 손짓하자 머리에 붕대를 감은 비서가 서류를 들고 왔다.

“공증을 마친 서류일세. 자네한테 불리한 독소 조항은 따로 없을 걸세. 거기 사인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거지.”

“흠…….”

강태준이 찬찬히 서류를 살폈다. 발해원양 지분 3 프로를 양도하는 조건에 임원 대우까지. 비록 경영권에 관여할 수 없고, 지분매각은 10년간 제한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기는 하지만. 꽤 파격적인 조건은 틀림없었다.

“이렇게까지 대우해 주시겠다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능력 있는 인재는 예우해야지. 자네도 동기가 있어야 일을 더 열심히 할 게 아닌가. 자네가 이쪽 업계에서 나름 최고 인재로 통하는 몸인데, 이 정도 대우는 되어야지.”

강태준은 서류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내용상으로는 문제없을 조항이었다.

단 회사가 여전히 건재하게 유지된다는 조건하에서만 말이다…… 표면적으로라도 고개를 숙이고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판을 엎어 버리는 것이 좋은가.

약간 혹할 법한 조건이었지만 강태준은 속으로 웃었다.

‘지나가던 개를 믿지. 어디 이억수를.’

그래 처음부터 합의 같은 걸 할 생각 따윈 없지 않았다. 강태준은 그 자리에서 보던 서류를 그대로 북 찢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듯한 이억수. 강태준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따위 종이 쪼가리로 절 낚으려고 하신다면 많이 곤란한데요, 이 사장님? 잘못 봐도 너무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거절, 거절이라고?”

분노와 모멸감에 찬 눈동자에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그깟 보합율이랑 지분 몇 프로로 사람 낚으려고 하시다니 그건 날강도죠. 지분도 팔 수 있을 때나 돈이지, 안 그러면 종이 쪼가리나 다름없죠. 더욱이 사업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이익보다 신뢰가 우선 아니겠습니까? 근데 남 뒤통수 까기로 작정하고. 유령회사까지 만드는 분을 제가 어찌 믿습니까?”

“허허……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이군. 그럼 안타깝지만 자네 후배는 당분간 콩밥을 먹는 수밖에 없겠구먼. 그 인간도 이참에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지 않겠나?”

배로소 본색을 드러낸 이억수가 흐흐거리며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본성이지. 노골적인 협박에 강태준의 미소가 진해졌다.

“뭐 자네가 호의를 거절했으니 나도 봐줄 이유가 없지 않겠나? 굳이 벌주를 들이키겠다면 할 수 없지.”

“서로 피 보기 전에 적당히 양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양보? 하하! 웃기는 소리.”

불타는 눈빛으로 술을 벌컥 들이켠 이억수. 한쪽 입가가 삐뚜름해진 것이 가소롭다는 눈동자였다.

“그런 건 서로가 대등한 관계일 때나 하는 소리지. 자네가 어디 나랑 마주할 군번이던가? 알량하게 푼돈 좀 챙겼다고 세상 우습게 보지 말게.”

“두고 보면 알겠죠. 식사 잘했네요.”

옷매무새를 고치며 일어선 강태준이 탁자 위로 100환짜리 지폐를 내려놓았다. 화폐개혁 전 지폐였다.

“뭔가?”

“이건 식대입니다. 여기 분위기도 그렇고, 딱 이 정도 수준인 거 같아서 말입니다.”

“감히!!”

시립하던 비서진이 눈을 부라렸지만, 곧장 이억수에 의해 제지당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강태준을 향해 이억수가 경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태준이 자네 크게 후회하게 될 걸세!”

그러나 강태준은 이미 발걸음을 옮긴 뒤였다.

강태준이 음식점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인원들이 서둘러 소식을 물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합의한답니까?”

“합의는 무슨 뭐. 흐지부지되었지. 지 밑에 숙이고 들어오라더군. 지분 준다고 꼬시길래 웃기지 말라 했지.”

“지분이요? 그건 뭔 소립니까?”

“몰라. 누굴 호구로 아는지 모르겠군.”

오고 간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 어이없어했다. 사정을 듣고 난 춘삼이가 먼저 화를 냈다.

“개자식이군요. 누굴 지 졸로 아나?”

“잘하셨습니다. 그런 뻔뻔한 자식이 약속을 지킬 리가 없지 않습니까? 헌데 이렇게 되면 좀 골치 아프겠네요. 아무래도 단단히 삐졌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나를 엮어 넣을 생각인 모양이지.”

“그렇다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했군요.”

오재갑의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소득이 없는 건 아니지. 저쪽 의사를 확인했으니. 뭐 법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도 사건 봉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근거도 필요하지 않겠나. 아무튼 우리도 이제 전면전이야.”

“그러면?”

“저쪽에서 합의를 거부했으니 제대로 개싸움으로 가 봐야지. 홍 변호사님 서류 준비 끝나셨죠?”

“예. 준비 맞췄습니다.”

“일단 우리도 맞고소 진행하세요.”

최선의 방어는 결국 공격뿐. 없는 놈이라면 모를까.

필요하다면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 강태준의 결심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검찰로 이송된 직후, 김광필은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광필이는 침묵을 지킬 뿐, 가타부타 말을 아꼈다. 계속되는 묵비권 행사에도 수사관들은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여보세요 김광필 씨, 윗선에서 분명히 시켜서 한 일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하시면 형량을 줄여 줄 수 있다니까요.”

“저 스스로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오. 사장님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을 반 죽도록 패 놓고는 의도가 없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명료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누가 시켰습니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대를 마주 보던 광필이가 가만히 목소리를 낮췄다.

“혹 형사님, 내가 진심이었음 이억기 그 녀석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혹시 사람 죽여 봤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 소싯적에 땅개 노릇하면서 빨갱이 좀 잡았다 이거요. 거기서 배운 게 있소. 사람이 되게 쉽게 죽는다는 거요. 요 아래턱에서 조금 내려간 부분을 경동맥이라고 하는데, 탱크에서 운전병들이 나오면 곧바로 목부터 잡고 거길 땄거든. 손가락으로 경동맥을 콱 누르면 미친놈처럼 켁켁대면서 발작하는데 그때 목을 확 그어 버리는 거지. 그러면 돼지 멱따는 소리 내면서 거품을 물다 뒤진다 이거요. 꽥꽥 이렇게 말입니다.”

동물 흉내를 내는 것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살기가 어린 눈을 보니 반쯤 제정신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염통이 쫄깃해진 수사관이 등골이 오싹하다.

잠시 후, 고작 범죄자 따위에 쫄았다는 생각에 빈정이 상한 수사관의 말투가 험해졌다.

“야, 임마 좋게좋게 하니까 이게 눈에 뵈는 게 없나. 니가 지금 나 협박하나? 여기가 어딘지 몰라? 여기 검찰이야.”

“허이구야.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소? 내 그쪽 멱 딴다 협박이라도 했나? 거참 웃기는 양반일세.”

“뭐야? 이 자식이!”

“내가 당신 자식 할 군번은 아니니 그렇게 막 대하지 마시죠. 나 같은 사람이 목숨 걸고 싸운 덕에 댁 같은 양반이 이 자리에 있는 거 아녀? 참전 용사라고 예우는 하지 못할망정 최소한 존중은 해 줘야지. 아님 어디 돈 먹고 사주라도 받았나?”

“이 새끼가 그래도? 너 죄목이 지금 몇 갠지 알아, 주거침입에 특수폭행, 기물파손까지 한두 개가 아니야. 공갈 협박에 업무방해까지 추가되고 싶어?”

귀지를 파던 광필이가 후우 하고 손톱을 불었다.

“빵에 보낼 테면 보내 보시던지. 거, 쓸데없이 왜 잡설이 많으쇼?”

“뭐?”

“애초에 그쪽에서 출입을 허락했으니 들어간 거지. 저도 꿀릴 게 없단 말입니다. 집단으로 연장 들고 선빵 갈기는 건 괜찮고, 남의 책 베낀 양아치 놈들 족치는 건 죄라는 거요?”

“이 자식아. 말 똑바로 해. 사람 패고 집기 부순 게 죄가 아니면 뭔데?”

“그거야 정당방위지. 경찰이 태업하고, 치안국에서도 일을 제대로 못 하니 밥그릇 지키려면 자력구제라도 해야 할 것 아니요.”

“야 임마, 그따위로 하지 말라고 법이 있는 거야.”

“글쎄요. 제가 아직 사회 적응이 덜 돼서. 제가 그걸 잘 알면 이렇게 잡혀 왔겠습니까? 암튼 밥은 언제 나오는 겁니까. 하도 오래 앉아 있더니만 힘이 없어 말도 안 나오네. 거, 짜장면이라도 시켜 주소. 응?”

“미친놈이 여기가 동네 음식점이가? 짜장은 나가서 처먹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배고프다 꽥꽥대는 모습에 질린 수사관들이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결국 하루 만에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주자 불만이 입에 걸린 광필이가 툴툴대었다.

“아니, 뭔 놈의 짜장에 계란도 없소? 게다가 곱빼기라면서 양도 쥐꼬리만 하네.”

“시발, 이 새끼가 디질려고? 그냥 먹지 마!”

“아니 됐소이다. 줬다 뺏지는 마소.”

짜장 그릇을 품 안에 안은 채 걸신들인 놈처럼 먹어 치우는 녀석. 하도 맛있게 먹어 대는 통에 먹는 모습만 봐도 모두 군침이 나올 정도였다.

“야, 맛있냐? 이 상황에 그게 넘어가나?”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한디 좀 맛이 덜하네. 확실히 안 선생 요리랑 비교하니 급이 달라요. 역시 짜장은 용호루가 최고인데. 근데 만두는 따로 안 가져왔답니까?”

“이 새꺄. 이게 작작 좀 처먹어.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

“예이. 알겠습니다. 근데 수사관님. 저 잠 좀 자면 안 될깝쇼.”

“뭐?”

“아 여기서 자꾸 지키고 서 있으니까 신경이 쓰여서 도통 잠이 안 오지 뭡니까.”

“허 이게 진짜…….”

“아님 말고. 근데 저 잠 안 오면 말수가 없어지는 병이 있어서.”

함께 온 선임이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형사를 애써 말렸다.

“딱 2시간이다. 더는 편의 못 봐줘.”

“감사합니다.”

쩝쩝 입맛을 다신 김광필이 감사를 표하더니 구석으로 가서 꾸벅꾸벅 졸았다.

팔짱을 낀 녀석이 웃옷을 이불 삼아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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