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체포 영장
각목이 날아다니고 주먹이 오고 가는 육박전. 피 터지는 싸움에 바닥에 인쇄된 종이가 흩날리고, 터진 잉크가 굴러다니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완전 개판이 된 현장의 모습에 이억기는 할 말을 잃었다.
“사, 사장님. 아니 상무님 이제 어떡합니까?”
“나도 몰라! 일단 도망치자고.”
여기 계속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생겼다.
하지만 출입구가 막힌 터라 도망칠 곳도 녹록지 않았다. 이억기가 우왕좌왕하던 사이, 내던져진 사람 하나가 머리 위로 날아갔다.
“끄아아아아악!!”
붕 뜬 기계 위로 덩치가 떨어지자 와장창 집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리고, 튕겨 나간 아연판에 머리통을 얻어맞은 비서가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을 잃고 나자빠지는 비서에 대경한 이억기.
하지만 축 늘어진 녀석은 이미 의식이 없었다.
“임 비서, 임 비서! 임마! 정신 차려! 니가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잠시 후 쇠 파이프가 붕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이억기의 의식이 아득해지고, 잠시 후, 실처럼 끊어진 정신이 툭 끊어졌다.
* * *
그사이, 백경출판을 다시 찾은 강태준은 뒤늦게 광필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아니 그 녀석이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했다고?”
“예.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하시길래. 이렇게 연락이 두절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듣자 하니 벌써 사흘 넘게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꼴이 아닌가.
강태준이 어이없어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째 소식이 없는데, 윗선에 보고도 없이 뭉개다니. 방 과장 업무처리가 빠릿빠릿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거 실망이군. 이렇게 대책 없이 물렁한 사람이었나?”
“죄송합니다.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다고 의지가 워낙 크셔서, 차마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장님께 누가 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강태준은 한마디 덧붙이려다 멈추었다.
생각해 보면 방국진으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화를 삭인 강태준이 담담히 물었다.
“그래서 지금 김광필 국장은 어디 있나?”
“종로 모처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업자 놈들 꼬리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잔말 말고 빨리 복귀하라고 하게. 탐정 노릇은 이제 그만둘 시간이니까.”
광필이의 노빠꾸 기질을 아는 강태준으로서는 꽤 신경이 쓰였다.
설마 그사이 무슨 사고라도 친 것이 아닐까.
불안해진 강태준이 사무실을 서성이자 함께 온 설유하가 그를 다독였다.
“태준 씨도 너무 걱정 마세요. 광필 씨가 설마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겠어요?”
“그건 유하 씨가 그놈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 자식은 왜 안 오는 거야?”
강태준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 방문객이 찾아왔다.
“아, 안 된다니까요?”
“닥치고. 엉! 공무집행이야. 공무집행방해 몰라? 확 처넣어 버릴까 보다.”
한마디 해 줄 요량이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광필이가 아닌 사복 경찰관들이었다.
업장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죽잠바들은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종로경찰서 김만식 경사입니다. 강태준 사장님이죠?”
“예. 그렇습니다만.”
“참고인 조사차 경찰서로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여기 편집국장이신 김광필 씨가 종로 쪽에서 폭행 및 기물 파손 혐의로 입건되셨습니다.”
“광필이가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구체적인 사안은 직접 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애들아, 어서 정중히 모셔라.”
수갑을 든 형사들이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자 오재갑과 직원들이 서로 으르렁거렸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허, 공무집행 중이니 물러나 계십쇼. 그쪽도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아니, 갈 때 가더라도 무슨 이유인지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사이 설유하가 앞을 가로막았다.
“경사님, 다짜고짜 이런 행위는 곤란한데요. 임의동행이 아니라 체포인가요? 형사님들 행동이 완전 무법자나 다름없군요.”
“허, 댁은 뉘슈? 제삼자는 빠지시고. 거 아가씨랑은 관련 없는 일 같은데…….”
“아가씨라니, 말조심하세요. 난 사법관 시보인 설유합니다. 근데 강태준 씨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이렇게 범죄자 대하듯이 끌고 가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법관이요?”
당당한 설유하의 태도에 화들짝 놀란 경찰관들.
표정이 딱딱해진 설유하가 경찰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현행범도 아닌데 강제 연행하는 건 좀 아니죠. 참고인 조사라면 절차를 밟으세요. 이건 엄연한 공권력 남용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약간 위축된 경찰들을 돌아본 강태준이 양해를 구했다.
“저희도 사태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해서. 아무래도 지금 경찰서 출석은 당장은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
“네. 정 데려가고 싶다면 영장 갖고 오세요.”
설유하의 강경한 태도에 경관들이 눈빛으로 처음 문을 부순 상대를 욕했다.
설마 이런 회사에 법조인이 대기하고 있을 줄은.
떫은 감을 씹는 꼴이 된 이 경위에 강태준이 조용하게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거 같군요. 정식으로 출석요구서를 발부하시고, 출석 일자는 변호사와 일정을 상의해 본 뒤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만…….”
“그럼 진짜로 곤란한 게 뭔지 알려 드려야겠군요. 여어, 재갑아?”
“예! 형님.”
“파손된 기물 사진 제대로 찍어 둬. 이번에 파손한 기물과 관련해서는 정식으로 손해배상 청구 절차를 밟도록 할 테니.”
“아, 물러나겠습니다. 물러난다고요!”
“그럼 나중에 시간은 따로 통보하겠습니다.”
강태준의 강경한 반응에 형사들도 더는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깨갱하며 돌아간 형사들에 오재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요새 짭새 놈들은 저렇게 막무가내인가?”
“근본 없이 막 뽑으니 그렇죠. 그보다 이렇게 빨리 출동하다니, 이거 뭔가 냄새가 납니다.”
“광필이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빨리 변호사부터 선임해야겠군. 뭐 사고라도 쳤나, 아무래도 좀 싸하구먼.”
“법무법인 한성 쪽에 연락해 볼게요. 종로 쪽 형사 사건은 그쪽이 전문이니까요.”
“고마워. 유하 씨.”
설유하의 강태준은 곧장 변호사 선임계를 내고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변호를 맡게 된 한성법률사무소의 홍사천 변호사가 말했다.
“종로 쪽에서 발해출판이 불법으로 아동서적을 해적판으로 찍어 내는 현장을 급습했다는군요. 현장 확인 과정에서 패싸움으로 번진 것 같습니다. 강 사장님을 이번 사건의 피의자로 소환하면 불응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어서 일단 참고인으로 소환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저를 이번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는 거네요.”
“네. 아무래도 김광필 씨 단독 행위보다는 교사 여부에 무게를 두는 것 같아요. 다행히 알리바이는 확실하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꼬투리 잡힐 말은 절대로 배제하는 게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변호사와 대응 방안을 논의한 강태준은 설유하와 홍 변호사를 대동하고 종로경찰서를 찾았다. 강태준을 본 담당 형사가 반색하며 맞았다.
“아니, 강태준 씨, 참고인 조사 때문에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출석요구서도 못 받았습니다. 이번엔 김광필 씨 보호자 자격으로 면회 왔습니다.”
“흠, 김광필 씨라니? 피의자 면회는 곤란한데요. 아직 대면조사가 덜 끝나서 면회는 어려울 거 같은데.”
“불가능하겠습니까?”
“뭐 아예 안 될 것은 없지만, 마침 오신 김이니 참고인 조사부터 받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불편하게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기보다 말이죠.”
첫 만남에 데인 탓인지 태도는 몹시 정중했지만 의도는 뻔했다. 강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홍사천 변호사가 앞으로 나서 막았다.
“굳이 참고인 조사를 지금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서면 진술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허, 그건 좀 곤란한데요.”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뭐 면회를 허용하는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강태준이 홍 변호사를 돌아보자 변호사가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섰다.
“의뢰인께서 굳이 원하신다면…….”
“아이쿠. 그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왕 밀린 일은 빨리 해치우는 쪽이 편하지요. 자 이리로 오십시오.”
조사실에 도착한 직후 홍 변호사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형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어이, 변호사님은 물러서 계시지요. 참고인 조사 시 참관은 불가합니다.”
“원칙적으로 참고인이나 피의자도 민형사상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허 영감님, 알 만큼 잘 아시는 양반이 왜 이러십니까? 이래서야 조사가 되겠습니까?”
“이번만큼은 의뢰인 보호가 우선입니다. 참관이 안 된다면 추가 조사는 거부하겠습니다. 듣자 하니 일전에 불미스러운 사태가 있었으니까요.”
홍사천은 저번의 임의동행 건을 들먹이며 깐깐하게 나왔다. 홍 변호사가 끝까지 물러서지 않자 결국 포기한 것은 형사들이었다.
“어휴, 알겠습니다. 대신 조사 시 방해는 엄금입니다. 옆자리에 떨어져서 조용히 앉아 있으십쇼. 방해된다면 변호인이고 뭐고 바로 내보낼 테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지요.”
그제야 강태준을 앞에 앉힌 형사계장과 문답을 시작했다.
대체적인 문답의 목적은 사실관계 확인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강 사장님께서는 이번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 중대한 경영상 판단 이외 사소한 업무를 관리하기에는 벌이는 사업도 한두 개가 아닙니다. 사장이라고 해서 모든 업무를 다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허, 참. 그쪽이 회사 대표자 아닙니까? 이런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모르고 계셨다니 그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사주를 받고 진행했다면 몰라도요.”
“이번 사건과 관련된 사태는 업무 범주 밖에 벌어진 일입니다. 실제로 제가 서울에 올라온 지 만 하루밖에 안 된 상황이고요. 김광필 국장과 며칠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제가 부득이하게 상경한 것입니다. 그사이 구체적으로 뭘 하라 지시를 내리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긴 합니다만…….”
몇십 분간 꼬치꼬치 캐묻는 형사였지만 강태준은 계속 슬기롭게 넘겼다.
딱히 증거도 없는 데다 알리바이도 확실한 만큼 엮어 넣을 건덕지가 전혀 없었던 것.
참고인 조서를 재차 확인해 본 형사가 김샜다는 듯 투덜거렸다.
“쩝, 정말로 별것 없군요. 그냥 일찍 오시지 그랬습니까?”
“순순히 왔으면 이렇게 훈훈하게 끝났겠습니까? 지금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고 있었을 거 같은데.”
“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저희도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닙니다.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건과 무관한 사람에게 임의동행 형식으로 올가미를 씌우려 해선 안 되지요, 공무원이라면 최소한 필요한 법 집행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뼈 있는 말에 형사가 민망한 듯 헛웃음을 짓자 강태준이 말했다.
“어쨌든 전 약속을 지켰으니 그쪽도 약속을 지킬 차롑니다.”
“뭐, 잠시만 기다리십쇼. 광필 씨는 옆방 면회실에 있으니까요.”
순순히 협조해 준 탓일까.
형사도 강짜를 부리지 않고 순순히 광필이에게로 안내해 주었다.
그 말대로 광필이는 가장 안쪽의 조사실에서 면담 중이라고. 강태준이 양해를 구했다.
“저,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저희끼리 할 말이 있어서.”
“그건 좀 곤란한데…….”
“사실관계 확인이야 끝나지 않았습니까. 식사라도 하고 오시죠.”
“허, 거참. 그거참 안 되는데.”
봉투 하나를 몰래 찔러 주자, 헛기침을 한 형사가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야들아 슬슬 출출한데 고기라도 먹자고.”
“오, 몸보신할 타이밍입니까?”
강태준 일행이 텅 빈 조사실 안쪽 면회실로 들어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