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작업실 습격
의뢰가 들어왔으니 하는 척은 하겠지만 형사들 입장에서는 별반 의욕이 없었던 것.
빨갱이나 간첩 사건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이런 걸 잡아 봐야 실적이 오르지 않는 만큼 열심히 할 유인이 없다. 덕분에 강태준만 골치 아파졌다.
“경찰서 쪽에서 연락은 안 오나?”
“또 허탕이라는군요. 찾아가 보니 창고만 버리고 튀었답니다.”
제보자를 구한다고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한 달이 지나도 아무 성과가 없었다.
막상 제보가 들어와서 나가 봐도 이미 순식간에 빠져나간 뒤였다고.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광필이가 연이어 투덜거렸다.
“아놔, 이 자식들이 겁나 잘 도망다니는구만.”
“그러게요. 이렇게 찾아서는 해서는 끝이 없겠군요. 거의 숨바꼭질 수준이니 말입니다. 소송을 하려고 해도 주소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이거 단단히 걸린 거 같은데. 이쯤 되니 확신이 드는군. 못 잡기보다 안 잡는 게 분명하이.”
강태준의 의미심장한 말에 총괄과장인 방국진의 눈빛도 달라졌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경찰 쪽에 끄나풀이 있는 게 확실하단 말이지. 책이 이 정도 수준으로 풀릴 정도면 규모가 상당한 업체일 텐데, 이 정도까지 안 잡힌다는 게 말이 되나. 어디서 뒷배가 없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허.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지만 정말 그럴까요. 근데 고소장까지 내고 벼르는 마당에 간 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자 광필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거참 순진하시구만. 법보다 주먹이 우선인 세상인디 무슨. 판결이 나올 즈음에는 이미 끝나 있겠지요…… 시간을 끌다 한탕 벌어먹고 나중에 발뺌하면 그만이니까.”
“허 동업자들 간에 어찌 그런?”
“뒤에서는 나랏님 욕도 하는데, 동업자 정신은 무슨. 아무래도 안 되겠다. 광필아 넙치 형님한테 사람 좀 보내 달라고 해.”
“본격적으로 가 보시게요?”
“이 부분은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아는 애들 좀 불러 모아야겠어. 광필이 니 혹시 육군방첩대 놈들 중에 혹 지금까지 연락하는 놈들 있나?”
“네.”
“혹시 시간상 여유 있는 놈들은.”
“군바리가 사람 죽이는 거 빼고 잘하는 게 뭐 있습니까. 요새 군인 봉급이 워낙 짜서 퇴직 후 노는 놈들이 태반이죠.”
“그럼 딱 좋네. 부업으로 알바비 쎄게 준다고 하고, 몇 놈 섭외해 봐.”
꼬리가 길면 무조건 잡히기 마련. 육군방첩대 인맥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추적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간 서울 일대를 뒤지다 보니 방첩대 하사관 요원 하나가 요긴한 정보를 물고 왔다.
정보를 가져온 것은 예전에 김광필과 군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최만수라는 녀석이었다.
“대충 꼬리는 잡았나? 최 중사?”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종로 쪽이 의심스럽습니다.”
“종로 쪽?”
“네. 서점가 놈들이 말을 아끼더라고요. 제가 눈치 하나는 최고잖습니까. 짱나서 제대로 말 안 하면 손 좀 분질러 주겠다고 윽박질렀더니 대충 불지 뭡니까?”
“종로, 종로라. 뭔가 느낌이 오는데?”
강태준에게 허가를 받은 김광필이 본격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잠복 수사 3일째, 수상하게 생긴 트럭 한 대가 서점가를 도는 것이 보였다.
“저거, 저거입니다.”
“따라가 보자고.”
모르는 척, 트럭을 미행해 보니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어느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폐건물에 으슥한 장소를 보니 수상쩍음이 증폭되는 광필이었다.
“이 새끼들 본거지인가? 차량 번호까지 가리고 간 거 보니까 이게 맞는 거 같은데.”
“보초까지 두고 아주 본격적인데. 냄새가 나, 냄새가.”
“다들 책 읽을 면상은 아니네요. 도화지인가. 팔에 뭐 저런 걸 그려 놨답니까.”
팔에 이상한 문신을 한 녀석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책과는 담을 쌓았다.
각목과 쇠 파이프를 든 채 보초를 선 자들이 서성이고 있다.
면상부터가 험상궂은 놈들이 삼삼오오 모인 모습에 광필이의 눈이 이내 커졌다. 놈들 뒤편에 세워진 차량 위로 특별한 엠블럼이 보였던 것이다.
용마루에 놓을 법한 치미에 차 위에 올려진 것이 새가 주둥이를 내민 형상을 연상케 했다.
“아니, 저건 발해출판 마크 아닌가?”
“아, 형님께서 아는 곳입니까?”
“이억수 이 자식 제 버릇 못 고치네. 뒤에서 이렇게 개짓거리를 하고 있을 줄이야.”
눈치 빠른 광필이는 돌아가는 사정을 금세 파악했다. 강태준을 부를까? 잠시 고민을 하는 동안 째깍째깍 시계가 돌아간다. 광필이가 명했다.
“야, 최 중사, 근처 애들. 무전 쳐서 당장 불러와라. 여기가 맞는 거 같다.”
“아니, 형님. 한따까리하시려고요? 지원군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임마, 이런 건 속전속결이야. 알아서 불러와. 이 형님은 먼저 올라갈 테니까.”
“형님!”
말릴 새도 없이 광필이가 뒷짐을 진 채 휘적휘적 앞으로 나섰다. 골목 밖으로 나온 얼굴에 보초들이 경계 섞인 표정을 하자 뒷짐을 진 광필이가 엣헴 소리를 냈다.
“어이, 이리 오너라.”
“아니, 댁은 뉘슈?”
“여기 볼일 있는 사람일세. 내 좀 들어가도 되겠나?”
보초를 서고 있던 덩치들이 김빠진 소리를 냈다.
“댁이 누군질 알아야 들이든 말든 하지. 형씨.”
“그러게. 양반놀음은 저기 가서 하라구.”
“허. 이놈들이 감히 지금 뉘 안전이라고?
“이 인간 보게, 당신이 누군지 알아야 내 아는 척을 할 거 아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쉽게 내쫓지 못하는 건 광필이의 차림 때문. 맞춤 양복에 빽구두를 신은 것이 꽤 부티나 보인다. 수군대는 덩치들이 움찔하자 윗대가리로 보이는 녀석 하나가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거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선생님?”
“난 최무한일세. 뭐 구체적으로는 알 바 없고, 이 사장 안에 있나?”
거드름을 피는 광필이에 칼자국이 난 녀석이 약간 표정이 굳었다.
“그건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
“확인할 수 없다니? 난 이 일대 땅 주인인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허! 내 땅에 건물을 무단으로 썼으면 임대료를 내야 할 게 아닌가? 뻔뻔하기는!”
광필이의 호통에 혼란에 빠진 녀석이 되물었다.
“땅 주인이라니, 그게 뭔 말입니까? 이 일대 땅 주인은 피랍되었다고 했는데?”
“내가 그 집 아들일세. 이번에 논의할 게 있어서 왔는데 이 사장 불러 주쇼!”
혼란스러워하는 깡패들의 얼굴이 희한해진다.
애초에 지어낸 이야기니 당연히 뻥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할까 속닥거리는 모습에 광필이가 불편하다는 듯 면박을 주었다.
“거, 논의할 게 있으면 그냥 대놓고 떠드시게. 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나?”
“잠깐만 기다리십쇼. 일단 위에 가서 사실 확인부터.”
“뭐. 이 사람이! 나랑 장난하나. 난 그렇게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설마 이렇게 객을 대우하는 건가?”
“자자. 일단 사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자 안내하게!”
광필이가 휘적휘적 위로 올라가자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무섭게 위잉 소리와 함께 독특한 잉크 냄새가 풍겨 나왔다.
대형 동판프레스가 돌아가고, 쉴 새 없이 인쇄기가 돌아가고 있다.
광필이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통 안에 아연판을 산화액에 담겨 있었다.
‘아니, 여기서 쥐새끼처럼 숨어서 이딴 거나 만들고 있었네. 하!’
본격적인 범죄 현장에 어이없어할 즈음 상념을 깬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니 어떤 놈이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 땅 주인이라니! 그딴 게 어디 있어?”
“아니 분명히 올라오신 분이.”
“나야 임마. 기억 못 하냐. 대머리?”
광필이가 눈을 맞추자 씨근덕대며 오던 이억기의 눈이 커졌다.
걸어오던 그 자세로 우뚝 멈춘 이억기가 삿대질을 하며 놀랐다.
“네놈이 여긴 왜!”
“우리 구면이지? 보아하니 숱이 많이 줄었구먼. 삭아서 못 알아볼 뻔했네.”
“아니 이 새낀 여기 왜 왔어? 땅 주인이라는 놈이 설마 이 자식?”
“예? 아닙니까?”
“이런 멍청한 놈, 신분 확인도 안 하고 들여보내? 저 자슥은 강태준이 따까리잖아.”
“예? 그게 무슨?”
난처해하는 모습에 광필이가 실실 웃으며 뚜둑 손깍지를 꺾었다.
관절에서 뚝 뚝 소리가 나자 이억기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오, 억기야 너 많이 컸다. 사장님 소리도 다 듣고 근데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임마 이렇게 대놓고 베끼면 형이 뭐가 되니? 응?”
“임 비서!”
“자, 뒤로 물러나십시오.”
앞을 버티고 선 덩치들에 자신감이 생긴 이억기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강태준이가 보냈나?”
“글쎄, 내가 시킨다고 하는 사람으로 보이냐?”
표정부터 달라진 광필이가 진지한 어조로 경고했지만, 이억기는 여전히 나불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 그러셔? 그럼 그 대단하신 형님께서는 지금 뭐 하고 계신대? 우리 잘난 동생이 피곤죽이 되게 생겼는데 말이야.”
“나 혼자 이런 양아치들 상대 못 할 거로 보이냐?”
“지랄은. 간덩이가 부었구먼.”
그 말에 같이 있던 덩치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손 좀 봐 줘라. 적당히 버르장머리 좀 고쳐 줘야지. 똥오줌 못 가리는 망둥이 자식은 아주 피똥을 싸게 해 줘야지.”
“맘대로 패도 됩니까?”
“마음대로, 대신 죽이지만 마.”
고개를 끄덕인 부하들이 사방에서 몸을 풀며 주위를 포위했다. 건들거리며 손발을 터는 깡패들의 행동에 김광필이 이죽거렸다.
“아, 개졸렬하네. 사람 한 명 가지고 떼로 덤비는 거 안 쪽팔려? 니들은 존심도 없나?”
“존심 같은 거 안 키웁니다. 명령은 명령일 뿐. 댁에 유감은 없습니다.”
“얼씨구. 댁 부모가 겁나 자랑스럽겠수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푸는 깡패들에 긴장감이 흘렀다.
잠깐의 탐색전 직후, 옆에 있던 감광통을 확 밀어 버린다. 갸우뚱하는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은 다음, 그대로 바닥에 메다치는 광필이.
순식간에 몇 명을 무력화시킨 김광필이 이억기를 향해 그대로 박치기를 넣었다.
“어억!”
깨진 코를 부여잡고 빽 소리를 질렀다. 뒤로 물러선 김광필은 복싱을 하듯 달려드는 녀석들에 잽을 꽂아 넣었다.
쓰러진 비서가 이억기를 부축해 올리는 순간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어흑, 시팔. 아, 내 코, 내 코!! 피, 피잖아.”
피를 본 이억기가 발광하자 각목과 쇠 파이프를 든 깡패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코피를 본 이억기가 이를 빠득 갈았다.
“저, 저 새끼 당장 담가 버려!”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 일대 다의 상황이었지만 전직 특전사답게 엄청나게 잘 싸웠다.
하지만 인원이 인원인 만큼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코너에 몰린 광필이의 등 뒤로 몽둥이찜질이 떨어지려는 찰나, 와장창 소리와 함께 지원군이 등장했다.
최 중사가 나타난 머리를 빡빡 민 전직 군인들 한 소대와 함께.
손잡이가 달린 톤파를 들고 나타난 최 중사가 눈을 흘기며 쌍절곤을 던졌다.
“아니, 형님부터 먼저 재미 보면 어떡합니까?”
“임마, 빨리도 왔구먼. 아그들아. 이제부터 제대로 붙자고.”
광필이가 휘릭, 곤을 돌리며 신호를 보내기 무섭게 상대의 뚝배기를 깨는 최 중사.
군인들도 와- 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힘 대 힘의 대결.
깡패들과 전직 군인들이 치고받기 시작하자 출판사 안은 그야말로 전쟁터로 변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