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유령회사
대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억수에 떨떠름한 이억기였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대놓고 베끼는 건 좀.”
“어허, 참조만 하자는 거지. 참조만. 그 누구냐? 소크라테스 양반도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안 했나?”
“하지만 형님, 그러면 뒷감당이 좀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백경출판 거기 사장이 강태준이잖습니까. 그놈 성격 아시잖습니까. 열 받으면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받는 거.”
그리고 그 말은 소크라테스가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인데…… 웅얼거리는 소리에 이억수가 동생의 뒤통수를 갈겼다.
“억 왜 때려요!”
“에이, 쫄보 자슥이 대가리는 어따 뒀어? 대충 바지사장 하나 세우고 유령회사 만들면 그만 아냐? 요새 개나 소나 출판하는 거 몰라?”
“그러면 나중에 소송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임마. 구덩이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그땐 파산시키고 나르면 되지. 없는 회사에 어떻게 손해배상을 청구해?
“아, 그런 방법이 있겠군요.”
“에구 상무라 된 놈이 일일이 떠먹여 줘야 돼? 빨랑 움직여, 당장!”
이억수를 피해 부리나케 자리를 피하는 이억기. 씩씩거리던 이억수가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직도 철이 없구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짬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실력이 부족한 분은 아닙니다. 점점 달라지시겠죠.”
“허 억기 저놈이 사람 구실을 해?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난 그런 기대는 없어.”
“그래도 같은 핏줄 아닙니까? 너무 평가가 박하십니다.”
“객관적인 거지. 그보다 군에서 온 소식은 어떤가? 알아봤어?”
“생각대로 군부도 불만이 팽배하다고 하더이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인사 개편 때 칼바람이 몰아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자른다던가?”
“최소 30프로 이상? 군 병력은 미국 눈치 땜에 감축이 어려우니 일선 장교들이라도 쳐 낼 심산인 듯합니다.”
“아니 공산당과 체제대결을 하는 상황에 숙군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일단 군부가 비대한 건 사실이니 적정한 선에서 조율하겠죠. 일단 이만승의 잔재를 씻어 내려 들지 않겠습니까? 겸사겸사 논공행상도 하고 말이죠.”
“야당 놈들이 뭐한 게 있다고. 병신 같은 것들이 잿밥에만 관심 있고 말이야.”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머리를 굴렸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민의원이니 참의원이니 그런 거 다 허깨비일지도 모르겠어.”
“예?”
“거수기나 할 초선 따위에 목매지 말고. 군바리들 동향부터 면밀히 봐.”
“아니, 여기서 더 말입니까?”
이억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지껄였다.
“삼국지 못 봤나? 난세엔 영웅이 출현하는 법이지. 신파니 구파니 이전투구만 하고 있으니 혹시 모르지 않나. 이러다 누가 정권을 채가도 이상하지 않아. 예를 들면 쿠데타가 벌어진다거나 하면…….”
“설마 군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밥그릇 뺏기는 마당에 무슨 짓인들 못 하겠나. 딴 놈들 아니고 빨갱이 잡던 군바리들이. 그냥 순순히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야.”
사람은 자기 밥그릇이 털릴 상황이 되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억수의 그 말에 진지해진 비서가 되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육군방첩대(CIC)에 꽂아 넣은 놈들 있잖아. 군 내부 사정부터 면밀하게 알아봐. 아마 모르긴 몰라도 머리 잘 돌아가는 녀석이면 분명 야심이 있는 놈이 있을 거야 어쩌면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돈을 병신들 아가리에 넣느니 차라리 다 뒤엎어 버리는 게 낫지.”
그래…… 권력은 결국 총구를 가진 놈한테서 나온다.
그간 상납한 대금을 뽑아먹을 때.
음험하게 번뜩이는 눈앞 연초에서 뿜어낸 연기가 희뿌옇게 달아올랐다.
* * *
[장석운 국무총리 탈당계 제출, 정치판도 바뀌나]
[부정 축재자 처리법 민의원 통과, 부패 청산은 시대의 요구]
이에 맞서 1961년 1월, 경제계에서는 북한 사회에 이익을 주는 부정 축재 처리가 되지 않도록 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상의, 무역협회, 방직협회, 건설협회 등등이 연합해 공동성명을 낸 가운데, 남양사 회장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대한경제협의회에서는 민의원을 통과한 부정 축재 처리 법안에 대해 작심하고 비판을 쏟아 냈다.
“북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경제 번영이라면 이 반자본주의적 법안의 통과는 북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민의원에서 통과된 부정 축재 처리법은 기업의 손발을 묶고 민족자본을 흐트러뜨리는 악법으로…….
결의서의 내용은 분열을 조장하지 말고 자본에 대한 탄압을 멈추라는 수사로 가득했다. 공산혁명을 운운하는 신문 기사에 김광필이 놀랍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야, 엄청 세네. 이거 화끈한데요.”
“매카시즘이니 뭐니 말이 많더니만…… 또 빨갱이 놀음인가.”
“그놈의 빨갱이 타령은 이제 지겹지도 않나 봅니다.”
북에서 탈출한 노기철의 입장에서는 역겹기 그지없는 소리. 강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좀 지겹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진부하긴 해도 일단 사람들 뇌리엔 직빵으로 꽂히니까. 재계가 호구도 아니고 일단 정치권에서 달라는 대로 줄 수는 없지 않나.”
“그게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듣자 하니 민 의원 쪽에서 부정 축재 특별조사위까지 구성했다는데요.”
하지만 이해관계서 자유로운 강태준은 코웃음 칠 따름이었다.
“전부 쇼하는 거지. 정의 구현 따위에 실제 관심이 있을 놈이 어디 있겠냐. 다 신 대다수가 새로운 정권에서 정치 자금이 필요해서지. 그보다 거 우리 쪽은 문제없지?”
“당연하죠. 먼지 한 톨 안 나오게 회계 장부랑 서류 정리해 뒀습니다.”
“잘했어. 그래도 기업에 분담금 할당 요구가 있을지 모르니 따로 액수는 빼 둬. 너무 안 내도 타겟이 되니 말이야.”
“옙.”
“그보다 춘삼이는?”
“밖에 나갔습니다. 요새 동화서적 표절 사안이 많아져서 아무래도 검수할 게 있다고 하네요.”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방국진과 함께 온 춘삼이가 상자를 내렸다. 종이상자를 열자 아직도 포장지도 뜯지 않은 동화책들이 한가득이었다. 김광필의 눈이 커졌다.
“아니, 뭘 그렇게 많이 가져왔나?”
“이번에 새로 나온 신간들입니다. 표절 의혹이 있는 것만 따로 가져왔습니다.”
책들을 보아하니 디자인부터 그림체까지 강태준이 만든 책을 대놓고 참고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늘고래가 대 히트를 기록하자 다른 출판사 쪽에서도 아류작을 부랴부랴 찍어 냈던 것이다. 내용물을 확인한 오재갑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쩝. 오지게들 따라 복제하네요. 예상은 했지만 이건 좀 심한데요.”
“어중간한 건 냅 둬야지 별수 있나. 원래 돈 되는 곳에는 파리가 꼬이는 법이지.”
“근데 딴 건 몰라도 이 책은 좀 선 넘지 않았습니까. 이거 우리 회사 제품이랑 거의 똑같습니다.”
“어. 이 새끼들 보게. 아예 똑같이 그렸네.”
문제의 도서는 포현출판사라는 곳에서 나온 서적. 하늘고래와 유사한 동화책들이 시중에 왕창 쏟아져 나왔지만, 이번에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백경 출판사에서 상표로 내건 일각 고래 문양까지 거의 비슷하게 베껴 낸 것이다.
광필이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이 새끼들 선 넘네. 배치랑 색감만 약간 다르고 완전히 판박인데 말입니다.”
“대놓고 복제한 수준인데요. 어디서 이런 그림작가들을 구했지? 가격이 저희 판매가에 절반도 안 됩니다.”
“재주도 좋구먼.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떡제본이라지만 그 가격에 맞추려면 아마도 그림쟁이들을 갈아엎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루뻬로 종이 표면을 유심히 살핀 방국진이 이마를 좁혔다.
“아, 이거 속지는 중질지로 대충 긁었구먼요. 탈산에 중화처리도 안 했어요. 표백제에 대충 넣었다 뺀 게 전붑니다.”
“애들 건강에도 좋지 않을 텐데 아주 양심도 없구먼.”
보기에는 흰색이라 좋아 보이지만 이런 저급의 종이는 시간이 지나면 황 변화가 쉽게 일어난다. 리그닌 함량이 높아 변색과 열화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고 품질도 좋아 보이는 만큼 일반인들로서는 구분이 어렵다.
해적판은 엄청나게 팔려 나가며 하늘고래 판매량이 지장을 주자 강태준 일행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포현출판사라고 했지? 위치는 알아보았나?”
“예. 알아보긴 했습니다만 당최 어딘지 잘. 출판사 등록만 해 놓고, 위치가 제대로 안 나옵니다. 그게. 주소지로 갔더니 공터뿐이던데요.”
“공터라고?”
“네. 주변인들한테 수소문해 보니 애저녁에 없어진 건물이랍니다. 폭격 맞아서 홀랑 타 버렸다고. 아무래도 주소지는 가짜인 거 같습니다.”
춘삼이의 답에 광필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구청 놈들이 불탄 건물에 인가를 내줬다는 말이오? 이거 어이없네.”
“귀찮으니 가 보지도 않고 대충 사인했겠지. 사업자 등록용으로 등재하는 데는 등기부 등본만 제출하면 되니까. 뇌물 주면 어지간한 건 눈감아 주니 말이야.”
강태준의 말에 광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제기랄, 그럼 어쩝니까? 작정하고 유령회사 하나 만든 거 같은데? 일단 경찰 쪽에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심으로? 실적도 안 나는 일에 끼어들 인간이 어디 있나. 아마 찾는 시늉만 하겠지.”
“그러믄요?”
“일단 법적으로 쓸 수 있는 수단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지.”
강태준은 서울 민사 지원 쪽에 근무 중인 설유하를 찾아가 사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야기를 듣던 설유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흠. 이거 확실히 심각하네요. 대놓고 해적판을 내놓는 회사라고요?”
“네. 아무래도 작정하고 벌이는 일 같은데 법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까?”.
“글쎄요. 확답드리기 어렵군요. 지재권 침해배제랑 예방청구권을 피보전권리를 출간 금지를 신청할 수는 있지만, 사실 실효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국내에는 마땅한 판례가 없거든요.”
“판례가 없어도 관련 법조문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간 출판 금지 가처분은 몇 번 내려졌던 걸로 아는데.”
“글쎄요. 그건 국보법상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경우가 절대다수고 저작권법을 어겨서 기소된 경우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지금 저작권법 개정안은 일본법 베이스에 베른협약의 내용이 일부 가미된 수준에 불과하거든요.”
“그럼 조문이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까?”
“구색 맞추기로 만들긴 했지만 거의 사문화된 수준이랄까요. 게다가 국내법원도 워낙 일손이 딸려서. 표현 기법 같은 부분까지는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거기까지 인정해 버리면 일이 너무 많아져 버리니 말이지요.”
“그럼 법원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보아하니 이번 사안과 같이 클리셰나 참고 수준을 넘는 표절행위에 대해서는 충분히 제재를 검토할 수 있지요. 특히 이번 사안처럼 작화 스타일, 채색, 구도까지 거의 동일한 수준이면 말이죠. 다만 가처분이 인용하려면 집행관 쪽에 책과 인쇄용 판을 넘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상 문제가 있어요. 거기에 인지대랑 송달료도 꽤 들 텐데 괜찮겠어요?”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요. 일단 고소장부터 제출하고 수사 의뢰부터 하죠.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최소한 위하력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아요. 최대한 빨리 수사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강태준은 부경변호사사무소를 통해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하지만 수사 속도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