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06화 (106/361)

106화 흥행과 그림자

“사장님 책이 벌써 완판되었답니다!”

“뭐? 벌써? 그럴 리가 있나?”

“어떤 서점은 반나절 만에 다 나갔답니다. 엄청난 인기라는데요. 지금 주문이 마구 쇄도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방국진 과장이 침을 튀길 정도로 동화책은 엄청나게 호평이었다.

강태준의 예상보다 더 이런 일에 목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수집가라는 족속들은 누구보다 사태를 빨리 파악하기 마련이다.

‘반응이 이 정도라니. 좀 떡밥을 거하게 풀었나. 이거 한, 천 부는 더 풀 걸 그랬군.’

보진당 백 영감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수집가들의 욕구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한영 혼용 양장판에 초판 인쇄본이라니.

화려한 풀컬러 원색에 국내 전문가의 검수를 맞춘 신간이라니.

수집가들은 확신했다. 이건 백프로 돈이 된다!

그래서 며칠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고 번진 것이다.

2쇄, 3쇄도 순식간에 팔려 나가게 되자 안달이 난 책방들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주문을 받은 백경출판에서 미친 듯이 증쇄를 했지만, 주문량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초판 가격이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프리미엄만 100달러가 넘게 붙었다는군요.”

“그래서 지금 주문량이 얼마나 들어왔지?”

“무려 일만 부가 넘습니다. 지금 출고 예약된 건수만 그 정도입니다.”

“그건 의미 없지. 예약이야 언제든 취소할 수 있으니 일단 선금 주는 데부터 먼저 돌려.”

아동용 그림책이 대 히트를 치자 백경출판의 인지도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오랜만의 대 히트에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졌는지 연신 호의적인 기사를 쏟아 내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책, 어린이를 위한 동화 열풍!]

[감수성과 흥행 모두 잡았다.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것.]

하늘고래 보셨나요?

올 연초 최대 화두는 단연 하늘고래다. 고래가 하늘을 난다는 동화적 상상력에 압도적인 퀄리티로 무장한 이 책은 매 증쇄본마다 무서운 속도로 팔려 나가고 있다. 명동서점 총괄과장은 이런 일에 특별한 소회를 느낀다고 말했다.

“하늘고래요? 없어서 못 팔죠. 제가 수많은 책을 팔았지만, 올해처럼 어린이 동화책이 계산대 앞에 놓인 경우는 생전 처음입니다. 이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죠.”

서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계산대 앞은 소위 베스트셀러만 놓일 수 있는 자리.

이런 특등석을 동화책이 차지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하늘고래의 흥행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초판본은 고작 300~ 400부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나 다 팔리는 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고, 2쇄, 3쇄는 나오는 즉시 매진되었다고 할까. 백경출판사에서는 이미 10쇄까지 증쇄에 들어간 상태. 해당 동화책은 이미 누계 판매 3만 부를 돌파했다.

출시된 지 고작 3달. 동화책으로서 이 정도 기록적인 수치는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대로 싸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동화책의 인기 비결은 대체 무엇일까.

아래는 소설의 팬이라는 어느 독자들의 감상이다.

“저는 사실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에요. 근데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은 그림만 봐도 이해하기 쉽거든요. 표정이 풍부해서 이입하기 좋고요. 이번에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싶어, 글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읽다가 울 뻔했습니다. 떨어졌던 아기고래가 부모와 상봉하는 장면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저희 부모님도 이북에 있을 텐데 지금 살아는 계실지. 애들 동화책이지만 의미도 있고, 짜임새도 좋습니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등 각 대도시까지.

소설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증쇄본이 풀리는 당일 서점 앞 아이들과 어른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는 진풍경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흥행의 요인에 대해 백경출판 김광필 편집국장은 동화 원작자인 마송해 작가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과 백종섭 화백의 수준 높은 그림이 만나 극적인 효과를 낸 것 같다 언급했다.

출판 경쟁이 치열해진 요즘 순수 창작 동화책의 등장은 깊은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전집 경쟁이 불이 붙은 지금, 단순한 장식을 넘어 진짜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것이야말로 출판시장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길 아니겠는가.

단순한 복제를 넘어 작품의 차별화가 필요한 시점. 아동문학의 새 지평을 연 백경출판이 앞으로 어떤 역사를 열어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광복일보, 박상원 기자

하늘고래의 흥행은 몇 달이 넘도록 식지 않았다. 반년 넘게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고 완판되자 어린이 동화책의 매진 행렬에 기존 출판사들 역시 충격이라는 분위기.

아예 현실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화적 변방인 한국은 당시 창작동화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

이런 와중 안전한 고전소설 번역을 넘어, 저작료의 부담이 있을 창작동화를 풀컬러로 제작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수요가 확실함을 확인한 만큼 출판사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집에만 목을 매던 출판사들 역시 동화책 시장의 흐름에 올라탈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발해출판.

3층짜리 붉은벽돌로 된 인쇄소는 일제시대 국내 최고의 인쇄시설로 꼽히던 곳 중의 하나로 해방 이후 화폐와 신문을 찍어 내며 이름을 떨치던 곳이다.

공산당원이 위조 화폐를 찍어 낸 여파로 윗대가리들이 싹 물갈이되기 전까지는.

망한 회사를 헐값에 불하받은 이억수는 화족들의 취향에 맞춰 구성했다는 사장실의 앤틱한 분위기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좌빨 놈들이 아무리 얼토당토않은 개돼지 같은 소리를 지껄여도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 아닌가.

이 스무 평 남짓한 방에서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면서 계급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소소한 즐거움……

하지만 요사이 이억수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신문마다 자유니, 통일이니 떠들어 대는 통에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 그의 소리에는 모기가 앵앵대는 것처럼 들렸다. 기계적으로 사회란을 넘기던 이억수가 시위 현장이 찍힌 사진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쯔쯔. 말세로군. 천것들 사고방식은 역시 어쩔 수 없어. 이 박사님 같은 분을 내쫓는다고 세상이 바뀔 줄 아나?”

“그러게 말입니다. 좌빨 새끼들이 판문점에서 남북 대화를 시도하자라니 아주 빨갱이들 세상입니다요.”

“대가리에 총알이 안 박혀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이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시위질이나 하는 것들은 패서 매로 다스려야 하는데 말이야. 그보다 변태영이 이 자식한테 들인 돈이 얼만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다니.”

아무리 정권이 무너졌다지만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릴 줄이야. 투자한 금액을 생각하면 부관참시를 해도 시원찮다. 덕분에 정계에 두루 꽂아 놨던 빨대들이 우수수 날아가 버렸다.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은 이억수의 모습에 눈치 빠른 수행비서가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이번에 저희 지역구에 출마하는 녀석 중에 저희 돈 안 먹은 놈이 어딨습니까? 어차피 한배를 탄 사이들입니다.”

“그러면 뭐 해? 거지 같은 법안 하나 못 막는데. 빌어먹을 국회의원 자식들 내가 부정 축재자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그건 좀. 대통령 하야일 기준으로 5~8년 전까지가 조사 기간이라 소급 적용할 예정이라, 어지간한 기업인이면 다 걸릴 판입니다.”

새로 권력을 잡은 장석운 정부 쪽에서는 여론에 떠밀려 부정 축재 처벌법을 마련했다.

그 대상은 대통령 하야일 기준, 그간 지위와 권력을 통해 부정 축재한 자,

선거 부정과 관련해 1천만 환 이상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자,

지난 5년간 1천만 환 이상 탈세한 자,

정부의 경쟁 입찰에서 담합하거나 재산을 해외 도피시킨 자.

여기 해당하는 인원은 무려 5만 7천여 명.

이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이억수로서는 리스트의 최상단에 있는 것이 당연했기에 돈을 토해 낼 상황에 몰렸다.

“시펄, 당최 말이 되는 소린가? 지들이 뇌물 없이는 사업 못 하게 해 놓고선. 다 같이 좋아라 처먹어 놓고는 사정이 불리하니 우리 쪽만 잘못했다 덮어씌우는 건 무슨 개짓거리야?”

“아무래도 성난 민심을 달래려면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추가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국고에 재산을 환수하게 된다면 회사 운영이 많이 어려워질 겁니다.”

“당연히 그건 안 될 말이지. 아무래도 천진물산 회장부터 만나 봐야겠어. 어떻게 대응할지 합을 맞춰야지, 이대로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지 않나. 그보다 이억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늦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억기.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머리 위에 잔디밭이 크게 후퇴한 모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뭘 하다, 이렇게 늦어. 요정에서 오입질이라도 하고 온 게냐?”

“그럴 리가요. 저 일 하다 왔습니다.”

“일이라. 그럼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알아?”

이억수 사장은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집어 던졌다.

“이게 뭡니까?”

“거, 기사 읽어 봐!”

주섬주섬 신문을 집어 든 이억기가 밑줄을 확인하곤 떠듬거렸다.

“이거 하늘고래 기사군요. 이 책 엄청나게 잘 팔린다는데, 백경출판은 누적 판매 3만 부를 넘어서고 있다 예약판매 부수까지 포함해. 최소 10만 부를 예상하고 있다. 오 대단한데요?”

“10만 부래 10만 부! 짜샤 10만 부가 뉘집 똥개 이름이야 뭐 그거 보고 느끼는 거 없어?”

“음…… 대단하다는 정도?”

“임마 어째서 그 대단한 회사가 우리 발해출판이 아닌 다른 회사인가. 그게 문제의 요점 아니야. 그것도 생긴 지 고작 1년도 안 된 신출한테 밀렸다는 거!”

“백경출판은 애초에 동영오프셋을 인수한 회사인데요. 역사로 따지면 저희랑 별반 다를 게 없지…….”

눈치 없는 이억기의 말투에 열불이 터진 이억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놔, 이 상무 너 임마! 지금 감히 말대답하는 거야 엉?”

“아입니다. 그냥 전 사실만.”

“임마가 평소랑 달리 왜 이렇게 입을 잘 털지? 논리적이라서 좋겠다? 야. 그 아구창이 털리고도 논리적인지 확인해 볼까?”

“죄, 죄송합니다. 형님.”

빈정이 상한 이억수가 돌돌 만 신문지로 머리를 툭툭 쳤다.

“야, 임마 내가 놀고먹으라고 거기 상무 자리 앉혀 놨어. 요새 너무 일이 편하지? 응?”

“아닙니다. 형님.”

“그럼 재깍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야 임마 우리가 이 짓을 한 10년 정도 하지 않았냐.”

“예. 그렇지요.”

“임마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시간이야. 그만큼 버텼으면, 짬이란 게 있는데 왜 우린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실력이 저놈들보다 부족해서?”

아니, 시부럴. 니가 딴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거나 하라매. 이렇게 대놓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 역시 그 정도로 눈치 없는 놈은 아니었다.

눈알을 굴리던 이억기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대꾸했다.

“그게, 실력보단 발상의 전환이 부족해서 아닐깝쇼?”

“맞아. 발상의 전환. 그럼 우리가 저놈들보다 못할 게 뭐야? 우리도 만들면 되잖아.”

이억기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당연히 만들긴 해야죠. 근디 그러려면 시간이…….”

“왜? 시간이 왜 필요해?”

“허허. 외긴요. 그림작가도 필요하고, 스토리 짤 인재도 찾아야 하니 준비에만 최소한 몇 달은 소요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서둘러도 몇 개월은 걸립니다.”

“아니 이런 븅신을 봤나? 세상에 환쟁이가 한둘인가. 그냥 짝퉁 하나 만들어서 베끼면 되지. 니보고 동화책을 쓰라고 했어?”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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