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파워 오브 머니
“최 선생 이게 사실이요?”
“그게…… 교육적 차원이었습니다.”
“교육적 차원으로 애를 피멍이 들 때까지 때립니까? 이 조그만 애를?”
모이는 시선에 땀을 뻘뻘 흘리는 담임이 입을 다물었다.
광필이와 함께 온 덩치들의 살기가 넘치는 눈빛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노와 경멸에 찬 눈빛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는 상황이었지만 강태준은 또박또박 말했다.
“사실 문교부나 언론 쪽으로 문의를 넣을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어린 조카의 맘을 다칠까 우려되기도 하고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서요. 하지만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엄중히 처리하지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경솔한 발언으로 아이에 상처를 준 행동에 대해서는 징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적절한 조치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별도로 교장 선생님과 논의를 할 건이 있는데 그것까지 지장이 갈 수는 없으니까요.”
“추가적으로 논의할 부분이라니? 그건 뭡니까?”
“사실 저희 회사가 일선 학교와 협약을 맺고 아동 식문화 개선 캠페인을 운영해 볼까도 계획 중에 있거든요.”
그 말에 조심스러웠던 교장의 태도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다시 달라졌다.
“아동 식문화 개선 캠페인이요?”
“네네. 아무래도 공모전을 열고 싶어서 불조심이나 반공 포스터, 식목 활동처럼 공익적인 목적을 위한 겁니다. 아이들 건강을 위해 올바른 식문화를 전파할 목적이죠. 이왕이면 제 조카가 다니는 학교부터 시작하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 흥미가 생긴 교장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이건 의외의 제안이었다. 학교 대외 이미지 제고와 기업체를 통해 부족한 운영 자금을 기부받아 재원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업을 하면 국가에서도 분명 보조금을…….”
“확실히 재정상 여유가 생길 확률이 높지요. 그래서 제 조카와 관련 있는 곳부터 먼저 시작하려 했습니다만 굳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뭐…….”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겠습니다! 해요!”
다급해진 교장의 태도가 정중해지자 이쯤 되었다 생각한 강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벌써 시간이. 아무튼 캠페인과 관련한 서류는 다음에 보내겠습니다. 구체적인 사안은 추후 논의하도록 하지요.”
“네네. 꼭 시정조치를 해 놓겠습니다. 이보게 최 선생!”
“예!”
“따라오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살기가 등등한 교장이 최 선생을 보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눈앞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확인한 최 선생이었지만 이제 피할 수는 없다. 이야기를 끝낸 강태준이 차에 막 올라서려는 순간, 달려온 덕배가 앞을 막아서며 사과를 올렸다.
“사장님! 잠시만요! 힘든 걸음 하게 해서 죄송해요. 바쁘신데 신경 쓰게 해서.”
“너 때문에 온 게 아니다. 아까 일 때문에 겸사겸사 온 거지.”
“그래도.”
“어허. 애늙은이 같기는. 사장님 말고 삼촌이라고 불러. 글고 어깨 쭉 펴고 당당해야지. 남자는 자신감이야.”
“그래도. 수고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부당한 일에 절대로 고개 숙이지 마라. 넌 내 조카이고 가족이다. 어디 가도 당당하게 행동해.”
강태준이 지폐를 석 장 내밀었다.
“이건?”
“품위 유지비다. 사내가 당당하려면 지갑부터 두툼해야지”
“이건 못 받아요…….”
“어허, 동무들한테 과자도 사 주고, 한턱 쏴라. 남자가 가오가 있는 게 좋다.
눈을 찡긋하는 강태준이 차에 올라타자 잠시 후,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떠났다. 우두커니 선 채 그 뒷모습을 보는 덕배. 이상하게 목이 메었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최덕배, 저분이 삼촌이었어? 왜 말 안 했어?”
“삼촌 엄청 잘생겼다. 영화배우 같아.”
“나, 니네 집 놀러 가도 돼?”
“니들 다 안 꺼져?”
며칠 후 덕배가 급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식사 후 사과를 까먹으며 광필이가 물었다.
“그 교사는 어떻게 되었나?”
“영광 낙월 분교로 전근 갔다네요.”
“인생 경험 좀 제대로 하겠네.”
그렇게 태풍의 상처가 가신지 얼마 안 된 시점. 정계엔 삭풍이 몰아쳤다.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 조진욱이 신병 치료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는 정ㆍ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실시한 것이다.
선거는 실로 적나라한 부정으로 얼룩졌고,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테러하여 투개표장에서 쫓아내도록 하는 한편, 학생들로 하여금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 조치까지 했다.
야당 후보 조진욱이 사망하면서 대통령은 다시 이만승, 부통령은 변태영이 당선되었지만 아무도 선거 결과를 신뢰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전 투표 조작에, 완장 부대를 활용한 협박 등 끝도 없는 부정이 폭로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궐기다.
-독재 타도! 자유 선거!
-물러나라 물러나라! 자유당은 물러나라.
행방불명된 마산 상고생의 시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온 시민이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이르렀다.
경찰이 소방호스로 붉은 물감을 탄 물을 시민들에게 퍼부어 댔지만, 시위대는 멈추지 않았다. 시민들은 물밀듯 경무대로 몰려들었고, 전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나 리만승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여생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 하야! 그로부터 2일 뒤…….
탕탕탕탕!!
조용하던 경무대 구내 36호 관사에서 울린 총성 소리. 대통령의 양자였던 변강태가 가족을 차례대로 쏘아 죽였다는 소식이었다. 변태영 일가의 일가족 몰살 기사에 광필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 화무십일홍이군요. 권력에서 내려오자마자 저승행이라니.”
“자업자득이지. 그렇게 해 먹고 나서도 잘 먹고 살면 분통 터질 일 아니겠나?”
“씁쓸하긴 하군요. 이참에 세상이 좀 나아지려나.”
“한 번엔 아니라도 조금씩 나아지긴 하겠지. 그보다 치안 유지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군. 요사이 하도 시끄러우니 원.”
혁명이 성공하면서 정부가 전복되었으나 그 부작용도 상당했다. 혼란을 틈타 이권을 챙기려던 무리들이 범람하면서 치안 공백이 벌어지고 범죄율도 크게 상승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출판업계는 급 호황을 맞았다. 그동안 풍속 교화니 정치 규제니 하는 명목으로 자행되던 규제가 풀리자 그간 설움을 폭발하기라도 하듯 간행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진짜 개나 소나 의뢰가 쏟아지네요.”
“다들 억눌렸던 울분을 표출하는 거겠지. 그래도 걸러 받아라.”
“그보다, 형님 근데 출항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통 말이 없던데 말입니다…….”
“한동안은 힘들 테지. 정권이 전복된 마당에 외교가 제대로 되겠나. 게다가 아직 태풍 복구도 다 못했어. 하필 항구를 직격하는 바람에 건조 중이던 제2 지평호도 큰 피해를 봤다는군. 아무래도 몇 개월은 더 걸릴 듯싶으이.”
“저런. 심 사장도 머리 아프겠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들어놓은 덕에 별문제는 없다는군. 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해야지. 출항 늦어지는 동안 이쪽 일이나 처리하지 뭐. 그보다 출판사 영업은 할 만해?”
“학교 쪽은 확실히 꾸준합니다. 형님. 학습지 부분은 수요가 확실히 있더군요. 헌책방으로 흘러들어온 문제지나 학습지도. 없어서 못 팔 지경입니다요.”
“하긴 글자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니,”
국민학교 의무 교육법이 시행된 후에 교육시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나면 영어 기초 확립, 수학 완성이니 하는 책들이 범람했다.
미래 교육시장의 흐름을 아는 강태준으로서는 시장이 커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앞으로 교육 관련 서적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 거야. 문교부 지침에 따르면 국민학교 도서관도 지원할 계획이라니까. 아마 총선 끝나면 도서관 건설도 추진되겠지.”
“그거 반가운 이야기군요. 근데 정부 상태가 영 거시기하던데 예산 조달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떻게든 짜내지 않겠나. 문교부 쪽에서도 나름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정책이니 큰 틀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싹수가 보이는 강사들을 찾아 긴밀하게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우리도 시류에 편승해야지.”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그 부분은 별도 안건으로 정해 추진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학습지용 학년별 전과는 학원강사를 과목별로 초빙해서 편집 감수 맡기는 걸로 방 과장, 전집류 제작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
총괄과장인 방국진이 송구스런 어조로 답했다.
“아직은 답보 상태입니다. 인쇄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아무래도 역자를 구하는 일이 까다로워서요. 대학교 쪽에 마땅한 인재가 있나 접선해 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미 쓸 만한 번역자들은 대형 출판사에서 선점해 둔지라. 필진을 제대로 구하기 쉽지 않더군요…….”
“마땅한 역자가 없다면 일선 교사 중에서 찾아보는 건 어떨까?”
“교사 중에서 말입니까?”
“그래 학교 쪽에 일본 유학파 출신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왕이면 그런 쪽으로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부업으로 하기도 좋고 내가 볼 때 교사 월급이 박봉이니 그걸로는 만족 못 할 인재들이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흠,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뭐, 그렇지. 일단 간단한 일부터 맡겨 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할 일을 정한 강태준은 간만에 설유하를 찾았다. 마침 서울민사지법에서 사법관 시보로 수습 중인 설유하는 나름 바쁜 나날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아직 사법연수원이 생기기 전. 고등고시를 붙으면 사법관 시보나 변호사 시보 일을 1년 정도 하고 그 뒤에 실적에 따라 자동으로 판사, 검사로 임용되곤 했던 만큼 사수에 잘 보이는 게 중요했다.
복스럽게 쇠고기국밥을 먹는 설유하를 보며 강태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천천히 먹어요. 여기 아줌마! 수육 추가.”
“예이!!”
“뭘 그렇게 많이 시켜요?”
식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든 설유하가 타박하자 강태준이 말했다.
“일하느라 힘든데 많이 먹어야죠.”
“치이, 살찐다고요. 몸매 관리해야 되는데.”
“지금보다 약간 찐 게 더 보기 좋아요. 자자, 흰소리 말고 더 먹어요. 그보다 실무는 할 만해요?”
“솔직히 힘들어요. 내가 바보인지 처음 알았어요. 그나마 삼촌 밑에서 일이라도 조금 배워서 다행이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무슨 소릴 들었을지.”
“그보다 아버님께서 신문에 뭐 특이한 걸 연재 하신다면서요. 법전비화라고 했던가.”
“네. 요새 그거 땜시 말이 많긴 해요. 아버지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참.”
설인규는 당시 익명으로 법정신문에서 익명으로 법전비화라는 칼럼을 연재 중이었다. 매회 법관들 간에 있던 이야기나 관련된 비사를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내용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비리와 각종 부패로 얼룩진 현실을 고발하는 촌철살인의 필력과 리얼리티가 더해진 전문성 덕에 칼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