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폭행 시비
그 말에 광필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니는 무슨 오지랖이 그렇게 넓냐. 여자애가 겁도 없이?”
“그럼 그냥 보고만 있어요? 애가 여러 명한테 맞고 있는데?”
“그래서 대신 줘팼다 이거냐?”
“이래 봬도 제가 제주에서 쌈박질 좀 했거든요. 도시 애들이라 그런지 대가 많이 약하더군요.”
“허이구야. 아주 잘나셨군요. 그래.”
당돌한 점례의 행동에 속으로 후련하다는 생각이 든 강태준이었지만 애써 표현하지는 않았다.
“알았다. 사정은 알았으니 됐다. 너희들은 일단 들어가 자거라.”
“예? 그럼 이번 출석 건은…….”
“듣자 하니 너희들은 잘못한 게 없구나. 걱정하지 말거라. 이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처리하마.”
아이들을 다독인 다음 다시 거실에 모인 사람들. 먼저 운을 뗀 것은 광필이었다.
“선생 중에 쓰레기가 많단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구만요.”
“그래요. 문교부에 정식으로 항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머니도 불쾌한 듯 한마디 거들었다.
“선생이란 작자가 애들을 빈부로 차별하다니 교육자로서 기본 자질이 의심스럽구나. 교장과 독대해 보는 건 어떻니? 그쪽에 알아듣게 설명한다면 좋을 거 같은데.”
강태준이 그 제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닐 텐데 적당히 유감 표명하는 정도로 먹히겠습니까. 경고해 봐야 고치는 시늉만 할 뿐. 개선되지 않을 겁니다. 어중간하게 대처해 봤자 계속 업신여기기만 할 테니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죠.”
“그럼 어떡합니까? 형님.”
“본때를 보여 줘야지. 나댄다면 본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위아래를 제대로 자각시켜 줘야 하지 않겠나?”
다음날 교장실, 폭행과 연루된 아이들 학부형들이 몰려 왔다.
다들 덕배와 점례와 한바탕한 아이들의 부모들.
단단히 뿔이 난 이들이 교장실로 들어와서 한바탕 항의를 하는 중이었다.
“아니 교장 선생님. 애들 얼굴 좀 보세요. 무슨 애들이 깡패도 아니고, 당장 이런 애는 혼구녕을 내야지요. 뭔 훈육 지도를 이따위로 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여기 아, 우리 아들 동팔이랑 여기 철수 이빨 흔들리는 거 보이죠? 애가 무슨 무슨 사람을 이렇게 팰 수가 있나요? 무슨 깡패입니까?”
시의원 배지를 단 학부형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매를 맞은 아이들은 호빵처럼 얼굴이 붓거나 팔에 깁스를 감고 있다.
덕배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지만, 점례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에 빈정 상한 어른 하나가 점례를 보며 꾸짖었다.
“아니, 이 가시나가 뭘 잘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어?”
“아니, 지가 잘못한 게 없는데 뭘 잘못했다고 해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점례의 반문에 눈이 커진 상대방이었다.
“뭐, 뭐라카노, 이노무 가시나?”
“아니, 저희만 잘못했나요. 저짝이 입 잘못 놀려서 처맞은 거 가지고. 세상에 부모 욕을 하는데 듣고 가만있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게 어디서 어른 이야기하는데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애가 좀 어려서 철부지라. 양해 좀…….”
선생들의 만류에도 점례는 멈추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죽빵으로 끝난 게 다행이죠. 여자한테 처맞고 꼰지른 것 보니 고추나 제대로 달려 있나 모르겠네요. 거 아들내미들 고자가 아닌지 아랫도리나 제대로 확인해 보세요.”
“아니, 적반하장도 아니고 무슨 이런 선머슴 같은 계집애가 있어!”
“어허. 참으세요! 어이 점례 닌 말을 고따구 밖에 못 해! 대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그래, 느그 애비가 그렇게 가리키던?”
학부형들이 씨근덕거리며 눈을 부라렸지만, 점례도 지지 않았다.
“글쎄요. 지는 그짝 말대로 애미, 애비 없는 애라서 근본이 없거든요. 근데 그렇게 그집 아들내미는 가정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켰길래 입에 걸레를 물었데요?”
“야, 보자 보자 하니 이 쥐방울만 한 게 그냥!”
열불이 터진 학부형이 손을 올리는 순간, 막아서는 교사들. 때마침 학교 정문에서 부우웅 소리와 함께 요란한 소란이 들렸다. 창문을 내려다본 학생들이 검은 세단의 등장에 탄성을 토했다.
“외제 차네! 와 나 저런 거 처음 봐.”
“저거 주인이 누구지?”
확 눈에 띄는 코르벳에서 내린 것은 다름 아닌 강태준 일행. 뒤이어 따라온 것은 주먹패처럼 보이는 떡대들이었다. 선생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강태준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좀 늦어서 미안합니다, 덕배 삼촌인 강태준이라고 합니다.”
“덕배 학부형이시군요. 그럼 뒤에 함께 오신 분들은?”
꽤 꺼림칙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강태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 여긴 덕배 삼촌이고, 이쪽은 제 아우들입니다.”
“아 삼촌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굳이 이렇게 대인원이 오실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요.”
“우리 조카가 사고를 쳤다 이야기를 들어서. 송구스러운 맘에 작은 성의를 담아 학용품과 필요한 교재를 좀 가져왔거든요. 그리고 자 여기 제 명함입니다.”
양복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강태준이 교장에 정중히 명함을 내밀자 내용을 확인한 교장이 놀란 듯 목소리가 커졌다.
“백경식품이라면? 설마 조미료 제조회사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오오. 젊은 분께서 큰 사업을 하시는군요. 대단하십니다.”
“뭐 어쩌다 보니. 아주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요즘 세상에 풍미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활기가 띤 교장의 말에 움찔한 학부형들. 아무 배경 없는 아이인 줄 알고 막 대했더니 이거 대체 무슨 낭패인가. 광필이가 눈을 부라리자 부모 뒤로 숨는 아이들. 의외로 뼈나 근육이 상한 곳은 크게 거의 없어 보이는 모습에 안심한 강태준이었다.
‘이야, 요령 있게 팼구먼. 전문가 솜씬데?’
주먹 좀 쓴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가. 강태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애들끼리 싸운 부분에 대해서는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다친 아이들 치료비는 전액 지원하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지요. 그게 끝인가요? 사죄는?”
“그래요. 사과가 먼저지요. 지금 치료비로 퉁 치자는 겁니까? 장난합니까”
강태준의 행동에 용기가 생겼는지 목소리가 커진 학부형들.
그러나 더 투정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던 강태준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사안을 들어 보니 그쪽 자녀들이 덕배한테 부모를 들먹이며 욕을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이야기지요!”
“우리 애들이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사실 확인 여부를 갖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안을 굳이 키우고 싶으시다면 저희 쪽 변호사가 상대해 드릴 의사가 있습니다.”
“네? 변호사라고요, 무슨?”
갑작스런 말에 웅성대는 사람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정장을 입은 설유하가 뒤에서 나섰다. 집중되는 시선에 설유하가 태연해하자 강태준이 소개했다.
“여기 이분은 설유하 사무장으로 부경법률사무소 소속이고, 이번 고등고시에 합격하신 분으로 저희 측 법무 대리를 맡고 있지요…….”
“안녕하세요. 이쪽은 저희 주 고객님이신 강 사장님 의뢰로 참석했습니다. 저희 법률 사무소에서는 청소년 아동 범죄 사건도 몇 건 담당했던 전적이 있지요.”
“잠깐만…… 잠깐만요. 법조인이라니 이게 무슨.”
그 말에 당황한 학부형들이 서로 마주 보았다. 사안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잠시 후 낯빛이 변했던 사람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다시 나섰다.
“지금 우릴 협박하는 겁니까?”
“시시비비를 따지자면, 정확히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한다는 거지요. 듣자 하니 평소에도 덕배를 비롯한 급우들에게 폭언을 일삼고 괴롭혔다는데 사실입니까?”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증인이나 증거자료는 이미 확보해 놨습니다. 다수가 한 명을 상대로 폭언을 일삼는 것도 엄연히 폭행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집단으로 린치를 가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쪽 과실을 고려할 때 문제점이 있다면 보호자로서 민형사상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말은 몹시 부드러웠지만, 강태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당황한 사람들이 침을 삼키자 무표정한 얼굴로 버티고 선 사내들. 함께 온 광필이가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거 표정들 푸시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쫄고 그러시나. 할 말 있으면 계속 떠들어 보시던지요. 응? 거기 형씨? 분하면 여기 한 대 때려 보시죠. 내 점례 대신 맞아 줄 테니.”
“이, 이러지 마시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닌가. 왜 그렇게 애는 흠씬 패 놓고. 대놓고 패라고 하니 못 때리겠소? 엉?”
껄렁거리는 광필이가 막 나가자 당황한 학부형들.
어른들이 위축되자 분위기를 느낀 아이들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설유하의 청소년 아동 범죄에 대한 법 규정 설명 이후 강태준이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추가로 논의하실 부분이 있으면 지금 말씀해 주십쇼. 원하신다면 세부적인 사안까지 검토한 후에…….”
“아,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이 정도로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합시다. 하하!”
기다렸다는 듯 내민 것은 이번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합의서였다. 광필이를 비롯한 덩치들이 눈을 부라리자 다들 서둘러 사인을 마쳤다.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한 강태준이 홀가분한 얼굴로 교장을 돌아보았다.
“그럼 교장 선생님?”
“예? 왜 그러십니까?”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교장이 자세를 바로 하자 강태준이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 학교 기물 파손에 대한 수리비입니다.”
엉겁결에 봉투를 받은 교장이 액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헉, 이렇게 큰 액수를.”
“수리비를 뺀 나머진 학교운영비로 쓰십쇼. 정부 재정이 열악한 관계로 예산 확보가 어려우실 텐데 돈 나갈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학교 재정에 좀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해서 더 넣었습니다…….”
“오. 이렇게 감사할 데가.”
낯빛부터 달라진 교장의 말투가 살가워졌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누군지 언급은 안 하겠지만 모 선생께서 우리 조카에게 부당하게 대한 정황이 있더군요. 반장 선거 전에 덕배에게 선거 포기를 종용했다고 들었는데 아이들 일이지만 그건 좀 아니지 않겠습니까?”
웃는 낯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소리에 교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글쎄요. 주위에 물어보시면 금방 알 텐데요. 아이들이야 어린 나이에 큰 악의는 없을 거라 사료되지만, 집안 문제로 아이들을 차별하는 건 교육자가 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이 나라의 동량이 될 아이들이 대체 뭘 보고 배울지 통탄스러워서 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담임이 된 입장에서 학생들을 차별하고, 여하에 대한 판단 없이 일방적으로 체벌을 가하다니 이건 좀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