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출판사 인수
능숙하게 작업을 이어 가는 모습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량이 줄었다 들었는데 아직 괜찮은가 봅니다.”
“이번에 몇 군데가 갈려 나가긴 했지만, 한번 딴 데 맡겨 보다 불협화음이 났는지 결국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네. 시청이나 구청, 세무서에 쓰이는 행정 서식은 종류도 수백 종이고, 맞추기도 까다롭거든.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기일을 어기거나 실수해 본 적이 없지. 그게 우리 자부심이기도 하네.”
3층짜리 공장 견학이 끝나자 강태준은 직원들과 면식을 갖는 과정을 거쳤다. 맨 처음 소개한 인물은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두꺼운 도수를 낀 안경 덕인지 눈이 작아 보이는 인물이었다.
“자, 여기 교정국 편집 과장인 방국진일세. 서울공고 인쇄과 출신이고, 2년 전에 ICA의 기술 원조금으로 서독에 파견되어 6개월간 사진인쇄술을 연수한 인텔리지. 여기 고도리 영감은 전지 재단부터 시야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전문가일세. 투바이 각목 밟고 재다찌로 왔다 갔다 하면 자가 딱히 필요 없을 정도야.”
“고도리요.”
“방국진입니다.”
소개한 직원은 총 15명. 다들 하나같이 꽤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나이대가 젊은 시다부터 전문 인쇄공, 재단공, 미싱공, 박공, 제본공에 이르기까지. 몇 세대 이상 차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들 경력 이상으로 일에 자부심이 있고 프로의식이 넘쳐나는 사람들이었다.
강태준은 적잖이 흡족했다.
“인력도 좋고, 설비 빵빵해서 맘에 드는군요. 그럼 대략 양도하실 가격은 어느 정도 생각하시는지?”
“허허. 대지 150평에 연건평 200평짜리 건물, 인쇄 기곗값까지 포함해서 대략 일백 만환 정도 생각하고 있네.”
강태준은 속으로 셈을 해 보았다. 새로 인쇄기를 수입하기 힘든 상황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조건이었다.
“저야 바랄 나위 없는 조건이긴 합니다만, 그 조건이면 저 말고도 노리는 사람이 많았을 거 같은데요?”
“맞는 말이야. 사실, 다른 사람들도 보고 가긴 했는데 추가 조건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네.”
“그럼 그게 뭔지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십쇼.”
“이 인원들을 그대로 고용 승계해 줄 수 있겠나. 그리고 채무가 좀 있긴 하네. 미수금으로 충당하면 되기는 하지만 좀 많아.”
“얼마나요?”
“200만 환 정도.”
“좀 많긴 하군요.”
작심하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당시 인쇄기술자들은 몸값이 가장 높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 1956년 보건사회부 조사에 의하면 인쇄공 평균 연봉이 4만 환으로 금융계의 3만 6천 환을 압도하는 수준이었으니 거기에 각종 제 수당과 야근수당까지 포함하면 고용보장 자체가 큰 부담이 될 수 있던 것.
강태준이 고민하는 척 신음을 흘렸다.
“흐음…….”
“일단 거래처가 일시적으로 줄어들었기는 하지만 회복 중이고, 악성 채무인 건 아닐세. 다들 외상 얼마 정도는 끼고 일하지 않나.”
사실 채무로 묶어 놓는 것은 오히려 영업상 전략일 수도 있다. 정 안되면 사람이라도 보내 드러누우면 되지 않나. 주소만 확실하다면야 돈 받아 내는 거야 자신이 있는 강태준이었지만 못내 선심을 쓰는 척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계산은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수금과 채무 금액의 차이가 5% 이내라면 수용범위입니다만, 그 이상까지는 좀 어렵습니다. 혹시 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쪽이 정산하는 걸로 어떻겠습니까?”
“뭐 그 정도야 좋네, 그럼 잔금 지불일은 계약 후 30일 이내로 하지. 더 필요한 것 있나?”
“거래처 현황과 창고에 남은 재고 확인하고 부채 내역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니까요. 서류는 부경법률사무소 쪽으로 보내 주십쇼. 혹시 위법 사안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철두철미하구만. 알았네. 더 이야기하다간 아주 벗겨 먹으려 들겠어.”
“아. 그리고 하마다 인쇄기를 좀 들여올 테니 그 부분은 좀 도와주십쇼.”
“하마다 인쇄기?”
“예. 주변의 인쇄인들에게 듣기로는 물건이 수리도 괜찮고 PVC랑 피사체에 인쇄하기 쉽다는군요. 수수료는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야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인수에 합의한 강태준은 상호를 백경인쇄공사로 바꾸고 시설을 추가로 확충할 겸 서울 전지인쇄소에 의뢰해 하마다 인쇄기를 몇 대 더 들여오기로 정했다.
방국진을 인쇄 공장 총괄과장으로 승진시킨 다음 편집국장 직으로 김광필을 새로 선임했다. 아무래도 자기 사람인 광필이가 회사를 운영하게 두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대략적인 페인트칠이나 내부 수리가 끝나고 인쇄업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 무렵,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 명의로 인쇄 및 제본 행위에 대한 특별행위세 부담이 부당하니 각 시도에 이를 개정, 제외하라는 공문이 내려진 것. 소식을 접한 인쇄소 사람들의 얼굴에 간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광필이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이야. 정부에서 자진해 세금을 내리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요.”
“언론에 강 대 강으로만 나가기는 부담이 있으니, 이제라도 인쇄업자들을 달래려는 거겠지.”
옆에서 수저를 뜨던 오재갑이 맞장구를 치며 호응했다.
“원래부터 백해무익한 제도였으니 폐지가 너무 늦은 감이 있지요. 특별행위세란 거 자체가 일본 놈들이 만주사변 당시 세액을 확보할 목적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 세금 아닙니까.”
“오, 역시 유식하구먼. 재갑이. 언제 법 공부까지 했데?”
“이 정도야 상식 아닙니까. 광필 형님도 김 교수님 수업 때 같이 들은 이야기잖습니까.”
“그랬나? 내 수업을 들었어야 기억을 하지. 임마.”
“형님도 참. 기본 중의 기본인데 대체 어떻게 졸업하셨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게 우리 어로학과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지. 그래도 모두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나. 저 정도만 해도 졸업에 지장 없다는 거 말이야.”
“뭐요? 이 사람들이 정말!”
아무튼, 강태준 입장에서는 정책 변화인 것은 분명한 만큼 반가워할 일이다.
“어찌 되었든 돈 굳어서 좋구만. 세금 낼 돈이 줄었으니 잉크나 추가로 구매하면 되겠어.”
“예. 잉크는 인쇄문화협회를 통해 구매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일단 미풍 잉크는 품질이 좋지만 대리점이 독점이라. 협회를 통한 공동구매가 나을 것처럼 보입니다.”
“잘 조사했네. 그럼 거래는 재갑이한테 맡기고 다녀와라. 같이 집에 좀 다녀오자.”
“집이요?”
“철민이 애들 중에 인쇄소에 근무를 원하는 지원자들이 있나 확인 좀 해 봐야지.”
그 말에 광필이가 어깨를 툭 치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형수님 보러 가시려는 거 아임까? 축하도 해 줄 겸. 그 어려운 시험을 한 방에 붙다니 대단하시던데요.”
“그러게. 나도 한 번에 붙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울고 불며 짜는 것은 무색하게 정말로 한 번에 시험에 합격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꽤 상위권 점수로. 강태준이 말했다.
“뭐. 3차 시험은 요식행위니 미리 축하해 줘야겠지.”
“앞으로 잘 보이셔야겠습니다. 형님. 미래의 판사님이신데 몸값 오르기 전에 콱 도장부터 찍는 건 어떻겠습니까?”
“거 참 말본새하고는. 너도 빨리 채비해라.”
“에? 저도요?”
“짐 챙겨서 다시 올라와야 할 거 아냐. 니가 이쪽 전담이니. 미리 집도 구해 놨다.”
“아, 막상 옮긴다고 하니 좀 섭섭하긴 하네요.”
“언제는 더러워서 독립하겠다고 투덜대더니만. 사람이 만족이 없어 만족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태준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다. 일도 잘 풀린 데다 설유하의 고시 합격 덕분에 돌아가는 마음이 가뿐하기 그지없었다.
한달음에 도착한 집 앞, 중간에 가지가지 선물을 바리바리 사 왔다. 풀빵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덕배야, 점례야. 형 왔다. 풀빵 사 왔다.”
“오셨어요?”
“덕배는? 임마들 퍼뜩 나오지 않고 뭐 하나? 안 나오면 내가 다 먹어 버린다.”
“아. 그게. 좀.”
헌데 쭈뼛쭈뼛한 얼굴로 나온 것을 보니,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듯했다. 덕배의 입술이 찢어지고 눈탱이가 퉁퉁 불어 있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깜짝 놀란 광필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눈깔이 왜 그래. 어디 처맞고 다니냐? 비루먹은 강아지 꼴이야?”
“그게 말입니다요.”
대답 없이 눈치만 보는 아이들에 어머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 마땅한 타이밍에 잘 왔구나. 애들끼리 학교에서 좀 쌈박질을 했는데 좀 사안이 심각한지 학교에서 학부형 좀 모시고 오라는구나.”
“네? 애들이 치고받고 그러는 거지. 뭔 애들 싸움에 학부형까지 부르고 그럽니까? 참나?”
황당해하는 광필이의 말에 어머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기물 파손에 애들도 다친 애가 한둘이 아니라서. 맞은 애들이 대여섯은 되는데 전치 8주는 족히 넘는다지 뭐냐? 개중에는 이빨 빠진 애도 있고, 팔이 부러진 애도 있고.”
“아니, 그게 정말이야?”
집안에서야 곧잘 장난을 치곤 하지만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는 모범생이지 않은가. 죄지은 듯 무릎을 꿇는 아이들에 덕배가 말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변명할 게 있으면 해라. 뭔 이유가 있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뭔가 말 하고 싶지 않은 게 있는지 입을 꾹 다무는 모습에 강태준이 엄하게 말했다.
“보호자까지 모시고 오라 할 정도면 큰일이다. 그럼 가기 전에 자초지종은 알아야 할 게 아니냐.”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덕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자 강태준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대답하기 싫은 거 같은데 아무래도 말로 안 될 거 같구나. 어이 춘삼아.”
“예. 형님.”
“밖에 나가서 회초리 하나만 꺾어 와라. 아무래도 푸닥거리를 좀 해야겠다.”
“하…… 하지만 형님!”
“어서!!”
“예…… 알겠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춘삼이가 곁눈질을 하다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잠시 후 춘삼이가 나뭇단을 꺾어 오자 강태준이 회초리를 들었다.
“다리 걷어라.”
그 순간 질끈 눈을 감은 덕배가 피멍이 든 다리를 걷어 올린 모습에 강태준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뭐냐?”
“잠, 잠깐만요!”
그 순간 옆에서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점례가 다급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
“덕배는 잘못 없어요. 시비는 그쪽에서 먼저 걸었다고요. 먼저 애미, 애비 없는 놈이라고 욕했단 말이에요!”
“뭐라고? 정확히 말해 보거라.”
“누나! 그건. 좀”
강태준이 회초리를 내리자 점례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가만있어 봐, 그뿐만이 아니거든요. 선생님이 급장선거도 나가지 말라고 협박도 하고 또…… 촌지 안 줬다고 얼마나 구박질을 했는지.”
“그게 대체 뭔 소리냐? 찬찬히 이야기해 보거라.”
자초지종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야기를 듣던 광필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원래 덕배 이 녀석이 반장직이 유력했다 말이지? 근데 담임선생이란 놈이 은근히 후보 사퇴를 종용하기까지 했고?”
“네. 제 귀로 똑똑히 들었대두요. 아무래도 지역 유지 애들을 밀어주겠다 생각했나 봐요. 운동회 음료수도 준비해야 하고, 학생회 운용에도 자금이 필요하니 부담이 되지 않겠냐고 은근히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면담을 하고 나왔더니 누가 들었는지 소문이 쫙 퍼졌더군요. 고아라서 반장선거도 못 나간다고 그러다 평소 아니꼽게 보던 급우들과 시비가 붙은 거예요…….”
“뭐라고 했는데?”
“애미, 애비도 없는 놈이 무슨 반장질이냐고, 고아 자식은 반장이 아니라 폐지나 주우러 다니는 게 맞다고요. 그 말에 욱해서 주먹이 날아간 거죠. 저도 손을 보탠 거고. 그래 놓고 보니 덕배만 혼자 교실 앞까지 불러서는 저렇게 피멍이 들도록 때리지 뭐예요!”
말도 안 되는 불합리에 대략 정신이 멍해진 사람들. 자기가 맡고 있는 아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니 강태준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