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동영 오프셋
당시 은행원 월급이 5천 환 정도임을 감안할 때 천경물산은 실습을 갓 마친 인력에 무려 4천 환을 주는 파격적인 봉급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봉급이 높은 데다 기숙사가 있어 근로 조건마저 훨씬 좋으니 갈 곳 없는 고학력 여성 인력들이 떼로 몰렸다.
조를 맞춰 작업에 열중한 사람들을 보며 강태준이 천천히 공장을 시찰했다.
“여긴 수해 피해는 없는 것 같군요. 분지 지형이라서 좀 걱정했는데요.”
“허허, 태풍 왔을 때 난리도 아니었지. 기둥뿌리 뽑히는 줄 알았다니까? 뽕나무 숲이 막아 준 덕에 살았지. 용한 점쟁이가 추천한 터라 그런가. 풍수가 좋은가 봐.”
“하하. 야매 실전파가 어설픈 전문가보다 낫네요. 그런 사람 있으면 저도 함 소개해 주십쇼.”
“물론이지. 혹 신혼집 구하면 말하게. 듣자 하니 벌써 상견례도 했다지?”
“상견례는 무슨. 대충 인사만 나눈 정도입니다. 그보다 어망 제작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진도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그러잖아도 자네한테 조언 구할 일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네. 자, 이쪽으로 오게나.”
2개 동으로 조성된 어망 어구 창고는 강태준의 요청으로 건립된 것으로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신축이었다. 아직 출고되지 않은 제품들이 모인 보관 창고 안에는 각종 어업 활동 용품을 비롯 와우망과 나일론용 로프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오 이게 다 그물망입니까?”
“그려 편망업체 쪽에서 일했던 관계자를 불러 제작해 봤네. 어떤 게 좋은 건지 잘 만들었는지 몰라서 일단 시험용으로 제작해 본 거야. 소재는 나일론 6타입일세. 도레이에서 기술이전 받은 건데 결절 강도가 높고 인장력이 좋아 선호되는 물건이지.”
강태준이 힘주어 당겨 보자 질긴 천에서 탄성이 약간 느껴질 정도다.
함께 온 오재갑도 그물을 당겨 보고는 슬쩍 품평을 올렸다.
“음…… 실제 조업에 쓰긴 좀 뻣뻣하긴 하네. 좀만 유연했으면 좋겠는데요.”
“그게 섬도가 높지 않으면 끊어진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말일세. 너무 뻣뻣한가?”
이원석의 변명 아닌 변명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탄성을 높인 쪽이 실전에서 낫습니다. 너무 그물이 뻣뻣하면 고기 비늘이 쓸려나가서 제값을 못 받거든요. 이렇게 뻣뻣하면 내구성 좋은 거랑은 별개로 손도 다치기 쉽습니다.”
“아, 그런가. 그건 몰랐군.”
“그렇다고 너무 탄성이 높아도 안 되니 적당한 수준이 중요합니다. 탄성이 너무 높으면 태풍이 불고 조류가 심할 때는 그물이 꼬여서 순대가 되어 버려요. 말린 그물을 손으로 일일이 풀어야 하는데 그러면 최악입니다.”
“하, 어렵구먼. 그럼 아세테이트를 섞거나 아교풀을 빳빳하게 먹이면 안 되려나? 어차피 대형 그물은 한두 번밖에 못 쓰잖나?”
“아무리 아교풀을 세게 먹여도 물에 닿으면 풀이 죽어서 안 됩니다. 유연성을 더 증가시키려면 지금보다 꼬임수를 덜 준 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면 가연사로 직조하는 수밖에 없겠구먼. 이 투망은 어떤가? 나름 신경 써서 만든 물건인데 말이야?”
물건을 살펴본 강태준이 다시 말했다.
“그물코 규격이 40mm 이상 되는 건 괜찮습니다. 근데 나머진 좀 많이 잘군요. 그물코가 너무 작으면 치어까지 다 잡아서 안 됩니다.”
“예 맞습니다. 그물이 너무 잘면 수압 때문에 쓸모가 없어지니까요.”
오재갑의 말에 낭패한 이원석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이미 만든 건 어떡하지?”
“그건 병충해 방지용으로 재활용하면 되잖습니까? 방충망으로 딱일 거 같은데요.”
“호오 그러면 되겠구만. 알겠네, 바로 작업하도록 조치하지.”
당시 그물들은 모두 나일론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도기에 있었지만, 그물을 대량 생산해 줄 편망업체도 영세한 곳이 대부분. 때문에 이원석으로서도 충분히 시장성 있다고 판단하고 뛰어든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찰나, 이원석이 퍼뜩 생각난 듯 되물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먼. 그보다 강 사장이 인쇄 문제로 곤란하다고 했지? 그럼 아예 인수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건가?”
“예. 포장 인쇄나 팸플릿 제작 같은 걸 매번 외주를 주기도 힘들어서 아예 저희가 인쇄소를 인수하는 게 어떤가 해서 말이죠. 예고 없이 계속 단가가 올라가는 것도 부담스럽고요.”
“흠. 과연. 서적을 제작하는 출판사를 끼면 그런 부분에서 아무래도 리스크 관리가 편하지. 잉크나 종이 같은 것도 싸게 들여올 수 있을 테고 말이야. 그럼 인쇄소를 얻으려는 위치는 서울인가?”
“네 아무래도. 인쇄업은 도심형 사업이니 아무래도 접근성이나 비용 면에서도 대도시 인근에서 매물이 좋지요. 적어도 동판 인쇄가 가능한 곳이면 좋겠는데 혹시 마땅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이원석이 턱을 굴렸다.
“흠. 마침 적당한 곳이 하나 있기는 하네. 동영 오프셋이라고 혹시 들어 보았나?”
“동영 오프셋요. 나름 이름난 중견업체 아닙니까?”
“응, 거기 사장이 이형민라고 내 친한 벗일세. 요새 정계 쪽에 관심이 많아서 기웃거리는 와중인데. 요사이 출판업을 정리하고 싶어 하더라고.”
강태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출판사를 끼고 있으면, 되려 정치 진출에 유리하지 않습니까? 언론 쪽에 줄을 대고 있는 쪽이 나을 거 같은데 말이죠.”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근데 그 짝이 여당 쪽에 미운털이 많이 박혔거든. 평소 말을 세게 해서는. 덕분에 이번 필화 사건 때 크게 데였다네.”
오재갑이 슬쩍 관심을 보였다.
“필화라면 여적 말인가요. 그럼 광복신문 쪽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 글 쓴 논설 의원이 알아보니 하필 그쪽과 육촌지간이라서 쌍으로 엮였거든. 광복신문 폐간 때 연루되는 바람에 호되게 혼났지 뭔가. 덕분에 거래처까지 많이 갈려 나갔지.”
“거참 재수 옴 붙었네요. 육촌이면 거의 남뻘 아닙니까?”
“그러게, 별도 왕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가톨릭 재단 소속인 광복신문은 장기집권을 위해 개헌까지 한 이만승에 비판적인 언론 중 하나다. 그러던 중 칼럼에서 다수결의 원칙과 공명선거에 대한 단평이 실렸는데 그게 마침 이만승 일파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 비추어 선거가 다수결의 원칙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종방안으로 폭력이라는 수단이 검토된다면 그것은 정당한 행위라 할 것이다.
혁명을 암시하는 듯한 칼럼에 여당 쪽에서는 그야말로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만승의 최측근이던 변태영은 노발대발했고 칼럼에 관여한 관계자들은 줄줄이 기소 없이 끌려갔다. 광복신문 역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일차로 폐간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보류하는 법원의 판단에 의해 가까스로 산소호흡기만 붙여 놓은 상태.
“그놈의 빨갱이 드립은 언제까지 할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시절이 어느 땐데 연좌제가 적용된다는 건지. 진짜로 대통령 심기가 불편해서 그런 건지. 아랫놈들이 충성경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 뭔가.”
“그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튼 확실히 그 정도면 확실히 염증이 날 법도 하겠네요.”
“그러게. 이형민 사장도 본인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서면 보복당할까 우려가 되기도 하니 아예 정리하는 편이 맘 편하다 생각한 거겠지.”
“그럼 조만간 다리 한번 놓아 주십시오.”
“허허. 뭘 그리 뜸을 들이나. 이미 말은 대충해 두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조만간 연락 주겠네.”
과연 며칠 후, 일정을 잡은 강태준은 북창동으로 향했다. 동영 오프셋이 위치한 북창동은 서울 한복판으로 사방으로 뻗은 골목의 끝자락이 남대문시장과 명동에 맞닿은 요지였다. 당시까지는 화교들이 무리를 지어 살던 곳으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병을 씹으며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니, 머리에 음식을 얹은 배달부와 필경사가 자전거에 등사판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나타난 건물은 1920년대 보일 법한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로 2층 외벽에 빛바랜 글씨로 동영 오프셋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인쇄소가 꼭 학교같이 생겼군요.”
“원래 학교 건물로도 쓰였지. 한때는 창고로도 쓰였고, 나름 명칭이 여러 개였던 곳일세.”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잘 다듬은 콧수염이 멋진 사내가 빙글거리고 있다.
줄무늬 양복 앞주머니에 만년필을 하나 꽂고 있는 것이 나름 멋을 부린 모습. 이 시대 사람답지 않게 훤칠한 키와 세련된 패션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절모를 내려 인사하는 상대에 강태준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형민 사장님이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준입니다.”
“안녕하시오. 원석이가 보냈길래 좀 나이가 있을 줄 알았더니 이리 젊으신 분일 줄은 몰랐군. 근데 서적이나 출판 쪽에 관심이 있을 것 같진 않아 보이네만.”
“하하, 제가 생긴 게 이래도 왕년에 문학소년 소리는 들었습니다.”
“하하. 그게 아니라 좋은 뜻입니다. 책보다는 연애운이 높을 관상이라. 그럼 우리 도련님께서는 무슨 책을 제일 좋아하나?”
“요새는 영어 사전이 무척 좋더군요. 특히 가죽 장정으로 된 게 맘에 들더군요.”
“오, 고급스러운 취미군. 양장본이라니 하긴 선장 일을 한다 하셨으니 짬짬이 외국어 공부도 필요하겠군.”
“반만 맞고 반은 틀립니다.”
“그럼 어째선가?
“사실 딱 베고 자기 좋은 크기라서 말입니다. 조업하다 힘들면 꿀잠 자기 딱이거든요.”
“하하. 뭐라고? 이 사람?”
유쾌하게 통성명을 마친 이형민 사장이 강태준을 실내로 안내했다. 따로 감독관은 없었지만, 작업공정은 이미 손발을 오래전부터 맞춘 듯 꽤 일사불란한 모습. 재단부터 미싱, 타공과 접지, 형압에 제본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작업에 강태준이 관심을 보였다.
“이거 규모가 제법 크군요.”
“석판 옵셋기랑. 수동 고모리 4절, 료비 마스터인쇄기를 들여놨네. 인쇄공정 불량을 검사할 수 있는 중고 만로랜드 제품 포함, 전지 반자동재단기 1대에 4절 수동재단기도 2대나 들여놨다네.”
“와, 꽤 다양하군요. 그렇다면 주력 품목이 뭔가요?”
“대부분 흑백 2도 양식이지. 소량 인쇄물은 마스터인쇄를 하고, 옵셋 인쇄는 대량 주문 위주로 받아. 예를 들면 교재나 홍보물 같은 걸로 말이야.”
“인기가 좋군요.”
“그럼. 여기 인쇄기 품질이 좋아서 칼라 인쇄로 알아주는 편이거든. 그 외엔 잡지 제작이나 판촉물 제작 의뢰가 많고, 식품 포장이랑 포스터 의뢰도 종종 들어온다네.”
강태준이 슬슬 주변을 돌아보며 궁금한 부분을 계속 질문했다.
“이거 질감이 특이한데 로라는 수입산입니까?”
“그럴 리가. 아교와 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자체 제조한 걸세. 원래 수입을 했는데 장난치는 업자들이 많아서. 겨울철엔 아교에 로라가 굳어서 사용하기가 곤란하거든. 이건 우리 비법으로 독자 개발한 거야.”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답변에 옆에 선 강태준은 아연판에 전사제판을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노루지에 화공을 한 후, 죽처럼 된 풀을 물로 축여 물건에 붙인 다음 벗겨 전사하는 방식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