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99화 (99/361)

99화 인쇄업 진출

자극적인 기사에 고구마를 까던 광필이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니, 이건 처음 보는데 진짜 영국 공주가 내한한다 이겁니까?”

“이제 봤나. 그걸로 읍내가 좀 시끌벅적하더구만. 금지옥엽께서 국제적십자사의 구호사업 가운데 민간원조를 더 늘리는 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했더군.”

“리얼로 프린세스가 한국에 오신다굽쇼?”

놀란 광필이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본디. 이 조막만 한 나라에 뭐 볼 게 있다고.”

“뭐. 생색내기 아니겠습니까? 실연의 슬픔도 삭일 겸 겸사겸사 영연방 일대도 둘러보고. 이쪽이 투자처로 성숙했는지 확인해 보는 거지요. 이거 프린스 리께서 어깨가 으쓱하시겠네요.”

“지원금 주러 온다는데 응당 고마워해야죠. 그러고 보니 보사부 의전 담당만 죽어가겠구만요. 프린스 리께서 얼마나 닦달하실지 안 봐도 참. 그보다 역시 우리 각하께서는 입 터는 능력 하나만큼은 진짜 끝내주네요. 외교 외에 다른 건 영 꽝이라는 게 유감이지만.”

광필이의 비아냥에 강태준이 옆에서 주의를 주었다.

“어허. 말조심해라. 임마. 누가 들으면 잡혀가. 그보다 소식 들었냐? 수재 의연금이 10억 환의 목표액을 벌써 충당했다더군.”

“아니, 벌써 말입니까?”

“미국이나 영국에서 구호금을 보내기도 했지만, 해외 교포가 보낸 개인 의연금도 상당하더라고요. 특히 이번에 재난 의연금으로 기부금을 낸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답니다.”

“저금통 깨서 지원금을 낸 아이도 있다는군요.”

어머니가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아직 살 만한 곳이긴 하구나. 없는 살림에 다들 도와주는 걸 보니.”

“한국인의 정이란 게 그런 거죠. 그래두 한 달 만에 10억 환을 초과하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춘삼이의 말에 광필이가 푸념하듯 투덜거렸다.

“그러게. 다들 미련해 빠져서는. 이번에 선거하다 또 돈 빼먹지 않으면 좋겠구먼.”

“아니, 닌 왜 이렇게 뿔났나. 혹시 부산교대 숙녀들이랑 미팅 실패한 거 땜시 그래?”

강태준의 말이 찔리는지 광필이가 짜증을 내었다.

“아, 정말 형님. 다 아시면서. 아픈 데 또 찌르지 맙시다.”

“짜식이. 일단 살부터 빼라니까. 그렇게 옆구리에 손잡이가 달려 어떡하냐?”

“그건 모르지. 돼지도 짝이 있는데.

“뭐, 사람들 취향이 다양하다면서요. 광필 아재 덩치면 좀 일반적이지는 않겠지만요.”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점례에 광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자꾸 그럴래?”

“아이구 깜딱이야. 오빠야, 나 귀 안 먹었거든예?”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어이구, 말 많네. 옛다, 고구마나 처드세요.”

졸지에 뜨거운 고구마를 문 광필이가 아뜨뜨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고구마를 겨우 삼킨 광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휴. 입천장 다 까질 뻔했네. 가스나야 너 일부러 그랬지?”

“오, 쏘리. 근디 뜨거우면 좀 뱉지. 미련하게.”

“임마, 세상에 먹는 거 버리면 천벌 받어.”

“허이구야. 알았으니 남은 거나 마저 드세요.”

“허. 뜨거!”

둘이서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사이, 밖에서 덜컥 소리가 들렸다.

돌아온 오재갑에 반색을 하며 버선발로 나간 점례가 그를 맞았다.

“재갑 오빠! 왔어요?”

“응. 저 왔습니다. 형님.”

“빠르구먼. 벌써 팜플랫 발주 마치고 온 거야?”

하지만 눈을 찡그린 재갑이가 거실 위에 걸터앉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건 실패했습니다. 형님, 아무래도 거래처를 바꿔야 할 듯싶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현성 인쇄소 이 자식들이 그새 인쇄 가격을 또 올렸지 뭡니까. 이제는 아예 생으로 벗겨 먹으려고 들더군요.”

반쯤 까 놓은 고구마를 우물거리는 재갑이에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그게 뭔 소리야? 접때 약조 받았잖아. 그때 충분히 협의한 거로 아는데?”

“잉크나 염료가 수입품이라서 태풍 땜시 들여오기 힘들답니다. 팜플랫 제작은 3원색 빨, 노, 파에 먹색 글씨라 4도 인쇄라서 별도로 추가 비용을 내라더군요. 거의 저번에 약조한 금액의 1.5배를 달라지 뭡니까.”

“1.5배. 나 참 어이가 없구만.”

“네. 그래서 너무 비싸다고 점잖게 항의했더니 그럼 배 째라고 나오지 뭡니까?”

“허어, 심보가 고약하군. 이참에 호구 하나 잡아먹겠다는 심본가?”

“아마도요. 꼬우면 딴 데 알아보라길래 일단 보류 때리고 왔습니다.”

“허, 배짱 장사하는구먼.”

어이없어하는 광필이의 태도에도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딴 곳 사정은 알아봤나?”

“그게 여유 부리는 이유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요즘 출판물 의뢰가 워낙 많아서 다들 바쁜가 봐요. 인쇄소끼리 짜고 담합이라도 했는지 청구하는 비용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렇지. 믿는 구석이 없으면 그렇게 세게 나올 리가 있나. 아마 팜플렛 물량 정도는 별로 아쉽지 않다 이거겠지.”

강태준은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했다. 6.25가 끝나고 인쇄업계는 국한문 서적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호황기를 맞았다. 주야로 인쇄작업을 해도 넘치는 물량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

계약을 해지해도 의뢰가 겹겹이 쌓여 있으니 배가 부를 법도 했다. 칼자루를 쥔 측은 인쇄소였고 의뢰를 맡긴 업체들도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광필이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히 꾼들이군요. 형님, 이제 우짭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수밖에. 차라리 잘 되었어. 이참에 우리가 출판사를 하나 인수하도록 하자고.”

“아니, 저희가 인쇄소를 말입니까?”

“그래 이제 우리도 재정에 여유가 있으니, 출판업 쪽에도 도전해 보자고. 사람이 어찌 밥만 먹고 사나, 먹을 걸로 배 좀 불렸으면 이제 마음의 양식도 필요하지 않겠나? 활판기랑 수동 반절 재단기만 갖다 놔도 도움이 많이 되겠지.”

“팜플렛하고 홍보 비용만 아껴도 상당할 거 같은데.”

미래에야 격세지감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당시의 인쇄소는 엄연히 사치세와 유사한 특별 행위세까지 부여받던 직종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출판사나 인쇄소에 다닌다고 하면 지식인으로 선도 보지 않고 딸을 내줄 정도로 인쇄인이 경제적으로도 인정받던 시대였다.

인쇄소 사장이 은행에서 돈을 찾으면 자루에 넣어 매고, 어쩌다 요정에라도 갈려 치면 기생들이 맨발로 달려 나와 업고 간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

그래서 이억수 사장처럼 출판업을 하는 사업가가 지역의 유지 대우를 받으며 떵떵거린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출판업에 뛰어들려면 규제 법안이 정비되기 전이 기회다.’

지금 당장에야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니 개나 소나 돈과 기술만 있으면 뛰어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떤 업종이든 카르텔화가 되기 마련. 이 시기는 필히 매체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기로, 아직 출판계 전반에 관해 제도적인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고 붐이 일어나면서 출판업의 매력도 점점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춘다면 강태준의 입장에서는 외판 제도에 편승하기 유리한 고지에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재갑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출판업을 직접 하는 건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인 듯싶습니다. 현재 국내의 인쇄업체 중에 포장 제본이 되는 곳은 몇 군데 없습니다. 포장지를 인쇄해 팔려면 최소한 수공제판 수준은 넘어야 하는데, 인쇄제본 시장이 열악해서 과연 기계 중 제대로 된 매물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러게요. 재갑이 말이 맞습니다. 설비가 다가 아닙니다. 이쪽은 마땅한 기술자를 구하기가 영 어렵지 않습니까. 수공제판이면 몰라도 사진제판 능력을 가진 기술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기술 전수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던 만큼 사진제판을 배운 기술자는 거의 없는 실정. 그러나 강태준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래도 발품 팔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광필이 너도 아는 게 없나? 서점가에서 카운터도 맡아 봤잖아.”

“그건 그야말로 발만 담근 정도죠. 게다가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저번 사서 일하던 놈이 인쇄소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 뒤로는 연락이 끊겨서. 사실상 아는 거는 없는 수준입니다.”

“그럼 박 여사라도 찾아가 보는 게 맞나?”

미군 쪽 인맥이 넓긴 해도 그녀라고 별로 뾰족한 수가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박 여사가 책과 별로 가깝지 않다는 건 전시용으로 꽂힌 장서 목록만 보고도 대충은 알 수 있었으니까.

고민에 빠진 강태준에 오재갑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아, 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 말이야?”

“이원석 사장님. 그분께 물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문화 쪽 인사와도 발이 넓으시니, 그분이면 뭔가 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 맞다. 이 사장님은 마당발이지. 어차피 이번 어망 제작 문제로 조언을 구할 게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럼 마침 됐군요. 저도 함 같이 갑시다.”

천경물산 이원석이 섬유 사업을 시작한 지 십수 년. 추후 정치인으로도 꽤 입지를 다졌다면 인맥 관리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 테니 문화산업과 관련해서도 쓸 만한 인맥이 있을지 모른다. 강태준이 전보를 보내자 그쪽에서 흔쾌히 답변이 왔다.

-자세한 사안은 도착해서 말하는 게 좋겠군. 마침 보여 줄 것도 있고 말이야.

제1의 섬유도시로 유명한 대구.

대한 스트레치 주식회사로 개명한 천경물산은 대구 신천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수성천변 근처의 뽕밭 위에 지어진 공장은 동구 신천동의 농림학교 부지와 실습장을 매입해 만든 곳이었다. 새로 지은 최신식 건물들이 늘어선 가운데 강태준이 탄 차량이 도착하자 작업복을 입은 이원석이 직원들과 함께 나와 그를 환영했다.

“어이쿠야, 강 사장! 우리 대주주님들께서 오셨군. 자, 어떤가? 새 공장이?”

“사진보다 실물이 낫군요. 인근에 변전소가 있어서 더 좋네요.”

“글치? 나름 이름 있다는 지질학자 놈들을 불렀더니 물 나올 지형이 아니다 부정적으로 말하길래 걱정 좀 했지. 근데 다행히 풍수사 불러 놓고 파 보니 숨풍숨풍 지하수가 나오지 뭔가. 멍청한 놈들. 밥 처먹고 공부만 한 것들이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보나.”

“실무 경험은 없는 놈들이 책으로만 배워서 그렇죠. 무늬만 교수인 인간들이 좀 많습니까? 암튼 이쪽 일대도 많이 발전했군요. 일 년 전이랑 비교하면 진짜 몰라볼 정도입니다.”

덕담에 기분이 좋아진 이원석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요새 직원 충원도 꽤 많이 했네. 이번에 여공을 80명 뽑았는데 무려 지원자가 9,800명이 넘지 뭔가. 경쟁률이 무려 120대1을 넘는 수준이지.”

“호오, 그렇습니까. 엄청난 경쟁률이군요.”

“우리 회사 출신이면 일등 신붓감이지. 대구에서 명문여고 출신들도 많이 지원들 한다네.”

“하하. 아닌 말로 우리 천경이 오성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이 정도로 좋은 기숙사에 근로 조건도 빵빵한 곳이 어딨겠나. 월급도 우리가 그쪽보다 더 많이 주고.”

은근히 오성을 의식하는 이원석이었지만 실제로 자부심을 가질 법했다. 카프로락탐을 주원료로 만든 나일론을 기계에 넣어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을 스트렛치 가공이라고 하는데 이런 공장 설비를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이 바로 이원석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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