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군수 기지 사령부
“썩어 빠진 상인들은 전부 잡아 족치게. 사정 봐줄 거 없어. 가격 제한을 어기는 놈들은 전부 몰수한다.”
박정명은 사정없이 개념 없는 상인들을 때려잡았지만 진짜 코미디는 그다음이었다. 도전행위를 절대 금지한다는 특명을 내리기 무섭게 전력 사정이 훨씬 나아졌다.
뜻하지 않은 호재에 어안이 벙벙한 박정명이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전력이 복구되다니 송전선 복구가 끝나지도 않았다면서?”
“그게…… 아무래도 일부 특권층에서 특선이라는 명목으로 전기선을 몰래 집안에 끌어들여 전기를 사유화하는 짓거리를 자행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빼돌린 전력량이 국내 총 전력의 10프로가 넘는다는 건가?”
“예…… 아무래도 그랬던 거 같습니다.”
박정명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충격을 감안해 쉬쉬했지만, 이번 복구 작업에서 드러난 실상은 그야말로 충격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의 총발전량인 19만 5,000㎾ 가운데 무려 12퍼센트가 넘게 엄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국민 대부분이 호롱불에 의지해 근근이 생활하던 와중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박정명이 한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이 나라엔 죄다 도둑놈만 있나? 이따위로 정부를 운영해서야 어떻게 나라가 굴러가겠어?”
“차라리 이번에 수해가 터진 게 다행인 듯싶습니다. 이참에 도전 문제가 표면화되었으니 적어도 대놓고 전기를 훔치는 짓은 줄어들겠지요.”
특권층의 추악한 민낯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정상화를 한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일까. 암울한 현실에 분노를 곱씹던 그때, 밖으로 나갔던 정오근이 돌아와 경례를 올렸다.
“무슨 일인가?”
“모처럼 좋은 소식입니다. 부산지역 유지들이 수재 의연금을 올려 보냈습니다. 내일 중 대량의 구제품이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아니,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서둘러 유지들의 지원목록을 확인한 박정명의 얼굴이 간만에 밝아졌다. 부흥부에서 이번 수해 복구 비용으로 최소 10억 환 이상이 들 것으로 추정했지만, 가난하기 그지없는 정부로서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대규모 수재 의연금에 기운을 얻은 박정명이 새로 확보한 자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대책을 논의하던 중 옆에서 불쑥 배꼽시계가 울렸다.
꼬르륵…….
큰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돌아보니 옆에 있던 정오근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배를 부여잡았다.
“아니, 아직도 식사를 못 했나?”
“아. 그게…… 회의 중에 빠지기 뭣해서. 아무래도 비는 시간대가 없더군요. 제 불찰입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저녁 10시가 넘은 지 오래. 부하들의 낯을 돌아보니 다들 출출해 보이긴 마찬가지. 모두가 쫄쫄 굶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박정명이 그제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이렇게 되었군. 그럼 임자들. 이 근처에서 마땅한 식사할 곳이 없나?”
“그게 수해 때문에 복구 작업이 한창이라. 복구 때문에 통금 시간이 조정되긴 했지만, 이 시간대면 대부분 음식점은 문을 닫았을 겁니다.”
“이거 참, 곤란하군 그래.”
밖에 나와 음식점을 찾아봐도 딱히 운영하고 있는 곳이 없다.
영관급 장교들이 대다수지만 다들 배를 곯아서인지 지친 표정들이 역력하다.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던 즈음 마침 카바이드 불빛을 받아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저 멀리 어스레한 불빛이 무대 조명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뭔가?”
“보아하니 포차인가 봅니다.”
“오, 그래? 그럼 우들도 저기 가서 요기라도 하지.”
마침 다른 곳을 선택할 곳도 없는 만큼 걸음은 거침없었다.
천막을 헤치고 우르르 들어가자 주인장이 당황한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깨 견장이나 모자에 붙은 말똥과 별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갑자기 고위급 군바리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통에 당황한 주인장이 중얼거렸다.
“저…… 허가받고 영업 중입니다만…….”
하느니만 못한 말에 쿨럭거리는 손님들. 눈치를 보던 사람들 몇이 빠르게 계산하고 자리를 비웠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파악한 박정명 소장이 점잖게 양해를 구했다.
“실례하오. 남는 자리 있나? 다섯 석이 필요한데.”
“예, 저기 자리 몇 개 있습니다.”
군바리들이 나무 의자에 일렬로 앉자 박정명이 주문을 시켰다.
“여기 주메뉴가 뭔가?”
“어묵이랑 참새구이가 제일 많이 팔립니다. 모시조개 술찜도 괜찮고요.”
“그럼, 주인장. 일단 어묵부터 여기 인원수대로 주게. 뜨끈한 국물이랑 같이 아 막걸리도 한 잔씩 말이야.”
“예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요.”
내장과 쓸개를 제거한 참새를 통으로 꺼낸 주인장이 도마 위에 고기를 평평하게 다진 다음 기름과 소금을 발라 꼬챙이에 꿰었다.
지직 소리를 내며 굽는 모습에 침이 꼴까닥 넘어가는 장교들. 카바이드 등이 번뜩이며 꼬록거리니 아세틸렌 가스와 물이 만나면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욕이 앞서서일까. 시장기를 견디다 못한 정오근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간장 대신 소금을 바르는 이유가 뭔가?”
“참새를 구울 때 간장을 바르면 맛이 없지요. 이래 굵은 소금을 뿌리고 누렇게 타도록 구워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누린내도 덜 나고 꼬득꼬득해집니다.”
“호, 그런가? 처음 배웠구먼.”
주인장은 참새를 굽는 짬짬이 얇고 넓은 어묵을 삼등분으로 접어서 대나무 꼬치에 주름지게 꽂았다. 그 손놀림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잠시 후, 고기를 뒤집은 주인장이 박 소장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치를 내밀었다.
“자 출출하실 텐데, 여기 먼저 어묵 한번 들어 보십시오.”
“오, 고맙네.”
박정명은 사양하지 않고 어묵을 한 점 베어 물었다.
오동통한 어묵살에는 진한 감칠맛이 배어 있었다.
이미 간이 되어있어서인지. 뼈까지 아작아작 씹어 먹은 참새구이는 별미 그 자체…….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박정명도 시장했던 터, 잠깐 사이 몇 점이나 해치웠다.
“음…… 이 어묵 맛이 기가 막히는데 국물 맛도 좀 특이하구먼. 지금까지 먹던 거랑 다르게 깔끔하기도 하고 이게 어디서 파는 건가?”
“백경어묵입니다. 엄선한 수리미를 물로 깨끗이 씻고 지방과 이물질을 일일이 제거해 만들었죠. 굉장히 위생적으로 만든 제품입니다.”
“확실히 맛이 달라, 웬만한 데서 만든 음식 하고 달라. 쫀득하고 식감도 좋고. 안 그런가, 김 대위?”
“예, 소장님. 저도 일본식 가마보코는 좀 먹어 봤지만 그 품질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음식 맛에 반해서일까,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 박정명 소장의 관심이 다른 곳을 향했다.
“근데 이 포차도 좀 특이하게 생겼구만. 이건 자네가 직접 주문 의뢰한 건가?”
“그럴 리가요. 이건 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겁니다.”
“같은 회사라면 설마 어묵 파는 곳 말인가?”
“예. 백경어묵 쪽에서 목공소도 하거든요. 거기서 제작한 제품인데, 달세로 빌렸습니다. 매월 차근차근 갚아 가야죠.”
깜짝 놀란 박정명이 다시 물었다. 그로서는 금시초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포차를 그냥 외상으로 내줬다고? 담보도 없이?”
“예. 돈이 없다 솔직하게 털어놨더니 사장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선뜻 임대해 주시더군요. 매달 능력껏 찬찬히 갚으라면서요. 이번에 식재료도 그쪽에서 지원받은 겁니다. 먹고살기 막막했는데 백경어묵 덕분에 살았지요.”
그러자 옆에 얼큰하게 취한 취객 하나가 덧붙이듯 중얼거렸다.
“강태준 사장 말인가. 나도 직접 봤는데 사람이 풍채도 그만이고 호남이야.”
“설마, 직접 만나 보셨습니까?”
머리가 백발인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믄. 예전에 신세 좀 졌다고. 고물상에서 후려쳐 먹으려는 거 막아 준 적이 있지.”
“오. 그러셨습니까?”
“응, 지금 거래처도 소개시켜 주고 빚을 많이 졌지. 그때 도움받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철공소 일도 못 했을 거야. 알고 보니 그 사람도 고생 많이 했더군.”
“고생이라고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자 아무 말 없이 꼴깍이는 노인. 주인장이 다시 술을 채워 주자 취객의 목소리가 길어졌다.
“나도 대충 몇 다리 건너 들은 이야기긴 한디 강태준 그 양반도 꽤 굴곡이 있더구만. 원래는 좋은 집안이었는데 6.25 땜시 쫄딱했다더라고. 선박이랑 땅이랑 강제로 징발당해서 완전히 폭삭했다네. 밑바닥서 자기 힘으로 올라온 사람이니 보통 인물이 아니지.”
“거, 대단하군요. 그냥 보기엔 부잣집 도련님인 줄만 알았더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인간이라 사람이 됐더군. 사실 훤칠하지. 잘 생겼지. 그만한 인물이 없지. 아들놈이라도 그런 인물 있으면 참 든든할 텐디 말이여.”
주인장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이번에 태풍 사라 때문에 생선값도 많이 올랐을 건디 어묵 원가는 올리지 않더군요. 작정하고 올리면 이문이 많이 남을 텐데 말이지.”
“대단한 일이여.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다들 벼룩 간을 빼먹는데 바빠 눈이 벌게졌는데 말이여. 내 장담하는데, 대성할 거야. 암 그렇구 말구.”
묵묵히 술잔을 비우던 박정명 소장은 아까 본 수재 의연금 목록을 떠올렸다.
백경 공업사라. 수재 의연금 란에서 맨 위에 속했던 기업 중 하나다 고두밥을 섞은 막걸리에 취기가 오른 듯 볼이 벌게진 장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흠냐. 세상에 그런 기업가가 있다니, 신기하구먼요.”
“그러게요. 장사하는 족속들은 죄다 돈 귀신인 줄 알았는데 아닌 사람도 있나 봅니다.”
“그 속을 어찌 아나?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모르지.”
“의도가 어쩌든 간에 모두가 좋은 결과 아닙니까? 소비자는 싸게 먹고, 중간 상인들도 돈을 벌고. 손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요.”
“하하, 그러게 세상에 나쁜 놈만 있으면 퍽퍽해서 어찌 사나. 어찌 되었든, 자 임자들 이리 와서 하나씩 더 먹게.”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업가라.
박 소장에게 강태준이란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 *
비슷한 시각 부산, 온천동.
밖으로 마실을 갔다 온 광필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엣취, 춥구만 추워. 무슨 가을 날씨가 이럽니까? 거의 겨울이네.”
“그래서 어제부터 난로 틀었다. 그보다 뭘 또 그렇게 사 왔나?”
강태준이 보니 광필이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종이봉투를 안고 있었다.
“아, 이거요 군고구마입니다. 요 앞에서 군고구마 장수가 돌던데 하도 맛나게 생겨서 왕창 사 왔슈. 많이 사니 서비스로 군밤도 이빠이 줬습네다…….”
“오. 센스 있는데? 덕배야. 점례야. 이리 나와 보련.”
“와! 군고구마다! 광필아재 간만에 돈 썼네.”
“임마 나도 쓸 때는 쓸 줄 안다.”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이 뜨끈한 김이 오르는 고구마를 호호 불며 껍질을 까는 동안. 신문지 위에 재를 털던 광필이가 기사를 발견했다.
[英, 마거릿 공주, 내한 예정. 거지왕 초빙의 인연?]
[옥스팜, 국제적십자 통해 대남 수해 지원금 전달]
후일 스노든 백작 부인이 되는 마거릿 로즈는 후일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며 이미지를 많이 깎아 먹었지만, 당시에는 영국 왕실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으면서 16살 연상의 시종무관과의 세기의 로맨스로 언론의 불타오르게 했던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