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수해 복구
태풍에 제때 대비하지 못한 대가는 컸다. 부산항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포구에 한가롭게 떠 있던 배들은 뭍으로 밀려가 부서지고 일각에는 형체도 알 수 없게 무언가가 즐비하게 떠올라 있었다. 소나무 숲 아래 보이던 밭뙈기는 마치 멧돼지가 파헤친 것처럼 변해 버렸고 방파제 옆의 해안 둑길은 흔적만 남았다.
폐허가 된 유적처럼 돌들이 굴러다니는 광경에 강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피해가 장난이 아니군. 이건 완전 직무유기인데.”
“태풍 전날 조기잡이를 하러 나갔던 어선들이 모두 휩쓸려 실종되었다는군요. 부산항에 정박했던 배들은 거진 다 피항 조치를 제대로 못 했고요.”
“영도항 쪽은? 지평호는 무사한가?”
“다행히 제때 피항했다는군요. 전보가 오는 즉시 빠르게 조치한 덕에 최악의 사태는 면했답니다. 다만 피항 중 유감스럽게도 충돌사고가 있었다는군요. 여기저기 자잘하게 파손된 부위가 많아서 아무래도 수리 기간이 늘어나는 건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조업은 무리지. 그나마 피해가 적어서 다행이야.”
거국적인 재난을 맞아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이 국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동포애를 발휘하여 이재민을 도웁시다.”
이만승은 특별 담화를 발표해 지지를 호소했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운동이 시작됐다. 국가적인 재난 사태에 처음으로 군 병력이 투입되었다. 숨을 돌린 강태준은 이번엔 중앙 수산 시험장으로 향했다. 수산 시험장 앞에 임시로 이재민을 수용할 천막이 쳐진 가운데 복도에 수재민들의 가재도구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태준을 발견한 김응서 해무 계장이 수척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강 선장님이시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항만 과장께서는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지금 대책 회의에 들어가 정신이 없으시네요. 강 선장님의 우려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이거 면목이 없습니다.”
못내 아쉬운 듯 자책하는 해무 계장에 강태준이 그를 다독였다.
“저도 노파심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런 재해를 어떻게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무리지요. 그보다 뭐, 추가로 필요한 건 없습니까?”
“일단은 구호 용품이랑 생필품이 부족합니다. 특히 가옥 파괴가 심해서 숙식이 곤란하고, 의복과 식량도 문제군요.”
“마침 저희 쪽에 공사용 간이 천막이 있으니 되는대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지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읍해 하는 해무 계장의 감사를 뒤로하고 강태준은 어묵 공장으로 향했다. 사하구의 백경어묵 공장에는 연육을 싣고 온 화물트럭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했다. 1.5t짜리 화물차 트럭이 연육 저장고 들머리에 차를 대자 대기하던 공장 직원들이 짐칸에 실린 냉동 연육을 저장고 안쪽으로 하나씩 옮겼다.
어묵 공장 안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바빴다. 어묵 공장 안에는 위생 모자를 푹 눌러쓴 박덕조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색 방진복에 살균 처리된 흰색 고무장화를 신은 채 어묵 만드는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묵 사업이 히트하자 이참에 아주 품질 관리 과장으로 새로 영입한 것이다.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을 주시하던 강태준이 박덕조를 향해 물었다.
“사람들이 아주 바빠 보이는군요.”
“아이구 사장님. 바쁘다마다요. 태풍 피해 이후 주문량이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인력 수급은 그다지 문제없습니까?”
“그러잖아도 이번에 안 선생님께서 조리사랑 요리 보조들을 보내 주셔서 다행입니다. 저기 김세창 씨. 보이시죠? 홋카이도에서 징용 갔다 어묵을 배워 온 어묵 장인인데 하루에 수제로만 3,000개는 족히 만들더라고요.”
과연 숙련된 어묵 장인이 네모진 칼로 손을 탁탁 털어 내자 순식간에 어묵 하나가 완성되었다. 물바래기를 마친 어묵을 탈수하고, 어육을 튀기고, 다시 냉동고로 옮겨 식히고…….
상황을 감독하던 박덕조가 다시 허허롭게 웃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요.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연안엔 꽁치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막상 조업을 나갈 배가 없다고 합디다. 태풍 덕에 조업할 어선들이 대부분 풍랑에 좌초되어 버렸다고. 그나마 성한 배들도 몇 주는 수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네요. 덕분에 저희는 노낫지만 말입니다.”
“일본 쪽 사정이 어떻습니까? 추가 물량이 확보 가능한지는 알아봤습니까?”
“몇 번 전보를 보냈는데 아직 답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단파 방송에 따르면 그쪽도 태풍 영향이 장난이 아니라는군요. 태풍에 직격탄을 맞았으니. 저희보다 피해가 심하면 심했지, 적지 않을 겁니다.”
태풍 사라가 지나간 지 고작 이틀 뒤, 일본 역시 태풍이 직격탄을 맞았다. 만조와 맞물려 이세만에 상륙한 태풍은 2시간 만에 나고야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 항구 근처 4,600여 세대가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갔고, 일본 전역에서 약 4,700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여우를 피하고 호랑이를 맞은 격.
옆에 있던 광필이가 한탄했다.
“무슨 마가 끼었나. 태풍이 연이어 두 번이라니.”
“일본 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저희가 문제입니다. 수해를 입은 농경지만 21만 정보가 넘는다 하니 걱정이 태산이네요. 미국에서 긴급 지원을 검토하고 있지만, 유실된 농경지가 너무 많아 당분간 식료품 가격 상승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오재갑이 침중한 기색이었다. 수확을 앞둔 가을 벼들이 모두 수해에 쓸려 나가 버렸으니. 식량난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치를 보던 춘삼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게요. 시중 어묵 판매가가 대폭 올랐던데, 아무래도 우리도 보조를 맞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도 춘삼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수산업체들 역시 어가를 배로 올린 마당인데, 굳이 저희라고 낮춰 받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직원들도 은근히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이번 태풍으로 부서진 배가 무려 만 척에 육박한 만큼 선박이 아예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업 나갈 배가 사라졌으니 생선 가격이 폭등한 건 당연지사
어묵 원재료인 꽁치 원가가 순식간에 몇 배나 뻥튀기되었으니, 짧게 생각하면 이참에 한몫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강태준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이번에 원료 가격은 올리지 않아. 종전대로 가격을 유지할 걸세.”
“예? 하지만 사장님, 이미 시중 가격이 서너 배 뛰었습니다. 어차피 저가에 공급해 봐야, 도리어 소매상들 배만 불려 줄 겁니다.”
춘삼이의 반론에 강태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바야.”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다른 회사와 달리 후발주자야. 맛은 좋아도 대중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부족하지 않겠어. 소매상들이 원료 수급이 어려워진 관계로 가격 상승 압박에 시달리는 만큼 이참에 어묵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 올린 기회 아닐까?”
춘삼이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음, 발상의 전환이라 괜찮군요. 유통업자들도 이왕이면 저렴한 가격에 원료를 공급받는 것을 선호할 테니 그 틈을 파고들자는 말씀이잖습니까?”
광필이의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자고. 이 어묵을 사 먹는 고객 중 누군가는 집을 잃고, 이번에 수해로 물난리를 겪은 사람들일 것 아니냐. 아무리 돈을 버는 장사라 해도 결국 소비자가 이재민인데 적당한 선이란 걸 지켜야지 않겠어?”
“아. 그 부분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춘삼이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호의호식하며 살다 보니 어려웠던 시절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자책감에 고개를 숙인 춘삼이에 강태준이 대견하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것 보니, 사업적인 감각이 많이 늘어난 거 같구나. 다만 이번 한 번만 장사할 거 아니니 길게 봐야지.”
“명심하겠습니다!”
“아무튼, 어려울 때 먹은 음식이 기억에 남는 법이라지 않습니까? 모두 이번에는 수익성보다는 인지도를 올리는 데만 집중하도록 하자고!”
“예!!”
우렁차게 대답하는 사람들. 강태준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기 힘든 판자촌 사람들에게 동전 하나로 사 먹을 수 있는 어묵이란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
백경어묵이 판매단가를 동결하자 판매량이 급증했고, 원가에 민감한 유통업자들도 강태준 쪽으로 일제히 몰리면서 인지도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강태준은 어묵 점유율이 5프로를 넘었다는 소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묵 쪽은 대충 그냥 둬도 될 거 같군.’
한 번 기세를 탔으니 이제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어묵 총판을 노기철 쪽으로 일임한 강태준은 철거반 일에 열중했다. 이쪽 역시 일감이 넘치기는 매한가지. 태풍에 쓸려 나간 건물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고물상 쪽도 신바람이 났다. 최달건의 목공소 역시 일복이 터진 것인지 창틀이며, 문짝 제작 주문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것이다.
강태준이 각종 합판과 목재들을 목공소 앞에 내려놓자, 물건을 확인한 최달건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이야, 이거는 나왕이랑, 미송 아닌가 이런 귀물을 어디서 구했는감?”
“뭐긴 뭡니까. 이번에 대저면에서 홍수 피해가 나서 적산가옥들이 싹 쓸려 가지 않았습니까? 철거작업 중에 구한 폐자재입니다.”
“오, 그것 대박이구만. 오! 합판도 있어? 합판은 어디서 구했나?”
“지난 철거 기간에 미군 군산 비행장 기지에서 눈여겨보던 겁니다. 보아하니 콘크리트 거푸집용에 쓸 재고가 꽤 남았더군요.”
“그려? 그럼 가져오는 데 돈 좀 썼겠군.”
“무슨 소립니까. 그쪽이 오히려 돈을 냈죠.”
“아니, 폐품도 아니고 이렇게 멀쩡한걸?”
“철거반들이 다들 바쁘잖습니까. 이번에 태풍으로 무너진 집들이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아서 치워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라서요. 부지를 당장 써야 하는 마당에 쓰레기가 널렸으니 그쪽에서도 어떻게든 빨리 치워 달라고만 애걸하더군요. 이거 말고도 남은 물량이 두 배 넘게 남았습니다. 제일 쓸 만한 자재만 따로 모아 온 겁니다.”
“허어. 완전히 노다지네 이거. 이 비싼걸 꽁으로 준다고?”
나뭇결을 쓸어 보는 자세가 황홀해 보이는 것이 천생 목수가 틀림없다.
흠처럼 옹이 모양마저도 매력으로 보이는 모양. 강태준이 슬쩍 물었다.
“아예, 꽁은 아니고, 철거비에서 차감해 주긴 했습죠 그보다, 이쪽은 근래 주문량이 늘긴 했습니까? 이거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면 큰일인데요.”
“그건 전혀 걱정 안 해도 돼. 늘다마다. 아주 쉴 틈도 없거든. 창문, 문짝, 가구 할 것 없이 주문이 아주 쏟아지더구먼. 특히 포차 제작 의뢰도 많이 오는군.”
포차라는 말에 강태준이 흥미를 보였다.
“포장마차 말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이번 일로 밥 굶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인지 장사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더라고. 이재민이 수만 명이니 먹는장사가 좀 잘 되나 근데 이번에 주문들이 아주 까다로워. 무슨 포장마차를 몇천 환이면 뚝딱 만들 수 있는 줄 아는지. 날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요구사항이 뭔데요?”
“불구멍 두 개에 손님 대여섯 명쯤은 동시에 앉아서 식사가 가능해야 한다지 뭔가. 선술집에서 쓰는 널빤지 말고 접이식 식탁처럼 만들어 달라더군. 도면도 없이 말이야.”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