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태풍 상륙
추석 대목을 앞두고 조업 금지를 때릴 수는 없다는 주의.
결국, 강태준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진 과장님, 그럼 저희만이라도 태풍에 대비하는 수밖에요. 그럼 방재 장비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굴착기랑 덤프트럭 좀 빌려 가지요. 수리용 기포 시멘트도 필요합니다.”
“그 정도야 뭐. 일단 필요한 만큼 알아서 가져가도록 하게.”
“배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강태준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뒤에서 혀를 차는 진중보였다.
“사람. 유난하고는. 꼼꼼한 건 좋지만 저래서야 아랫사람이 많이 피곤하겠구먼,”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김응서 해무 계장이 찜찜한 듯 물었다.
“이쪽 업계에서 나름 유명인이던데 충고를 귀담아들어 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이는 어려도 업계에서는 귀신으로 통합니다.”
“허허. 뱃놈이 무슨 점쟁인가. 괜한 노파심이겠지.”
“그래도…… 강 사장 저 사람. 굳이 사서 쓸데없는 짓을 할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지금 저지대 보세 창고 쪽에 있는 물건은 위편으로 옮겨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진중보는 속으로 갈등했다. 막상 상대가 마치 일이 터질 것처럼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켕기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면 좋겠지만 막상 수해가 닥치기라도 하면?
강태준의 방재 제안을 무시했다가 나중에 구설수에 오르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진중보는 결국 생각을 바꿨다.
“에이씨, 뭐, 정 마음이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도록 하게나. 이참에 계류삭이랑 테트라포드도 같이 점검해 두라고.”
“예? 방파제까지 말입니까?”
“어차피 추석 전에 사람들 일 시키면 욕먹는 건 매한가지야. 어차피 쌍욕 들을 바엔 제대로 대비해 두는 게 낫겠지.”
어차피 욕 들어 먹을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않은가.
강태준이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오니. 준비를 마친 오재갑은 이미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항구 쪽은 대체 어쩐답니까.”
“아주 귓등으로만 들은 건 아닌 것 같으니 무슨 조치는 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피항 조치까지 내리는 건 무리인 듯하더군.”
“예? 피항 조치를 거부하다니. 태풍이 진짜로 오면 자기네들도 손해 아닙니까?”
춘삼이의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책임지기 싫은 거 아니겠나 일단 문제가 안 터지면 쓸데없는 짓 했다고 조인트나 까일 테니 말이야.”
“애초에 그 짝은 뭐든 적당주의에 복지부동이 최선 아니겠습니까. 딱 욕먹지 않을 정도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다고 봉급을 더 주진 않으니까.”
김광필의 신랄한 말에 춘삼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언제 그냥 가만있으라고 했나.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대비하는 수밖에. 그보다 굴착기는?”
“곧 도착할 겁니다.”
덤프트럭과 굴착기가 도착하자 강태준은 축대와 옹벽을 보강하고, 흙으로 꽉 찬 배수로를 일일이 파냈다. 인부들과 함께 삽질하던 강태준이 배수로에서 파낸 흙을 덤프트럭에 싣고, 인근 공터로 옮겼다. 어느새 진흙 범벅이 된 광필이가 진흙에 떡칠 된 우비를 벗으며 군화에 들어간 흙을 털었다.
“휴. 이제야 대충 끝났네요. 이게 무슨 난리법석들인지.”
“고생했어. 배수 펌프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나?”
“예.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인근 재해 취약지는 전부 점검한 상태입니다. 양수기 상태도 이상 무입니다.”
땀을 닦은 강태준이 춘삼이를 보며 물었다.
“용호루 쪽은 준비 끝났던가.”
“예. 지붕에 임시로 방수 천막을 덮기로 했습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천막을 결속하고 10㎏짜리 모래주머니들을 촘촘히 얹어 보강 조치를 했고요. 이 정도면 아마 태풍이 아니라 태풍 할아버지가 와도 괜찮을 겁니다.”
“잘했다. 동네 마을회관에도 일러서 태풍 대비 권유 좀 해 봐. 응급 구호 세트도 확보하고. 쌀과 식수, 비상용 구호물자도 최대한으로 비축해 둬야 해.”
늘어나는 일감에 숨을 고른 광필이가 땀을 닦으며 툴툴거렸다.
“아니 형님, 명절이라 식자재 가격이 많이 비싼데 그건 좀 과하지 않겠습니까?”
“준비해서 나쁠 거 없지 않나. 나도 예측이 틀렸으면 하지만 일이 터지고 난 뒤에는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낫겠지.”
강태준의 논리정연한 말에 광필이 역시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침수 예상지를 돌며 방재 조치를 하던 강태준은 입간판과 각종 시설물에 대한 고정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예방조치를 겨우 끝마칠 무렵, 부산항 앞바다는 점점 험악해졌고 너울성 파도는 점점 거대하게 변모했다. 점점 바람이 거세지며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자 급기야 굵은 빗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기후예보는 긍정론 일색이었다.
-치익…… 태풍의 기세는 곧 약화될 것이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
희망 섞인 예보와는 반대로 추석 전날 새벽에 내리던 부슬비는 이내 폭풍우로 변했다. 태풍 중심부가 통영 부근에 상륙하고 일본 오키나와섬 서쪽 해상을 거쳐 동중국해에 이르면서 잠시 약화되었던 태풍의 기세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명절 전일, 저녁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 소리와 빗소리, 나무들이 우짖는 소리에 지붕이 덜컹거릴 정도. 지붕 보강을 위해 나온 복만이도 난데없는 천둥소리에 깜짝 놀란 듯 하늘을 돌아보았다.
“이런 미친! 이게 뭔 일이랍니까!”
“거, 시끄럽게. 기와 더 날아가지 않게. 단단하게 붙들어 매.”
“아따 불안한데, 번개 떨어지면 어떡하게?”
“안 맞아 임마. 아따, 임마. 그거 하나 제대로 안 잡아?”
눈앞이 번쩍이게 뒤통수를 맞고 나서야 순순히 손을 보탠 복만이. 비바람이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해 천장에 멍석을 가져다 못을 박은 강태준이 쫄딱 젖은 몸으로 집안에 들어왔다. 실내는 윙윙대는 바람과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마치 폐병 걸린 사람처럼 쌕쌕대는 바람 소리와 휘몰아치는 바람에 사람들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날 무렵 태풍이 지나가고 거짓말처럼 날이 밝았다. 태풍이 마침내 영일만으로 빠져나가자, 오후 늦은 시간에는 언제 비바람이 있었냐는 듯이 맑게 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강태준 일행은 눈앞에 드러난 참상에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저 멀리에서부터 수확기를 앞둔 밭이 뿌리째 뽑힌 채 잔해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저분하게 쑤석거려진 꼴이 개펄처럼 처참하기 그지없다.
알곡이 영글어 수확을 앞두었던 벼들도 논바닥에 맥없이 쓰러졌고, 밭두렁에는 채 회수하지 못한 볏가리들이 남은 채 썩을 날을 기다리는 모습.
초점 잃은 눈동자.
넋을 잃은 농부들이 하늘을 보며 한탄하는 모습에 절로 숙연해지는 사람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광필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폭탄이라도 맞은 건가?”
“헐, 이거 완전 개판 오 분 전이군.”
“뭘 그렇게 멀뚱하게 보고 있어? 어서 나갈 채비부터 하자고.”
강태준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일행이 빠르게 움직였다. 부산 시내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가로수가 뽑히고, 집이 무너지고 마치 폭격을 맞은 분위기.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 그 자체.
각종 부서진 집기와 터를 잃은 가축들이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 을씨년스러운 가운데, 새벽부터 엄습한 폭풍우로 창고 가옥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태풍이 우리나라에 상륙하지 않고 비도 없을 것이라던 관상대의 예보는 완전히 빗나갔다.
사람들이 진흙이 덮어 버린 도로변을 치우는 동안, 오재갑이 자전거를 탄 채 이쪽으로 달려왔다. 멀쩡한 오재갑을 확인한 강태준이 감격의 포옹을 했다.
“다행히 무사했군. 혹여 늦는가 싶어 걱정했지 뭔가?”
“어젯밤 엄청난 천둥 번개에 폭우가 내려 뜬눈으로 밤새웠는데, 집이 고지대라서 다행히 수해를 면했습니다. 근데 도로가 진창이라 차는 도저히 다닐 수가 없더군요. 통신이랑 교통은 모두 두절되었더라고요.”
“혹 용호루는 어찌 되었는지 확인했나?”
“오면서 살펴봤는데 그쪽도 다행히 무사합니다. 다행히 태풍의 직격탄은 피했더군요. 근처 방풍림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준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그거.”
강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열심히 방재 조치를 했다 해도, 태풍이 직격해 버리면 피해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내 모든 항구와 포구를 휩쓰는 중에도 방풍림이 방패 역할을 해 준 탓에 용호루는 의외로 멀쩡했다.
그 외에 치밀한 사전 조치 덕분일까 직원 중 인명 피해도 없었다.
천운에 감사할 새도 없이 강태준의 관심사는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꽁치 창고는 좀 어때?”
“창고는 무사합니다. MSG 공장이랑 면도기 공장도 괜찮습니다. 미리 가재도구를 치워 둔 탓에 별다른 피해는 없더군요.”
“다행이군. 저지대라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한숨 돌렸네.”
“배수로를 제때 판 게 신의 한 수입니다. 자칫 잘못했음 그 비싼 재료들을 다 버릴 뻔했습니다.”
노기철의 보고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잠시 오재갑이 침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는 나름 피해가 거의 없지만 다른 곳은 말도 아닙니다. 도로랑 제방이 무너지고, 이재민이 속출했다는군요. 실종자와 사망자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군.”
“남부민동 쪽으로는 용지 창고가 붕괴되었답니다. 산복도로 위에 짓던 판잣집 중 절반 이상이 바람에 휩쓸려 무너졌다는군요.”
부산 세관 소속 보세창고가 침수되는 등 부산에선 피해가 잇따랐다. 해안 둑 붕괴로 마을을 끼고 돌던 모든 농경지는 물바다로 변해 버린 것은 물론 해안가의 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름다웠던 동백섬 역시 끔찍하게 변했다.
개울은 물론 바닷가로 통하는 길까지 그대로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당시 태풍의 경로에 위치한 일본의 미야코섬에서는 최저 해면 기압 908.1밀리바 최대 순간 풍속 64.8 m/s의 기록적인 값이 관측된 걸로 보고가 올라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낙동강 유역에 남은 것은 흙탕물 웅덩이와 뻘흙뿐.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방 후 최대 풍년이라던 영남의 곡창지대가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흥분한 언론들도 관상대의 무능함을 성토하며 너 나 할 것 없이 관련 기사를 쏟아 냈다.
[태풍 사라 북상 마리 이후 최대 이변]
-이번 추석날 한반도를 덮친 태풍 사라는 열대저기압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카테고리인 5급까지 발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번 태풍의 피해는 600만 환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거제군의 경우 구조라 마을 전체가 통수되고 장승포 쪽은 마을 절반이 물바다가 되는 등 대규모 침수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번 수해로 인한 사망자만 최소 팔백여 명, 이재민은 최소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