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추석 손님
마당에 모인 인원이 커다란 돌절구에 번갈아 가며 떡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반죽을 치대느라 이마에 땀이 맺힌 점례가 약간 숨찬 기색으로 물었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오빠야 금방 온다더니 왜케 늦었나?”
“아 중간에 일이 좀 있어서…….”
가까이 온 점례가 옷 냄새를 맡으며 킁킁거렸다.
“아니 설마, 셋이서 뭐 먹고 왔죠? 튀김이랑 분식 냄새가 나는데?”
“내가 닌 줄 아냐? 시장 냄새가 밴 거지. 자, 여기 속 사 왔다.”
시치미를 뗀 광필이가 슬쩍 봉투를 내밀자, 강태준 역시 태연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디 보자, 우들이 도울 일은 없나?
“빨리도 말씀하십니다요. 반죽은 다 되었으니 송편 빚을 준비나 해야지요. 퍼뜩 손부터 씻고 오래이, 어무이랑 이모님들 엄청 바뿐기라.”
“오케이. 바로 교자상부터 가져오마.”
안으로 들어간 강태준은 마루에 신문지를 촘촘히 깐 다음 꿀에 잰 깨와 콩, 밤, 대추 같은 재료들을 놓고 송편 빚을 준비를 했다. 엉겁결에 자리에 앉은 광필이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뭘 어떻게 도와주라는 건가. 난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뭔 남자가 송편 하나 안 빚어 봐요. 자, 이렇게. 요로콤시 반죽을 때서 동글게 만든 담에 소를 넣고, 이렇게 접는 거지요. 참 쉽데이?”
순식간에 반달로 접힌 송편이 예쁘게 접히자 강태준도 따라 해 보았다.
“대충 이렇게 하면 되나?”
“와, 오빠 잘하네. 모양이 많이 해 본 솜씬데요?”
반달같이 만 것이 정말 이쁘장한 모습에 감탄하는 사람들.
모양도 모양이지만 놀랄 만한 것은 속도였다. 순식간에 일렬로 완성되는 반달 모양에 어머니도 토끼 눈이 되었다.
“우리 아들이 언제 실력이 이렇게 늘었데?”
“어르신들이 그러시더군요. 송편을 못생기게 빚으면 마누라 얼굴도 호박 된다고. 그래서 연습 좀 했습니다.”
“호호. 그거 누군지 몰라도 말 잘했네.”
“그럼 우리 재갑 오빠도 마누라 얼굴은 걱정 없겠네. 근데 우리 광필 오빠는 좀 문제가 있어 보이네요.”
줄로 잰 것같이 일정한 크기의 오재갑과 달리, 광필이의 송편은 삐뚤빼뚤하기 짝이 없었다.
속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꿀깨가 터져 흘러나온 모습에 점례가 눈을 흘겼다.
“아이쿠, 오빠야 이게 뭐꼬? 완전 뭉개 버렸네.”
“아니, 뭘 어때서? 어차피 떡인데.”
“어휴. 좀 예쁘게 좀 만들어 보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성의 없게.”
“가스나야, 이게 최선을 다한 거다. 음식은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아니. 소를 조금만 넣지 뭘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 익기 전에 다 터지겄네. 그리고 무슨 꿀깨를 이렇게 팍팍 넣나?”
그 말에 광필이가 떳떳하게 말했다.
“내가 먹을 거니 말리지 마라. 니가 내 마누라냐? 아따 저 가시나 누가 데려갈지 벌써부터 걱정이구만.”
“우리 점례가 한 성격 하지. 그래도 생활력 강하고, 이만한 신붓감이 어디 있나?”
“아이쿠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형님 참한 신붓감은 다 죽었나. 저라면 첫날밤에 야반도주하고도 남지요.”
학을 떼는 광필이에 입을 삐뚜름하게 한 점례가 말했다.
“오빠야는 남 걱정 말고 본인 짝이나 찾으레이, 학부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혼자인교?”
“일이 바빠서 그렇지. 평소에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그 말에 풋 하고 콧방귀를 뀌던 점례가 이죽거렸다.
“머라카노? 맨날 술 처먹고 꽐라되서 방구석에나 디비져 있으니 짝 만날 기회가 있능교? 그 몸뚱이가 절구통이지, 어디 사람 몸인가. 아랫배만 뒤룩뒤룩 나와서는.”
“가시나야. 이 오래비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걱정은 니부터 해야 할 거 같은디. 오빠야는 이렇게 살아도 뭐 아쉬울 필요가 없어요. 세상에는 취향이란 게 있고 오빠야는 꽤 능력 있는 사람이거든. 안 그러냐 재갑아?”
묵묵히 송편을 빚던 재갑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원래 남자는 얼굴보다 능력 아니겠습니까. 뭐 얼굴로 빌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들었냐? 응? 우리 점례는 신경 끄자?”
“그거야 잘 포장해서 하는 말이고 재갑 오빠도 그짓말은 못하잖우. 자꾸 그렇게 현실 도피하지 마요. 그러다 진짜 혼자 늙어요. 광필 아재.”
“이 조막만 한 게 진짜? 내가 어딜 봐서 아재야?”
투덕거리는 두 사람 덕분에 송편을 빚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빚기를 마친 후 시루에 여러 날 전에 깨끗이 손질한 솔잎을 갈피마다 깔아 쪄 낼 준비를 마쳤다.
손 크게 열 소쿠리 가득 빚은 송편은 귀갓길 직원용으로 나눠 줄 예정이었다.
일을 마친 뒤 허리를 쭉 편 광필이가 기지개를 켰다.
“아이구야. 이게 대체 뭐라고. 허리 아프네.”
“그러게요. 생각보다 빡세네.”
“집안일이란 게 티는 안 나는데 손은 많이 가는 거거든. 니들은 밖에 나가 있거라. 전 부치면 부를 테니.”
대충 송편 빚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풍경 소리가 들렸다. 종 밑에 달린 생선 모양이 딸랑거리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랄까.
다만 우중충해진 하늘에는 어느새 구름이 짙게 끼어 있었다.
“근데 날씨가 좀 그렇네요.”
“그러게, 바람이 좀 부는데……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네. 이거.”
광필이의 말대로 하늘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비가 좀 올 것 같은 것이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거, 라디오나 틀어 볼래. 춘삼아.”
“예.”
춘삼이가 주파수를 맞추자 치칙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뉴스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북태평양 사이판섬의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14호 태풍 사라가 일본 오키나와로 향하는 중입니다. 현재 관측에 따르면 태풍은 중심 기압 906밀리바 중심 풍속 65㎧를 유지하면서 대만 북동쪽 300㎞ 해상에 도달할 예정이라고 하며 오는 17일쯤에 제주 지역이 영향권 내로 들어올 것으로 보입니다…….
관상대 기상예보는 이번 태풍은 우리나라에 상륙하지는 않고, 대한해협 지나가면서 많은 강우도 없을 것이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이판섬이면 위치가 어디지?”
“북위 13.6도 동경 146.5도 됩니다.”
뱃사람답게 벽에 걸린 지도를 보던 오재갑이 대답하자 춘삼이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거리가 꽤 되네요. 설마 여기까지 오지는 않겠죠?”
“태풍이 북상한다니. 이거 기분이 싸하구먼. 사라? 이름도 거시기하고 말입니다.”
걱정하는 복만이의 말에 광필이가 껄껄 웃었다.
“뭘 그리 걱정하고 그러나. 이정도야 통과의례지. 연간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태풍이 몇 갠 줄 아나, 무려 80개가 넘어.”
“아니, 그렇게 많아요?”
“그려.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거, 안 그렇습니까 형님?”
동의를 구하는 광필이었지만 심각해진 강태준의 입가는 딱딱히 굳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놀란 광필이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아니, 형님? 뭐 생각하십니까?”
“지금 태풍 사라호라고 했지?”
“예. 형님. 무슨 문제라도.”
태풍 사라호. 중심 기압 952밀리바에 최대 초속 85m로 광복 이후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남긴 태풍이 아닌가.
“아, 이럴 때가 아니로군. 직원들은 내일부터 휴가라고 했지?”
“예. 형님.”
“미안하지만 그건 안될 것 같군. 직원들 휴가 며칠 보류시키고 전원 태풍 대비에 투입하도록 해.”
“예? 갑자기 무슨?”
“아무래도 이번 태풍은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그래.”
“예? 하지만 형님, 관상대 쪽에서는 북상 중 비바람이 약화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일본 기상청 쪽도 태풍이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한반도에는 상륙하지는 않을 거 같다던데요.”
오재갑의 항변에 강태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솔직히 관상대 놈들을 믿을 수 있나? 일본에서도 오 년 전 토야마루호 때. 기상예보만 믿고 출항했다가 1,159명이나 익사하지 않았나. 솔직히 우리는 그쪽보다 장비도 별로 아닌가. 수은온도계 같은 재래식 장비 몇 개 갖다 두고 주먹구구식으로 기상예보를 하는데 제대로 태풍 경로 예측을 믿을 수 있겠어?”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그럼 우리도 철저하게 대비해야지. 양수기랑 중장비부터 확인하고. 인부들도 불러와. 일단, 태풍에 취약한 창틀부터 보수하고, 지붕 고정하게 말이야.”
서둘러 명을 내린 강태준이 바람막이를 챙겨 입었다.
곧장 방을 나서는 모습에 어머니가 붙잡았다.
“아니, 식사도 안 하고 어디 가니?”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찮아서 일단 부산 해무청에 갔다 오려고요. 아, 광필이는 무안 쪽에 퍼뜩 전보 하나 넣어서 선박을 피항시키고. 창고랑 시설물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대략적인 지시를 내린 강태준은 곧바로 좌천동으로 향했다. 강태준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해무청 시설국 소속 진중보 항만 과장이었다. 원양어선과 관련하여 크고 작은 사무를 처리해 왔기 때문에 평소에 해무청 소속과는 알고 지내는 사이.
평소에 안면을 트고 지내던 진중보는 강태준의 말에 미심쩍은 기색으로 말했다.
“부산항을 폐쇄하는 게 좋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예. 지금 관상대에서 기상예보가 오보일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사태가 다급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관상대 쪽에서는 태풍이 약화될 거라는데. 게다가 이쪽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잖나?”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보 아니겠습니까. 제가 조업 중에 겪어 봤는데 적도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은 처음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며 발달하는 게 보통이지만, 북위 30도를 넘어서면 동쪽으로 휘어지며 움직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규모가 평소보다 훨씬 큽니다. 태풍이 상륙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합니다.”
“괜히 겁주지 말게. 저기압인 태풍은 고기압을 뚫고 북상하진 못해. 태풍이 북상하면서 부산 부근을 통과한다 쳐도 북상 과정 중에 흩어지면 그닥 두려울 것 없네. 태풍과 편서풍의 방향이 반대라면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북상하면서 서서히 약화 과정에 있다니 걱정할 필요 없네.”
심드렁한 기색이 별로 우려하는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강태준은 간곡했다.
“태풍의 중심에서 가까운 지역은 위험반원 안이 아니라도 피해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초속 40m 이상의 강풍이 바닷가에 불어닥치면 분명 엄청난 해일과 폭우를 동반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인명 피해 등이 우려되는 지역에 현장 점검을 실시해야 합니다. 피항지 안내랑 피해 복구 계획과 인명구조 준비도 필요하고요. 최악의 경우에는 휴교령도 고려해야지요.”
그 말에 진중보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다.
“이보게. 강 사장.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피항 조치라니. 그게 보통 일인 줄 아나. 더욱이 이미 폭우에 대비해 배수 펌프에 대한 가동 준비를 마쳤고, 방재 훈련도 충분히 했다네. 더욱이 낼 모래부터 대목 아닌가. 일 년에 몇 번 없는 명절인데.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하면 뒷감당이 문제지. 문제가 안 생기면 잘못하면 정 맞아.”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만약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명절을 잘 쇠는 것보다 피해 대책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무방비로 있다가 태풍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그땐 큰일입니다.”
“허허. 이런 일 한두 번 겪나. 유난 떨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하겠지.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게.”
“그래도 최소한 조업을 금지하고, 피항 조치 예고를 해야 합니다.”
“어허 이 사람아. 나라고 왜 찜찜하지 않겠나 싶겠나. 하지만 이건 내 권한 밖이야.”
강태준이 몇 번이고 거듭 설득했지만 진중보는 요지부동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