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93화 (93/361)

93화 어묵 장사

지속적인 연구 결과, 생강과 로즈마리를 넣은 시료가 가장 기호도가 높은 결과를 보였다. 노기철이 보고를 올렸다.

“생강과 로즈마리를 첨가하는 것이 비린내랑 잡내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생강이야 구하기 쉽지만 로즈마리라…… 다른 대체재는 없습니까?”

“뭐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맛의 궁합이란 면에서 이쪽이 낫더군요.”

“흠. 오래돼도 상관없습니까? 말린 거라도?”

“네네. 괜찮습니다. 일단 차로 마시기보다 냄새를 제거하는 용도니까요.”

강태준이 머리를 굴렸다. 찻잎이라 따로 수입선을 확보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 그렇게 생각을 굴리다 보니 언뜻 미군부대 쪽이 생각이 미쳤다.

“그럼 동결건조 티백을 활용하는 쓰는 게 좋겠군요.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할 테니 맛 개선에 좀 더 신경 써 주세요.”

그렇게 어묵 개발이 착착 진행되는 동안, 강태준은 어묵 공장 부지를 찾느라 바빴다. 강태준이 염두에 둔 곳은 감천마을 주변. 산자락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계단식 집단 주거 형태와 모든 길이 통하는 미로 같은 골목길이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여기가 좋겠군.’

강태준이 선점한 곳은 장림동 일대. 을숙도를 마주 보는 해안가가 배가 드나들기 좋으면서 신작로가 구비되어 교통상 장점이 있었다. 그 사이 강태준은 산업용 냉동기와 어묵 가공에 필요한 성형기, 민찌기 등 필요한 설비들을 미군부대를 통해 일률적으로 구입해 어묵 제조에 착수했고 설득에 낚인 황철득은 목 좋은 곳을 골라 백경어묵 1호점을 열기로 했다.

가게를 차린 곳은 부평깡통시장.

그 일대는 6.25 이후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캔 제품들을 갖다 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상업 구역으로 당시에는 꽤 번화한 장소 중 하나였다.

일행이 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 하나가 눕기 힘든 좁은 길목 양옆과 가운데에 포장마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채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추석이 가까워서일까. 엄청나게 몰려든 인파에 춘삼이가 감탄할 정도였다.

“와, 유동 인구가 엄청 많군요.”

“이쪽이 사실 어묵의 성지거든 소위 어묵 좀 먹어 봤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지. 예전부터 가마보코(かまぼこ) 전문점으로 유명했던 곳이니까.”

“맞습니다. 이쪽 사람들은 입맛이 아주 까다롭죠. 1호점 개장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에 아무 이유 없는 게 아닙니다.”

맞장구를 치는 노기철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본격적으로 시세를 확장하기 전에 개선할 점을 알아 두는 것이 좋겠지.”

“예. 일단 선호하는 식감이나 종류는 뭔지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대부분 이쪽에서 파는 어묵들의 경우 밀가루 대신 감자 전분을 많이 쓰고, 어육 함량을 높인 것이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러자 춘삼이가 자못 궁금한 듯 물었다.

“흠. 밀가루보다 전분이 더 인기가 있다니. 감자 쪽이 더 찰기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예. 손님들이 식감이 고소하고 약간 더 쫄깃한 걸 선호하더군요. 씹는 맛이 있어서 그런가? 그래서 아무래도 이 부분은 보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옆을 걷던 안연복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식감 개선이라. 그러면 우뭇가사리 같은 걸 추가해 볼까요?”

“흠, 한천도 좋겠지만 스지(소힘줄)를 쓰는 게 어떨까 싶군요. 예전에 스지 어묵탕을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고요. 거기에 배추를 넣으면 맛이 더 시원해질 거 같은데.”

“오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시도해 봐야겠군요.”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은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다.

야시장 분위기가 나는 가판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꿀꿀이죽을 파는 아주머니가 동냥 깡통에 죽을 한가득 부어 주고 있다. 당면 국수, 씨앗호떡을 파는 상인들이 보이고 길거리 좌판에 앉아 이쑤시개를 쑤시는 상인이나, 장사하다 길거리에 앉아 국수 한 그릇 말아먹는 지게꾼들이 심심찮다. 그리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구석 백경어묵이라는 현판 아래 황철득이 가판을 올려 둔 채 어묵을 팔고 있었다.

옆구리 터진 잠바를 입은 황철득이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강태준을 맞았다.

“어서옵쇼! 손님.”

“어이구 장사가 잘되네요. 할 만하십니까?”

“어이쿠야! 강 사장! 귀한 몸이 어인 행찬가?”

“장사 잘되나 보러 왔죠. 뭐 할 만하십니까? 제가 방해라도 하는 게 아닌지.”

주위를 둘러본 강태준이 슬쩍 매대 옆을 둘러보자 황철득이 씨익 웃었다.

“무슨 소리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라 좀 한가하네. 그래, 뭐 하나 시킬 텐가?”

“순대 2인분요. 아 어묵탕이랑 튀김도 알아서 주십시오.”

“오키. 잠시만 기다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황철득이 찜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꺼내 쑹덩쑹덩 썰었다.

튀김이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튀겨지는 동안 매대 앞에 걸터앉은 강태준이 음식을 기다리며 물었다. 솜씨를 보니 서툰 기색이 없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갑자기 직업을 바꿨는데 일이 힘드시지 않습니까?”

“하하. 말을 말게. 삭신이 쑤시네. 안 쓰던 근육을 써서인지 하루 지나면 온몸이 뻐근하지 뭔가. 매일 일찍 일어나는 것도 곤욕이야.”

“하하. 장사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도 안색은 전보다 훨씬 좋으신데요.”

“노가다보다야 훨 낫지 않나. 나도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공사판을 전전할 수는 없지 않나. 뭐 하다 보니 칼 잡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 이쪽이 더 적성인 거 같기도 하구 말이여.”

“근데 황 조장님. 그 옆구리 터진 잠바는 뭡니까? 신경 쓰이게.”

광필이의 지적대로 마치 터진 김밥처럼 튀어나온 털이 엉성한 것 정말로 볼품없기 짝이 없다.

“아, 이거 군대에서 입던 깔깔이여. 보기엔 거시기해도 엄청 따뜻하다고.”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게 몇 푼이나 한다고 쪽팔리게. 이참에 개업 선물로 한 벌 맞춰 드리지요.”

“아녀아녀…… 됐어.”

그 말에 눈치를 보던 황철득이 손을 입가로 가리며 귀엣말을 속삭였다.

“임마. 이거 다 상술이여. 이런 거 입고 있으면 손님들도 불쌍해서 많이 사 준다고. 왜 터진 잠바를 입느냐 묻는 사람도 있고, 그러면서 손님이랑 자연히 말문도 트고 그러는 거지.”

“와. 이 사람 보게, 그거 완전 사기꾼 아닙니까?”

“사기는 무슨. 임마. 원래 장사란 게 그런 거지.”

눈을 찡긋하는 모습에 어이없어하는 광필이. 강태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나름대로 전략이 있으셨네요. 그래서 매상은 괜찮습니까.”

“뭐, 이제 자리 잡아 가는 중이여. 노가다 뛸 때보다야 적지만 슬슬 입소문이 나는 거 같구먼.”

“뭐 힘든 점은 없으십니까?”

“가끔 열불 날 때가 있긴 해. 어젠가 넷이서 순대 1인분 시켜 먹구 어묵 국물만 딥다 떠먹는 놈들도 있더군. 거기에 어묵은 써비스로 달라지 않나. 확 대갈빡을 후려갈겨 버리고 싶더구만.”

“와 그 자식들은 진짜 진상이네요.”

“콧구멍에 어묵꼬치를 확 처박아 버리려다 말았지 뭔가. 면전에 대고 확 소금을 뿌릴 수도 없고.”

“고생 많으십니다. 텃세 부리는 놈들 있으면 말씀하십쇼. 지가 확 혼쭐을 내줄 테니.”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는 광필이에 황철득이 껄껄 웃었다.

“하하. 괜찮아. 요 동네 건달들도 생각보다 착하거든. 처음에는 눈 마주치기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괜찮다네. 게다가 요새는 단골도 생겼거든.”

“오, 단골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엉. 석두라는 녀석인데 골 때리는 놈이지. 개소식 때 어묵 국물 간 맞추느라 쩔쩔매고 있었는데 등치는 산만 한 놈이 어슬렁거리면서 걸어오는 게 아닌가. 뭐 옆구리에 야시시한 아를 하나 끼고 말이야. 덩치는 씨름선수 저리 가란 데 면상은 축구화로 몇 대 밟아 놓은 것처럼 뭣 같더만. 임산부도 보면 지릴 얼굴이라 쫄아서 말없이 순대만 썰고 있으니 갑자기 그러는 거야.”

“거 어묵 양반! 어묵 국물 좀 팍팍 주시라. 기가 막혀서 왜 내가 어묵이냐고 하니 어묵 장수니 어묵이 아니고 뭐냐 되묻더라고. 옆에서 끼고 온 가스나가 같이 어묵 양반, 어묵 양반 거리면서 까르륵 웃는데 확 열이 뻗치더구만. 그 뒤부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어묵 양반이라고 부르더군.”

“그래도 벌써 단골을 만드시다니 능력 좋으신데요.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 그 녀석과 정이 어지간히 붙었나 봅니다.”

“정은 무슨, 순대는 매번 올 때마다 일 인분만 시키고 어묵 국물만 몇 번 떠 달라고 하고. 지는 손이 없나 귀찮아. 그거. 국물은 셀프라고 했더니 그게 뭔 뜻이냐 묻더라고. 무식하긴.”

그 말에 강태준이 중얼거렸다.

“한 말씀 하시지 그랬습니까?”

“물론 나라고 못 하나 한마디 했지. 당연히.”

“오, 뭐라고요?”

“순대만 드시지 말구 튀김도 함께 드시라고. 그랬더니 그 뒤부터 튀김도 가끔 같이 시켜 먹드만. 크허허”

“아이구 형님도 참…….”

광필이의 말에 웃음기를 띈 황철득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첫인상은 영 별로였는데 자주 보니 정들더라고. 외상값 떼먹지 않고. 밥값도 꼬박꼬박 내는 게 어디야. 가끔 깡패들 훼방도 막아 주고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네.”

“호. 그렇습니까? 거, 건달이라더니 나름 의리가 있습니다요?”

“그려, 사실 같이 온 가시나가 진국이지. 이름이 혜미라고 했던가. 새벽녘엔 술 취한 손님들을 끌고 와서 매상을 팍팍 올려 주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아담해서 키도 조막만 한 게 위장이 얼마나 큰지. 튀김이랑 어묵을 혼자 10인분씩 아작 내더구만. 가시나 델꼬 살려면 거 식비 많이 들겠어. 크하하하.”

강태준 일행이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사이, 다시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깨끗이 그릇을 비운 강태준이 서둘러 일어나며 지폐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일어나 볼게요.”

“형님! 분탕 치면 말씀하십쇼. 확 회 쳐 버리게 말입니다.”

“허허. 말만 해도 고마우이. 어여, 살펴 가.”

“그럼 노 이사도 이제 들어가요. 우리는 장 좀 보고 가겠습니다.”

“넵. 사장님도 들어가십쇼.”

시장 밖으로 나온 강태준과 광필이가 서로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분위기 생각보다 괜찮지?”

“위생 상태도 괜찮고, 아직까진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군요.”

강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넙치 형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더군.”

“석두 근마가 좀 맹하긴 해도 주먹 하나는 매운맛이거든요. 그래도 동네서 방귀 좀 뀐다는 녀석이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래도 영종도 해변가에 건달들이 득세하고 있다던데 주의를 해야지. 한 손으로 열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음식점 쪽도 신경 써야 할 거 같아. 뭣하면 바지선 끌어다 놓고 훼방을 놓는 경우도 있다니까.”

광필이가 걱정 말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 점은 걱정 마십쇼. 일단 경찰서 쪽으로 기름칠 많이 해 두었으니. 게다가 이번에 저희 수산대 출신들이 대거 해무청 공채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저놈들이 아무리 주먹 잘 써 봐야 깡패들이죠. 관에는 못 개깁니다.”

“그래 홍콩영화를 보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들도 관에는 못 개기는 법이지.”

“허허 그런가요? 그보다 아까 그 메뉴에 모시조개 술찜 같은 거 추가하는 거 어떻습니까? 아까 보니까 좀 아쉽더군요.”

“흠. 생각해 보겠네. 그럼 이쯤에서 헤어지지. 우린.”

돌아가는 길, 추수가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집 근처 논밭은 모두 누런 금빛 일색으로 반짝였다. 해방 후 최대의 풍년이라는 말에 걸맞게 번쩍이는 황금빛 띠가 물결을 이르는 동안 집에 도착하자, 명절 떡 찌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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