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집단 지성
창고에 미끼용으로 가득 쌓인 냉동 꽁치를 구매하겠다는 제의에 심익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창고에 보관된 꽁치 잔량을 전부 사겠다고?”
“어차피 보관하고 있어 봐야 보관비만 나가지 않습니까. 제가 따로 쓸 일이 있어서요.”
“뭐. 나야 환영이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
“가능하면 전부. 있는 대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깜짝 놀란 심익태가 되물었다.
“정말로 말인가. 족히 30~40톤은 훌쩍 넘을 텐데 정말 모두 매입이 가능하겠나?”
“네네. 가격만 맞으면 전부 구매하고 싶습니다. 대신 좀 싸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얼마를 원하는데?”
“시가의 8할 정도 되는 가격이라면 전부 수매할 의사가 있습니다.”
득실을 따져 봐도 꽤 그럴듯한 제안. 꽁치라는 생선은 사실 굉장히 흔하디흔한 생선으로 옆 나라 일본에서만 당시 연간 50만 톤씩 잡히는 물고기인 데다 더욱이 참치란 놈이 미끼의 선도에 민감한 놈인 만큼 지금 재고를 털어 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강태준이 그 엄청난 물량을 가지고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흠. 그럼 그렇게 많은 물량으로 뭘 하려는 건가?”
“하하. 생선으로 할 거야 먹는 사업밖에 더 있겠습니까?”
“먹는 사업이라? 어떤 거?”
“하하. 그건 영업상 비밀입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마시길. 어차피 제품이 나오면 조만간 아시게 될 테니까요.”
눈을 가늘게 뜬 심익태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혹시나 우리 쪽에 해가 될 일은 아니겠지?”
“그 점은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설마 제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설마 그런 일이 발생할 시엔 그땐 제 정산금에서 까십시오.”
“알겠네.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뭐.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네.”
뭐 새 미끼야 나중에 신선한 것으로 다시 구해도 되니 지금 골치 아픈 재고를 털어 버리는 것이 이득.꽁치 공급 계약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제품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꽁치 중 탄력이 강하고 신선도가 양호한 것을 고르게.”
어묵 제작은 특별히 초빙한 박덕조 씨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채육 과정을 거친 생선 살을 이물질을 제거하고 15분간 고기갈이를 한 다음, 소금과 각종 향신료, 전분 소금과 중력분, 설탕, MSG, 맛술을 골고루 섞어 만들어 낸 것. 대략적인 실험이 끝나자 노기철이 직원들을 연구실 시식대로 사람들을 한가득 불러 모았다. 고물상은 물론 운수와 철공소 직원들까지 함께 모인 자리였다.
“저희보고 음식 심사평을 해 달라고요?”
“그래. 아무래도 사람이 먹을 음식이니 최대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게 좋겠지. 다들 솔직하게 품평해 주게. 일단 국물 대신 어묵만 준비했으니까 말이야.”
강태준이 박수를 치자 식품연구소 직원들이 트레이에 실린 어묵을 대령했다.
두께 1cm, 넓이 4cm로 길게 성형한 어묵이 먹기 좋게 썰어져 있었다.
김이 올라오는 따끈한 어묵에서 풍기는 냄새가 식욕을 돋군다.
수북이 쌓인 어묵 더미에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오 냄새가 좋네요. 와, 색이 양쪽이 다 다른데 종류가 다른 겁니까?”
“예. 왼쪽은 판붙이 어묵, 오른쪽 물건은 기름에 튀긴 튀김어묵입니다.”
“판붙이요?”
“아 나무판에 고기풀을 반원통에 붙여 쪄 낸 걸 판붙이라고 하지요. 쪄 낸 어묵은 연한 황토색을 띠고 단단한 반면 오른쪽은 색감이 거칠고 살짝 부풀어 올라 있지요? 이건 튀긴 겁니다.”
박덕조의 설명대로 두 종류의 어묵을 번갈아 보던 광필이가 젓가락으로 눌러 보며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질감이 좀 다르네.”
“와사비 넣은 간장이랑 토마토케첩도 있으니 취향대로 발라 드십쇼.”
먼저 어묵 튀김을 간장에 찍어 본 광필이가 케첩에 찍은 튀김을 우물거리더니 감탄사를 뱉었다…….
“아뜨뜨,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더니 진짜 맛있네요.”
“튀긴 어묵을 토마토케첩을 살짝 발라 먹으니 상당히 신선한데요”
“확실히 탄력이 있는 게 탱탱합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맛있어요. 비법이 뭡니까?”
“그러게. 집에서 만들면 보통 떡이 되던데.”
그러자 노기철이 답했다.
“얼음물로 반죽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눅진해지는 걸 막아 주지요. 그럼 튀길 때 더 바삭바삭해집니다.”
“오 그래요? 그럼 속에 넣은 건 오징언가요?”
“예. 오징어를 살짝 데쳐서 넣었습니다. 쟁반에 어묵을 담아 냉장실에 넣었다 꺼내면 덩어리가 지고 쫀득쫀득한 고기풀이 되지요. 이 과정을 반복하며 최적의 찰기를 찾아낸 거죠.”
“오, 어쩐지 맛이 쫄깃하더라.”
입맛에 맞는지 꼬치 하나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운 광필이가 다시 하나를 더 들었다.
신중히 맛을 보던 오재갑도 입맛에 맞는지 끄덕였다.
“저는 쪄 낸 게 더 취향이네요. 아주 담백한 것이 아무리 먹어도 안 질리겠습니다.”
“그러게. 이건 간장보다 케첩이 더 잘 어울리는구만.”
연이은 호평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료가 좋아서 그렇지. 길거리에서 파는 어묵들은 전분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저희 제품은 어육 함량이 높으니까. 생물 함량이 높으니 그 식감과 맛의 차이가 큰 거지.”
“그러게요. 여기 곤약이 들어가면 더 맛나겠는데요. 씹는 맛을 더하게 맛살을 첨가하거나 약간의 채소를 첨가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 그렇네요. 저는 풋고추를 조금 넣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그럼 느끼하지 않아서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럼 저는 도미살 추가!”
“나는 돼지고기 팍팍! 아, 아예 돼지고기로 만드는 건 어떤가요?”
“야, 그건 어묵이 아니잖아. 임마.”
꼬치를 든 사람들이 각자 의견을 나누며 즐거워하던 찰나, 문득 뒤쪽에서 싸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상을 쓴 안연복이 우두커니 서 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표정의 노기철.
춘삼이가 어묵을 떨어뜨리더니 딸꾹질을 했다.
“끕!”
“아…… 안 선생님.”
“거, 맛있습니까들.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의 노기철이 도로록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대략 난감하다는 표정들. 뒤늦게 어묵을 흡입하던 광필이도 꼬치를 먹다 말고 켁켁대자 안연복이 한심하다는 듯 물을 따라 주었다.
“하하. 그게 아니구.”
“꼭꼭 씹으세요. 무슨 걸인도 아니고. 누가 뒤에서 쫓아옵니까?”
등을 두드리자 광필이가 가슴을 치며 콜록거렸다.
“깜짝이야! 체할 뻔했네.”
“요사이 통 안 보이시길래. 어디 놀러들 갔나 했습니다. 다들 여기서 작당 모의 중이셨군요. 저만 쏙 빼놓고.”
혀를 차는 안연복이 주위를 둘러보니 움찔한 사람들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큼큼, 헛기침을 한 강태준이 머쓱하게 그를 반겼다.
“아니, 안 선생님? 주방일은 어쩌고?”
“지금은 쉬는 시간입니다. 저만 빼놓고 쑥덕거리길래 궁금해서 당최 참을 수가 있어야죠. 헌데 저만 따돌리다니 이건 좀 서운하네요.”
입을 불퉁하게 내민 것이 섭섭하다는 티가 역력하다.
불쾌감을 감지한 강태준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하하. 배려 차원에서 그런 거죠. 설마 저희가 따돌릴 의도겠습니까? 하도 바쁘시니 그러잖아도 이제 평가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요리사님. 설마 저희가 따돌릴 의도였겠습니까? 거 마음 푸십쇼.”
“정말입니까? 그거.”
미심쩍은 눈초리에 강태준이 상대를 에둘러 추켜세웠다.
“당근이죠. 어디 저희 같은 아마추어가 우리 안 선생님 같은 프로에 어따 비비겠습니까. 일단 사람 먹을 수준은 되어야 품평이라도 받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런가 광필아?”
“그렇지 우리 안 슨상님이 어떤 분이신데. 우들이랑은 레베루가 다르지요. 레베루가.”
“괜히 시간 낭비하시지 말라고 저희끼리 연습한 겁니다.”
연이은 띄워 주기에 뚱했던 얼굴이 점차 누그러졌다.
샐쭉한 눈매를 한 안연복이 아직 식지 않은 어묵에 관심을 주었다.
“큼큼…… 그럼 어디 보자, 그럼 저도 함 시식해 보도록 할까요?”
“예. 여기 있습니다.”
얼른 어묵을 대령하는 춘삼이에 신중하게 시식하는 안연복.
내심 긴장한 노기철이 꿀꺽 침을 삼켰다.
“어, 어떻습니까?”
“맛이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정말입니까?”
“하지만 상품화하기엔 좀 아쉬운 점이 있네요. 기름에 튀기는 시간이 좀…… 기름이 온도가 오르기 전에 너무 빨리 넣은 거 같은데. 여기 보면 겉면과 단면의 색과 질감이 비슷해야 정상이거든요. 그래야 속까지 열이 전달돼서 골고루 일정하게 익지요.”
“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혹 남은 재료가 있으면 줘 보시겠습니까? 제가 보여 드리도록 하죠.”
팔을 걷어붙인 안연복이 조리실로 들어가 손을 보탰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고로케처럼 노릇노릇하게 익은 튀김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요리사가 손을 본 물건이라서인지 때깔부터가 달랐다.
“와.”
“자, 새로 만들어 본 거니 다들 시식해 보십쇼.”
먹음직스러운 외양에 다들 앞다투어 젓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한 조각 맛을 본 춘삼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똑같은 재료인데 이렇게 다릅니까? 속이 아주 부드러워요.”
“완전 찰지네. 확실히 풍미가 더 살아 있습니다.”
그 말에 안연복이 다시 말했다.
“밑간 된 고기에 튀김가루를 한 번 더 입히고 탄산수로 튀긴 겁니다.”
“탄산수요?”
“반죽에 탄산수를 넣어 주면 반죽 속에 공기가 들어가서 부풀거든요. 그렇게 하면 식었을 때도 바삭함을 오래 느낄 수 있죠. 번거롭더라도 두 번 튀겨야 바삭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료 안의 수분 때문에 금방 눅눅해지니까요.”
“아 그렇군요.”
경청 모드가 된 사람들에 신나게 설명을 이어 가는 안연복이었다.
“오징어는 생물보다 마른오징어를 쓰는 게 풍미를 살리기 더 좋아요. 이 판붙이 어묵도 너무 저온에서 서서히 익히면 안 돼요. 고기풀은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가열하면 잘 부서지거든요.”
“그렇죠. 고온에서 익혀야 탄성이 생기니까요. 저도 그걸 깜빡하다니 참.”
“아니,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아쉬워하는 노기철에 어리둥절한 사람들. 강태준이 대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계란을 프라이팬에서 가열할 때를 생각해 봐. 약불에 익히면 부드럽지만 강불에 바싹 익히면 질감이 단단해지잖아. 온도에 따라 단백질 안의 수분 함량에도 차이가 생기거든.”
“오. 그런가요. 요리라는 게 생각보다 아주 과학적이네요.”
신기해하는 춘삼이의 말에 안연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두부를 생각하면 편하죠. 응고 온도가 너무 낮으면 질감이 부드럽지만, 고온에서 익히면 조직이 견고해지거든요. 그래서 고기갈이를 끝낸 어육을 바로 고온에서 익히는 편이 낫습니다. 물론 너무 센 불에 익히면 식감이 나빠지니 적당히 조절해야겠지만요.”
“흠. 그러면 부재료를 넣는 건 다시 고려해 봐야겠군요.”
“부재료를 아예 넣지 말란 이야기는 아니에요. 전분 함량이나 식염을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어묵이 탱탱하지 않으면 맛이 없으니까. 말보다는 행동이니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가 손을 보태도록 하지요. 국물 만들면서 어묵도 몇 가지 종류 추가해 보지요.”
팔을 걷어붙인 안연복이 솜씨 발휘에 나섰다. 새로 만든 어묵탕에는 완자처럼 생긴 둥근 어묵에 쑥갓을 넣어 청량함이 더해졌다. 이전과는 달리 확연하게 깊은 맛이 났다.
“이야, 뜨끈한 게 속이 확 풀리네요. 국물 맛이 깔끔하고 시원하네.”
“잡내가 하나도 없네요. 여기 면 넣어서 먹어도 되겠는데요?”
사람들의 호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심히 면포에 든 내용물을 살핀 노기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재료는 면포에 담아 팔면 분량 맞추기 편하겠네요. 맛도 일정하게 낼 수 있고요.”
“예. 물에 푹 담근 다음 우려내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에 센 불로 하다가 어묵을 넣은 후에 불은 낮춰 최대한 물이 자작해질 절도로 졸여 내면 됩니다. 중간에 정종이나 소주만 반 잔 뿌려 주면 비린내도 싹 없어지고 말이죠.”
잠시 생각하던 강태준이 문득 아이디어를 냈다.
“저녁 식사 땐 매콤하게 고춧가루를 넣는 건 어떻겠습니까? 감칠맛도 좋지만 칼칼한 맛도 추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얼큰한 게 또 땡기지 않습니까.”
“그러게, 확실히 이건 술안주용이죠. 여기 소주 한잔이면 캬!”
광필이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안연복이 껄껄 웃었다.
“그건 깜빡했네요.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안연복의 지도 아래, 어묵 개발은 빠르게 진척되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