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91화 (91/361)

91화 어묵 개발

소식을 들은 복만이도 매우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버님께서 군납업체로 선정되었다 하니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제가 군무원 됐을 때보다 더 좋아하셔서 솔직히 좀 서운하더군요. 하하.”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장교들 입맛이 좀 까다로운가. 게다가 김필중 중령은 알아주는 미식가라네. 그분한테 인정받기 쉽지 않아.”

“예. 저도 들었습니다. 암튼 고춧가루 군납 덕분에 농촌에 활기가 생겼다더군요. 근래 동네 어르신들이랑 고추 농사지을 땅 보러 다니느라 바쁘시다네요.”

“오 제대로 본격적이구먼.”

“너무 의욕이 넘치셔서 좀 걱정이긴 합니다. 농사를 평생 하셨다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거래처를 확보한 건 처음이라서. 품질을 유지하면서 생산 물량을 늘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 부분은 염려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외삼촌이 마을 이장이시니 물량 확보는 문제없을 테고. 또 이런 부분에는 타협이 없으시니 품질 관리에 소홀하지 않으실 거라 믿어.”

“그럴까요?”

“빈말이 아니다. 다만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니, 어려운 일이 발생해도 혼자 끙끙 앓을까 걱정이야. 그러니 혹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씀해 달라고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강태준도 이번에 상당한 지원을 했다. 농지 확보와 고추를 건조시킬 건조 설비나 보관 창고를 마련하는데 상당한 액수가 들어갔던 것. 사실 이건 강태준의 큰 그림이었다.

‘영농 쪽에 투자를 해야 부지 확보가 쉽다. 조만간 서울 말죽거리나 영등포 땅도 좀 알아봐야겠어.’

50년대 말죽거리는 서울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 이런 말죽거리에 사람이 복작거리기 시작한 것은 서울시에서 영동개발 계획을 내놓은 60년대 중기부터다.

개발 붐이 일어나기 전엔 평당 300원도 하지 않는 헐값이었던 만큼 개발 호재가 확실해지기 전인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투자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같은 시간, 부산에 새로 오픈한 용호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군부대 내 장교들로부터 입소문을 타서일까.

휴가 나온 장병들이라면 한 번쯤 들러보는 장소가 된 것이다.

사실 푸른 기와를 올린 3층짜리 목조 건물의 야경.

식사 후 등대 빛으로 일렁이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전경. 합리적인 가격의 맛있는 요리까지.

손님이 몰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던 강태준이 다시 향한 곳은 풍미 MSG 공장이었다. 하얀 부직포로 된 위생복에 흰 위생모를 쓴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강태준은 2층에 있는 연구실로 올라가자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마스크를 벗은 노기철이 반갑게 인사를 올렸다.

“사장님! 여긴 어쩐 일로.”

“공사다망하다 보니 방문이 늦었네요. 자주 들여다봐야 했는데 바빠서. 조미료 개발에 진척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이구야. 오히려 감사하죠. 이렇게 바쁘신데 와 주시니.”

“그래서 진도는 좀 어떻습니까?”

어째 더 후덕해진 것 같은 노기철이 통통한 볼살을 문지르며 털어놓았다.

“그게 생각만큼 진척이 있지는 않습니다. 안 선생님이 빠지기도 하셨고, 저 혼자 이 공장을 운영하려 하니, 뭔가 허전하더라고요.”

“요새 새로 음식점을 내셨으니 당분간은 정신없으신 게 당연하죠.”

“그러게요. 원래부터 요리사가 본업이셨으니 지금 가장 신날 때가 아닙니까? 가 보니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곧 2호점 생길 분위기더군요.”

“하하 개업뽕이죠. 뭐. 당분간은 계속 호황이겠지만 초반의 기세를 이어 가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그거야 동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강태준이 시선을 주었다. 실험실 안에 이것저것 액체들이 담긴 가운데 피처럼 붉은 기가 도는 액체가 샬례에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갸웃하던 강태준이 관심을 보였다.

“근데 이건 대체 뭡니까? 간장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한번 맞춰 보시죠. 하하. 참고로 식용이니 드셔도 됩니다.”

호기심이 생긴 강태준이 정체불명의 액체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휘저어 냄새를 맡아 보니 간장보다 달짝지근하면서도 구수한 훈연향이 났다. 살짝 혀끝에 대 보니 익숙한 감칠맛이 올라오는 것이 익히 아는 맛이었다.

“혹시 이거 가쓰오부시 아닙니까?”

“네. 가쓰오부시로 만든 효소 분해액입니다. 수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가다랑어가 생각났지요.”

“향이나 맛이 좀 미묘하게 다른데요?”

“뭐 여러 가지를 짬뽕해 넣어서 그렇습니다. 해산물을 효소 분해시킨 다음 가쓰오부시 분말을 넣고 2차로 다시 볶아 낸 겁니다.”

“그냥 가쓰오부시보다 감칠맛이 강한 거 같군요.”

“그렇죠? 두 가지 종류를 섞어 쓰니 감칠맛이 증폭되더이다. 논문을 찾아보니 가쓰오부시에는 이노신산(IMP)이란 물질이 있어 향미 증진에 도움이 된답니다. 이노신산이 들어간 제품을 기존의 글루타민산 나트륨(MSG)과 절반 비율로 섞으면 원래 있던 감칠맛이 최대 7~8배까지 증폭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답니다.”

“7~8배 나요? 그럼 조금만 섞어도 수율 개선에 도움이 많이 되겠군요.”

“네. 문제는 가격대입니다. 가쓰오부시는 품질에 따라 맛과 풍미가 천차만별이라. 이취가 적은 상급의 가쓰오부시는 수입가가 상당하더라고요.”

가만히 듣던 강태준이 의문을 표했다.

“흠. 그럼 가공품 대신 냉동 가다랑어를 구해 오는 건 어려운가요? 직접 가져와서 훈연해 볼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그게, 가능은 한데 가다랑어가 워낙 지방이 많은 물고기라. 산패가 빠른 탓에 품질 관리가 좀 까다롭더군요. 옆 나라에서야 신선한 가다랑어를 구하기 쉽지만, 우리나라에선 거의 잡히지 않는 생선 아닙니까. 선도가 좋더라도 가다랑어 특유의 피비린내가 강해 가공이 쉽지 않더라고요. 겨우 생물을 몇 마리 구해서 실험해 봤는데 그 가공 작업이라는 게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흠. 하긴 가쓰오부시는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긴 하죠. 내장과 껍질을 제거해 훈연해 줘야 하니.”

가쓰오부시를 만들려면 먼저 냉동한 가다랑어를 해동해 머리와 꼬리, 내장과 껍질을 제거하고 지방이 많은 부위를 제거한 다음 삶거나 쪄야 한다. 한 번 찐 가다랑어가 식기 전에 뼈를 수작업으로 발라낸 다음 참나무로 약 3주간 훈연하고 곰팡이가 잘 슬게 이 주 정도 보관했다 다시 햇볕에 너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가비 과정을 몇 번이고 계속하면 수분이 빠진 생선은 둔기로도 쓸 만큼 단단해지는데 이게 바로 가쓰오부시의 원료인 것이다. 그 말을 듣던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무래도 가다랑어는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생선이니 가공 노하우가 부족하긴 하겠죠. 그럼 일본에서 전문 업자를 섭외해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예 일본서 가공업자를 섭외하자는 말입니까?”

“뭐. 조건만 좋다면야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규슈의 마쿠라자키(まくらざきし) 시였던가? 그쪽에 있던 업자는 어떻습니까? 그쪽에서 뜨거운 물에 풀어 먹는 차부시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재일 동포 중에 어디 우릴 도울 사람이 한두 명 정도도 없겠습니까?”

“흐음…… 확실히 그건 맞지요.”

“개발하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테니, 최대한 시간을 줄일 방안을 생각해 보자는 거죠. 헌데 원재료는 어떻게 구한 겁니까? 어디서 따로 소량으로 수입 대행하는 업체가 있던가요?”

“아…… 그게 제가 직접 주문했습니다.”

강태준의 눈치를 보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것이 뭔가 큰일을 낸 것 같다.

미묘한 낌새를 느낀 강태준이 침착하게 물었다…….

“직접요? 그럼 이번에 들여온 물량이 좀 되겠군요?”

“그게…… 한 7~8톤은 넘을 거 같습니다.”

“에, 그렇게나 많이?”

강태준의 말이 추궁으로 들렸는지 노기철이 황급히 변명했다.

“그게 소량으로는 판매가 어렵다고 해서요. 가격대를 맞추다 보니 배송비 포함하면 1톤이고 10톤이고 별 차이가 없다 해서…… 대량으로 사면 할인해 준다 하더이다…….”

“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7~8톤이라니. 처리하기는 좀 많은 양이군요. 아무리 발효식품이라고 해도 유통기한이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서 오래되면 노랗게 산패할 테고 말이죠.”

“그…… 그렇지요. 그래서 지금 소비 대책을 알아보고는 있습니다.”

난처한 듯 웃음으로 때우려는 행동에 강태준은 혀를 찼다. 한국에서 가쓰오부시는 그렇게 흔한 식재료는 아니다. 유통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만큼 자칫 잘못하면 많은 물량을 그냥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버리기도 아깝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면 어묵 재료로 활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묵이라고요?”

“이번에 지평호가 예정보다 빨리 귀항하는 바람에 원래 참치잡이 미끼로 쓸 냉동 꽁치 물량이 아직 태동산업 냉동고에 상당량이 남아 있습니다. 그 냉동 꽁치살에 오징어를 섞어서 어묵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떤가요. 거기 가쓰오부시 국물도 추가해서 말이죠.”

“어묵이라…… 그거 그럴듯한데요. 그건 생각 못 해 봤습니다.”

노기철이 호기심이 동한 듯. 살이 오른 턱살을 만지작거렸다.

“예. 이 액기스로 국물 맛을 내면 어묵탕에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삼방 어묵인가 요새 영도 봉래시장 쪽에서 나름 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저도 들었습니다. 박덕조 씨 말이군요. 일본에서 어묵 배워 왔다는?”

“그래요. 부평동 쪽에서도 업체가 들어선 걸로 아는데, 요사이 어묵 시장이 나름 활황 아닙니까. 이참에 우리도 한번 그쪽으로 진출해 봅시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된 이래 어묵 생산은 대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즈음 보광식품과 천진어묵 공장장 출신이 합작하여 영주동 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는 등 어묵 업계는 때아닌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었다

“어묵을 생산하는 것은 좋은데, 어묵 재료로 꽁치나 오징어 같은 주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어야 단가를 맞출 수 있지요?

“단가 면으로 보면 저희만큼 가성비로 승부할 수 있는 업체도 드뭅니다. 어묵 업체 가운데 가쓰오부시를 쓰는 경우는 꽤 드물죠. 그렇다면 맛에서 차별화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군요. 대다수 업체에서 멸치보다 단가가 비싸니 애초에 쓰고 싶어도 쓰기 어렵겠죠. 대량으로 수입하지도 않을 거구요.”

노기철이 동의하듯 말했다.

“하지만 어육 개발을 하려면 안 요리사님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지금은 바쁜 시기니 일단 저희끼리 샘플부터 만들어 보고 나중에 평가받는 걸로 하죠. 일단 원재료부터 수급해 오는 게 순서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개발을 서둘러 보겠습니다.”

어묵 제조에 맘에 굳힌 강태준은 이번에는 태동산업 쪽으로 향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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