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인맥 확장
그로부터 2주 후 미국 육군 통신부대와의 친선경기.
부산지역 하야리아 캠프 인근 운동장.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친선경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푸른 잔디가 깔린 운동장 안, 사열대 위에 옹기종기 앉은 사람들이 목이 터지라 함성을 지르고 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코쟁이들을 뭉개 줘라!”
“USA, USA! kill the bastrard!”
고작 1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응원단이었지만 그 열기만큼은 어지간한 정규 시합 저리 가라다. 국방색 티셔츠에 군복 바지, 운동화 대신 군화를 신은 차림이 영락없는 군대스리가.
잔디도 없는 뻘흙이었지만 운동에 대한 열정만큼은 프로 선수 못지않았다.
체격 차는 상당했지만 앞으로 휴가가 걸려서일까. 나름 분전하는 한국군.
승부는 팽팽했지만, 전반전 내내 양쪽 득점은 없었다.
전반전을 끝내는 휘슬에 경기를 지켜보던 대대장이 기꺼운 듯 박수를 쳤다.
“자자 잠시 휴식! 땀 좀 식히자고.”
선수들이 땀을 식히는 동안 골대 뒤에서 대기하던 상병 하나가 시원한 물 주전자를 가져왔다. 모인 선수들이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는 사이, 중령 마크를 단 대대장 김필중이 모인 선수들을 격려했다.
“자자. 승패는 병가 지상사 아닌가.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우렁찼지만, 표정만큼은 비장하다. 실제로 대대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다.
군대에서 시합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 훈련이다.
승리하면 훈훈한 전우애를 보여 주는 군대였지만, 패하면 그때부터 지옥 주간의 시작이라는 걸 모를 사람들이 아니다. 지난달 굴욕적인 4대0 패배 후 완전군장으로 정신력을 확인했던 장교들의 눈에 결기가 어렸다.
흐뭇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대대장 김필중이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명을 콕 집었다.
“여, 강태준이!”
“예!”
“후반전부터 교체 투입한다. 실전은 처음이지만 몇 번 합을 맞춰 봤으니 전략은 알 테고, 그럼 잘할 수 있지?”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이 첫 출격이지만 그간 시범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던 만큼, 다들 기대치가 상당했다. 강태준의 우렁찬 대답에 김필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만 하지 말고 잘해라. 알겠나. 제군들?”
“예!”
“목소리가 좋군. 그럼 제군들 건투를 빈다!”
기합을 넣은 장교들이 군화 끈을 고쳐 매곤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심기일전한 장교들의 움직임이 달라지자 저쪽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피지컬에서 우수한 미군들이 볼 점유율이 높았지만, 이쪽도 결기가 남달랐던 것. 후반에 미드필더로 나선 강태준도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까.
철통 수비에 걸어 잠근 빗장이 풀리지 않자, 몸이 달아오른 미군 쪽에서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선수 교체!”
교체 카드로 꺼낸 흑인 병사가 들어오기 무섭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몸뚱이만 봐도 탈아시안급의 상대에 놀란 사람들. 옆으로 두 사람을 포갠 우악스러운 덩치에 운동장이 일순간 꽉 찬 느낌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사람들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저거 해리슨 아닌가? 물개가 여길 왜 와!”
“젠장, 여기가 무슨 격투기야. 이건 반칙이지.”
사람들이 볼멘소리로 웅성대자 분위기가 소란해졌다.
키 195cm, 몸무게 130kg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던 해리슨은 부대 내 유명인이었다.
대대장인 김필중이 격하게 항의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요? 선출을 데려오면 어쩌자고?”
“사커랑 풋볼은 엄연히 다르지. 그렇게 따지면 그쪽도 외부인을 영입하지 않았나?”
“아니, 그게 이거랑 같소?”
“뭐 자신 없으면 여기서 기권하시던지.”
할 말을 잃은 김필중은 입술을 깨물었다. 공격수와 교체된 해리슨이 야생마처럼 달리자 장내의 흐름이 달라졌다.
“저런! 제길 몸이 무슨 쇳덩이야.”
“막아! 수비수, 수비수 어딨나?”
피지컬을 바탕으로 해리슨은 마치 전차처럼 필드를 유린했다.
발재간이 뛰어난 수준이 아니지만 피지컬부터가 원체 압도적인 수준이다 보니 마치 탱크가 지나가는 것 같이 닿는 족족 튕겨 나갔다.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된 군인들끼리의 대결이었지만 체급의 벽은 거대했다.
몸싸움의 압박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한국팀 선수들. 어느새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간 미군들은 이제 하프라인 밑까지 전진했다.
골문을 향해 잇따라 파고들던 해리슨은 여러 번 위협적인 슈팅을 날렸다.
위험한 순간이 여러 번.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순간. 해리슨이 찬 공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왔다.
다시금 공을 잡은 해리슨이 재차 대쉬하는 찰나, 강태준이 기습 태클을 시도했다.
“앗!”
빠른 태클에 공이 빠져나가자 곧장 공을 주워 먹는 설인모. 빗살처럼 빠른 달리기로 득달같이 치고 나왔다.
“속공으로! 그렇지 달려!!”
“역습 기회야!”
스퍼트를 올린 설인모가 달려가자 사방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간신히 한 명을 제치는 설인모에 강태준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패스!”
눈 돌릴 새도 없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길게 땅볼을 흘러 넣는 설인모.
길게 킬 패스로 찔러 준 공을 받은 강태준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내달렸다.
“와아아아아……!”
달려온 수비수가 발을 뻗는 모습에 가랑이 사이로 공을 툭 쳐 낸 강태준.
거친 몸싸움에 한 명을 제친 강태준.
저쪽에서는 골키퍼가 다급히 달려오는 찰나 태클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어 죽을힘을 다해 달려드는 수비수들.
‘에라 모르겠다.’
각도는 잘 나오지 않는 방향이지만 태클을 가까스로 피한 강태준이 달려드는 골키퍼를 향해 그대로 슛을 때렸다.
아무렇게나 때린 공이었지만, 의외로 중심에 잘 맞았는지 슈웅 하고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골망을 뒤흔들었다.
출렁!
그야말로 대포알 같은 슈팅.
완전히 타이밍을 놓친 골키퍼가 아연해하는 사이, 흥분한 대기조가 경기장으로 안으로 뛰어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미친 자식! 거기서 공을 때려?”
“이거 물건이구만!”
기대하지 않았던 득점에 흥분한 한국팀은 전보다 고무되었다. 거리상으로 보니 대략 50m가 넘는 거리다. 이 먼 거리에서 중거리 슛을 성공시킨 것은 실업팀 경기에서도 보기 드문 장면이 아닌가.
강태준의 득점으로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해리슨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며 공격을 주도했지만, 군인들의 계속되는 집중 마크에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이어진 후반 28분, 강태준은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에서 프리킥 볼을 헤딩으로 연결해 추가 골을 뽑아냈다.
미군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잇따른 패스미스로 연결이 끊겼다. 멘탈이 흔들린 그들은 역습을 허용하는 추태를 보이며 결국 0-2로 패하고 말았다
승리에 웃음꽃이 활짝 핀 김필중이 미군 장교에게 손을 내밀자 겸연쩍은 얼굴을 한 상대가 손을 마주 받았다.
“허허, 좋은 경기였소이다. 윌리엄.”
“어제 훈련을 했더니 다들 몸이 덜 풀렸나 보군.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지지 않을 걸세.”
“뭐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지요? 약속대로 유엔군 묘지 단장은 그쪽이 맡는 걸로.”
“씁, 굳이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소이다.”
애써 쿨한 척 악수하는 윌리엄 중령이었지만 경기장 뒤편을 돌아보자 어느새 자취를 감춘 마누라에 저조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이 굼벵이 자식들! 빨랑빨랑 못 걷나? 엉! 뺑뺑이 한 번 더 돌려야겠어?”
분노한 상태를 보니 한번 푸닥거리를 할 듯하다.
패잔병처럼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미군들을 보며 득의양양해진 설인모였다.
“크크, 그러게 저 높은 콧대가 납작해진 거 보십쇼.”
“그러게. 그보다 배가 고프군. 한참 뛰었더니 출출한데.”
“뭐 좀 먹지요. 차도 기름 좀 넣어 줘야 달리지 않나.”
등목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군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꼬르륵거리는 것이 허기가 올라오는 모양인지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
총무를 맡은 설인모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럼 범일동 쪽에 익월루나 갈까요? 아니면 평화옥이라던지.”
“둘 다 좀 지겹지 않나? 뭔 깔쌈한 곳은 없어?”
“그게 남은 회비가 좀 거시기해서. 요사이 좀 헛헛하게 쓰지 않았습니까. 하하.”
총무인 설인모가 머리를 긁으며 난색을 표하자, 혀를 차는 사람들.
강태준이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럼 이번엔 제가 신고식 겸해서 모실까요? 사실 이번에 음식점 하나를 오픈해서 말입니다.”
“오 정말인가? 자네가 요리까지 해?”
반색하는 김필중의 모습에 강태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설마요. 제가 섭외했죠. 안 선생님이라고 정통 한식의 대가이신데 대령숙수님 밑에서 체계적으로 요리를 배운 장인이십니다.”
“오 그 정도면 진짜배기 아닌가. 족보 있는 요리사라.”
“그럼 함 가 봅시다. 구미가 당기네 그거.”
지프에 오른 강태준이 장교들을 데리고 해운대 일대로 향했다. 해운대 인근은 본래 어장으로 쓰이던 지역이었지만 6.25 때 미군이 수륙 양용선의 출입을 위해 소나무를 싹 쓸어 내고 난 뒤 여름철 미군들이 휴양지로 자주 찾는 장소였다.
긴 활대를 포개 놓은 듯한 백사장 뒤로는 솔숲이 무성했고, 운촌부터 미포까지 소나무 숲이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강태준이 데려간 곳은 3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 독특한 육모 지붕을 가진 건물은 오래된 목재 비늘 판벽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푸른 기와로 장식되어 있었다.
용호루라는 현판 아래 3층까지 연결된 계단 옆으로 호랑이와 용이 싸우는 듯한 조각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고풍스런 외관에 김필중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이야, 규모가 꽤 되는군. 신축인가? 이 정도면 돈 좀 많이 깨졌겠는데?”
“그러게. 대들보랑 서까래도 춘향목이구먼.”
“신축은 아니고, 옛 가옥을 개량한 것입니다. 안목이 있으시네요.”
“강 사장 생각보다 손이 크구먼.”
푸른 기와에 단청까지 호화롭기 짝없는 배경에 설인모가 놀라자 강태준이 겸손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시가지를 조성하면서 철거하는 한옥에서 폐자재를 가져와 재활용했죠. 사실 유하 씨 댁을 찾아뵈었을 때 영감을 얻었습니다. 저기 처마 끝이 버선코처럼 들려 있지 않습니까?”
“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추녀 모양이 우리 집이랑 비슷하구먼?”
“네네. 그래서 감사할 겸 개업식 전에 첫 손님으로 모시고 온 겁니다.”
들어온 일행은 2층의 온돌방으로 안내받았다. 입식으로 된 방 안으로 들어가니 편백 서까래에서 은은한 나무 향과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이 났다.
미리 방구들을 데운 것인지 바닥부터 훈내가 솔솔 올라왔다.
창가에서 마주한 바닷가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남쪽의 육계도엔 백사장 끝에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동백섬에서 길 안내를 하는 등대 앞으로 통통배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탁 트인 바다 풍광이 운치 있게 자리 잡은 가운데,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핀 사구 뒤로 소나무가 무성하다. 솔향이 느껴질 듯한 풍광에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풍광을 감상하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와우, 그림 같은 풍경이군.”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