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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88화 (88/361)

88화 사랑과 야망

“그러면 저야 좋지만.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일단 피해액 산정부터가 만만찮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피해 범위와 피해액을 산정할 공공 기관도 없으니, 시일이 오래 걸릴 거 같은데요.”

그 말에 설홍규가 다시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옆 나라에서 참고할 사례가 있으니까. 일본에서는 어협의 협의로 피해액을 산정하는데 한국도 구조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으니 조합상의 준용 규정을 찾아보면 적정액을 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보상 범위도 추가 쟁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다만 허가 어업의 경우 평년 순수익의 3년 치만 보상하고 있으니 그 부분도 고려할 대상이긴 합니다.”

설인모의 말에 설홍규가 다시 지적했다.

“이번 경우는 면허 어업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그 부분은 별다른 고려 사항이 안될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어협의 사례도 적용이 애매하지 않을까요? 조문을 해석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흠…… 그렇다면 논리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관건이겠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뼛속까지 법조인들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식사 중 논의가 과열되자 듣고 있던 최 여사가 국자를 치며 논의를 중단시켰다.

“영감, 손님 초대해 놓고, 뭔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시는 거예요. 법률 논쟁 그만하시고, 식사에 집중하셔야죠. 손님이 식사를 전혀 못 하잖아요.”

“아하 미안하구려, 태준 군. 식사 중에 논의가 너무 길어졌군.”

“아닙니다. 관심을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하죠. 법률가의 식견을 접할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에 최 여사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보다 강 군, 어때 음식은 맘에 드나요.”

“예. 너무 맛있습니다. 어머님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데요?”

“맛이 있다니, 다행이네. 난 강 군이 맘에 쏙 들어. 인물 번듯한 것도 그렇고, 능력도 출중하고. 이만하면 일등 신랑감이지. 근데 딱 하나가 걸리네.”

“흠, 그게 뭔지 여쭈어도 될까요? 어머님.”

그 말에 최 여사가 갈비찜를 덜어 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선장 일을 하는 게 좀 걸려. 바다 일이란 게 워낙 험해야 말이지. 강 군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니 굳이 배를 타지 않고도 다른 일에 집중해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나도 동감이군. 하고 많은 사업 중에 원양어업이라니. 자네가 직접 망망대해까지 나가 목숨을 걸 이유는 없잖은가.”

그러자 강태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두 분 어르신께는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따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설홍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나?”

“원양어업은 우리나라같이 자원이 없는 국가에 외화 획득을 할 수 있는 유망한 산업입니다. 게다가 저는 제 직업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흠. 그래도 사장이 배를 탈 이유가 없잖아요. 경영은 뭍에서 해도 되지 않아요?”

“원양어업에 진출하려면 선장으로서 경력과 평판이 대단히 중요하니까요. 대규모 선단을 책임지기 위해선, 오너가 해당 사업의 리스크를 잘 알고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 하지만 그쪽에 진출할 생각이라면 직접 발로 뛰는 대신 유능한 선장을 구하면 될 일 아닌가.”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원양어업은 제조업과 달리 선주가 통제할 수 없는 유인이 많습니다. 게다가 원양어업은 자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일차산업인 만큼 환율 변동이나 유가 상승 같은 외부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사업가가 현장을 잘 알고 개입하지 않으면 정교한 관리 감독이 어렵습니다.”

“굳이 그런 리스크 높은 사업을 하려는 이유가 뭔가?”

“일단 수익성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외화 가득률이 높은 사업이기 때문에, 자본 축적 면에서 유리하지요. 달러를 현찰로 쥐고 있다는 것은 향후 수출 주도형 발전 모델을 택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엄청난 장점입니다. 해외 설비나 기술을 들여오기 아주 유리하니까요. 게다가 바다란 공정한 곳이니까요.”

강태준의 말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바다는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바다에서의 어획고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선장의 능력은 말이 아닌 톤수로 증명하는 거니까요. 게다가 바다는 구태의연한 변명을 들어 주거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성과를 내고 없으면 못 냅니다. 저는 그런 우직한 점이 끌리더군요.”

“실력으로 자기를 증명한다라. 자넨 은근히 모험을 즐기는 유형이군.”

“허허. 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있지요. 공부에도 매몰 비용이 있지 않습니까. 사업이든 법이든 사회의 모든 것은 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죠.”

“모든 경쟁이 목숨을 걸 만큼 치열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게 맞죠. 하지만 한 척에 수십만 달러가 넘는 배를 함부로 누구에게 맡길 수야 있겠습니까? 제가 가장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라면 직접 하는 게 속 편하죠.”

하지만 최 여사는 뭔가 대답이 미진한지 여전히 맘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설홍규도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로 물었다.

“난 멀쩡한 애를 과부 만들 생각은 없네. 우리가 계속 반대한다면 어떡할 건가?”

“두 분이 허락하실 때까지 설득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반대한다면? 그땐 포기할 건가?”

“그땐 보쌈이라도 해 가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뭐라고?”

“배 타고 도망가면 못 잡으실 거 아닙니까. 뭐, 다음에 돌아올 땐 손주라도 만들어 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설홍규의 표정이 이내 시시각각 변했다. 잠시 후, 빵 터진 설홍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와하하하, 그래 사나이가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임자! 거 내가 뭐랬어? 분명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 했지. 임자?”

“뭐, 그럭저럭 합격점은 되네요. 어떤 사람인지 몰라 좀 시험해 봤어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어머님.”

아까 발언은 시험이었는지, 빙그레 웃는 최 여사였다.

옆에 앉은 설인모가 능글거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런 푼수데기에겐 정말 과분한 짝이군. 니가 이런 멀쩡한 남자를 데려오다니 정말 의외구나. 솔직히 오빠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애가 어디 사기꾼한테 낚였나 해서 걱정했거든.”

“오빠!”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이 정도로 출중한 남자가 굳이 너 같은 머스마한테 끌릴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요리도 못 하지 바느질도 못 하지. 그렇다고. 성격이 좋기라도 하나? 사실 니가 공부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지 않니.”

“배우면 되잖아요. 세상에 첨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항변하는 설유하였지만 순순히 수긍하는 최 여사였다.

“뭐. 사실 우리 유하가 우리 집안 씨앗치고는 좀 맹한 편이긴 하지.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도 아닌데 원. 솔직히 시험 도중에 펜을 터트리다니, 그건 실수가 아니라 준비성이 부족한 거지.”

“그러게요. 무슨 선머슴도 아니고. 아귀힘으로 만년필을 부러트리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게 사람인가? 짐승이지.”

“아니, 다들! 그 입 안 다물어요?”

놀려 먹는 재미에 푹 빠진 가족들의 모습에 강태준도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씩씩대는 설유하를 무시한 채 설인모가 진지하게 물었다.

“거기 강군, 톡 까놓고 함 말해 봅시다. 야같이 골 때리는 여자애를 정말 델꼬 살 자신 있어요? 공부 빼고 죄다 빵점인 아인데, 대체 야한테 꽂힌 이유가 대체 뭔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두의 시선이 강태준의 입가에 꽂혔다.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을 하는 설유하에 강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예뻐섭니다.”

“응? 뭐라고?”

“예쁘면 다 용서되지 않습니까. 유하 씨가 제 눈엔 제일 이쁩니다. 애교도 있고.”

푸웃. 물을 들이켜던 설홍규가 헛기침을 했다.

설유하가 째려보자, 설인모도 몹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눈이 삐셨구먼.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그거 농담 아닌데요. 유하 씨가 입술에 루즈만 바르고 밖에 나가도 남자들이라면 열이면 열 돌아볼걸요.”

“흠. 다듬지 않은 원석이다?”

“뭐, 쓸데없는 벌레가 더 꼬이기 전에 낚아채야죠.”

“내가 생선이에요? 낚기는 뭘 낚아?”

안 그런 척했지만, 은근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딸의 히죽거리는 표정에 최 여사가 한결 부드러워진 낯으로 강태준에게 재차 권했다.

“자자, 그만하고. 다 큰 장정이 그렇게 식사량이 적어서야 되겠어. 더 들어요. 음식 식겠어.”

“예. 어머님.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오붓하게 식사를 마친 일행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가 되자 집 밖으로 나온 가족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배웅했다.

“오늘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네. 이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볼 걸 그랬군. 보상 건 관련된 법규는 내 별도로 알아보도록 하지. 여기 인모도 도와줄걸세.”

“정말 감사합니다.”

손을 휘휘 젓는 설인모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아. 요사이 할 일도 없는데, 잘 되었지 뭐. 아, 그것보다 혹시 축구 동호회 가입할 생각은 없나? 자네라면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은데.”

“하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사이 일이 너무 밀려서 시간 내기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나. 인맥 쌓기에도 이만한 일이 없으니. 암튼, 그 마음 변치 말길 바라네. 자네가 아니면 얘는 어디 수녀원에…… 악!”

옆구리를 꼬집힌 설인모가 괴로운 듯 몸을 뒤틀자 강태준이 웃었다.

“그럼 유하 씨 좀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뭐. 갔다 오게나. 어차피 멀리 갈 것도 아닌데.”

“통금 전까지만 돌려보내 줘요.”

부모의 허락을 받은 강태준이 설유하를 데려간 곳은 동천변이었다. 물이 흐르는 동천변을 따라 저 머리 공장 불빛이 보였다. 공장 동쪽 언저리의 논밭에서 푸른 싹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공장 서쪽엔 전차가 덜컹거리며 개천을 가로질러 오가고 있었다.

개울가 사이, 억새 날리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이 탁 트이는지 설유하가 흐트러진 머리를 한 손으로 넘겼다.

“고마워요. 오늘 일…… 정말 수고 많았어요.”

“다들 좋은 분들이군요. 그보다 포상은 없습니까?

“무슨 포상요?”

“흠, 섭섭하게.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습니까?”

장난스러운 표정의 강태준이 고개를 내리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안으로 자기 모습이 비쳐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설유하가 슬쩍 볼에 뽀뽀를 했다. 그 행동에 강태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요구했다.

“거기 말고 여기.”

입술을 손가락으로 두드린 강태준이 입술을 비쭉 내밀자, 얼굴이 붉어진 설유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남사스럽게! 여기서 말이에요?”

“둘밖에 없으니 뭐 상관없잖습니까. 어차피 얼굴 안 보여요.”

“그래도 이건. 좀.”

“통금까지 시간 없습니다. 자…….”

눈을 감은 강태준이 입술을 비쭉 내밀자 설유하가 잠시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부드러운 것이 와 닿자 저도 모르게 상대를 끌어안은 강태준…….

상큼한 시트러스 향에 코스모스와 복숭아 향 섞여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잠깐의 여운이 끝나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설유하가 강태준을 가만히 밀어젖혔다.

“포상은 여기까지예요. 나머지는 나중에…….”

고개를 숙인 설유하가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피하자 강태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한동안 달콤함의 여운과 함께 은은한 향이 남았다.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향.

유분기가 남은 입술을 핥아 보니 왁시한 맛이 났다.

강태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향은 괜찮은데…… 립스틱 하나 사 줘야겠군.”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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