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법조 명가
강태준이 집으로 도착하기 무섭게 광필이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아니 성 왜 벌써 왔소? 유하 씨 사무실에 출근 안 했어?”
“벌써 만나고 왔지. 여, 복만아, 카발 자동차 쪽에 가서 차 한 대만 빌려 와라. 쎄끈한 걸로.”
“차요? 무슨 차?”
“제일 때깔 좋은 걸로. 뭐 크라이슬러나 캐딜락 같은 세단도 좋고. 정 안되면 플리머스라도 괜찮아.”
“아니, 누구 거하게 영접할 일 있소. 생전 사치 한 번 안 부리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차가 왜 필요해?”
“아주 중요한 사업이 걸렸거든. 아무래도 형 모레 중요한 분을 만나야 할 것 같다.”
“그분이 어떤 분인데 그러오?”
“인생에서 중요할지 모르는 분들이지. 암튼 수고비 줄 테니 잔말 말고 어여 갔다 와. 춘삼아 내 치수 알지?”
“예. 당연히 알죠.”
“광복동 부일 양복점에 가서 양복 좀 맞춰 와. 일전에 주문한 게 있으니 감청색, 검은색, 곤색 스트라이프 세 가지 색깔로 이틀 내 맞춰 달라고 하고.”
“그렇게 빨리요? 시간이 빠듯할 거 같은데…….”
“웃돈 주면 다 해 줄 거다. 자, 얼마에 네고할진 네 재량이고, 나머진 수고비다.”
“알겠습니다.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지갑을 꺼낸 강태준이 두툼한 지폐 뭉치를 건네자 넙죽 돈을 받은 춘삼이가 뒷주머니에 넣었다. 웃돈이라기엔 애매한 액수였지만 춘삼이는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춘삼이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 광필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요사이 영업 쪽 업무를 자주 맡기시는군요. 형님. 그쪽으로 키우려고요?”
“응. 아무래도 그쪽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서. 차근차근 배워 가야지.”
바닥부터 배워 나가야 나중에 무슨 일을 겪어도 대응이 쉽지 않겠나. 제법 눈치가 있고 두뇌 회전도 빠르니 제대로 배우면 차차 큰일을 맡길 참이다.
목요일 오후, 카발 자동차에 들른 강태준이 시보레를 빌렸다. 일전에 큰 빚을 진 적이 있는 최진환은 차마 강태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는지 신신당부를 했다.
“이거 박으면 나도 모가지니 살살 운전하소. 우리 회사에서 접객용으로만 쓰는 찹니다.”
“걱정 마소. 형. 내 박으면 깽값 제대로 물어 줄 테니. 뭐 그런 걸 신경 쓰나.”
“말이나. 암튼 조심하라고.”
시계부터 구두까지 풀 세트로 맞춘 강태준이 향한 곳은 서면이었다. 동천변에 위치한 제당 공장 서쪽으로는 전차가 덜컹거리며 동천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비포장도로에는 우마차가 심심찮게 다니고 있었고 먼지가 폴폴 일었다.
선선한 날씨에 하늘이 푸른 것이 꽤 상쾌했다.
범내골 쪽으로 향하는 동안 차량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뻥 뚫린 비포장도로를 지나 동아극장 앞에 도착하자 설유하는 밝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극장 앞에서 빵빵 경적을 울리자 전차 주위에서 주억거리던 비둘기 떼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잠시 후, 선글라스를 낀 강태준이 차에서 내리자 설유하의 눈이 커졌다.
“와, 이런 모습은 처음이네요. 로버트 테일러 같아요.”
“로버트요? 그런 느끼남 이미지는 좀 별론데.”
앞머리에 볼륨을 주고 옆머리를 누른 퐁파두르 스타일. 태닝을 한 듯한 구릿빛 피부에 고급 양복을 걸치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 잘생겼다고요.”
“그래서 반했어요?”
“뭐, 조금은? 근데 넥타이는 안 매 봤어요?”
“간만에 매서. 좀 이상한가?”
“거, 줘 봐요. 칠칠치 못하긴.”
강태준을 마주 본 그녀가 혀를 차며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어 주었다. 정수리에서 향수를 살짝 뿌린 것인지 새콤하면서도 전나무와 이끼를 섞은 듯 시트러스한 향이 났다.
‘미츠코인가?’
“넘 힘주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해요. 아빠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노력해 볼게요. 그럼 타시겠습니까. 아가씨?”
설유하를 태운 강태준은 온천동으로 향했다. 신작로 끄트머리 흙과 돌로 만든 돌담이 눈에 띄는 가운데 우아하게 뻗은 한옥의 선이 손님을 반겼다.
팔작지붕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처마 끝은 하늘을 향해 비상하듯 날렵하게 서 있었다. 지붕을 수리하고 있는지 한옥 위에 올라간 사람을 본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오빠! 거기서 뭐 해요?”
“어이, 유하 왔니?”
설유하와 비슷한 눈매를 가진 근육질의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지붕 좀 고치느라. 기와가 떨어져서 말이야.”
“기와공 시키면 될걸. 오빠가 위험하게 왜 해요? 행랑아범은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당연히 저는 말렸지요. 근데 도련님이 굳이 하신다지 뭡니까.”
한숨을 쉬는 행랑아범에 목장갑을 벗은 그가 서글서글한 눈매로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잔소리는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고치는 게 맞지. 나 이런 거 잘한다고.”
“퍽이나. 저번에 그러다 떨어졌잖아요?”
“허허. 원숭이도 가끔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지. 암튼 자네가 태준인가? 설인모일세. 이 애 큰오빠야.”
“예. 첨 뵙겠습니다. 형님.”
악수를 해 보니 손바닥이 차돌처럼 단단한 것이 꽤 단련한 몸이 아닐 수 없었다. 군법무관 출신이라고 하던가.
턱선은 날렵하지만 온화한 눈매가 제법 호감형이었다. 위아래로 강태준을 살핀 그가 맘에 들었는지 설인모는 유쾌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이야. 시원하게 잘 생겼네. 등빨 좋구먼. 자네 혹시 운동하나?”
“아뇨, 딱히 하는 건 없습니다.”
“에이. 이건 그냥 만들 수 있는 몸이 아닌데? 허벅지도 튼실하고. 혹시 자네 공 좀 찰 줄 아나?”
이곳저곳 팔을 주무르며 관심을 보이는 설인모에 난감해진 강태준이 허허 웃었다.
오빠 대신 얼굴이 빨개진 설유하가 등 짝을 치며 타박을 주었다.
“오빠! 초면에 남사스럽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 미안. 직업병이라. 암튼 안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
설인모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탁 트인 마당이 드러났다.
뼈대 있는 집안이라서일까 잘 가꾼 정원의 정취가 그만이다.
대략 오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한복에 안경을 낀 지적인 외모의 중년 남자가 강태준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청했다.
“자네가 강태준인가? 설홍규일세. 유하 아비 되는 사람이지.”
“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강태준입니다.”
설홍규. 통영 대꼬챙이로 불린 판사로 5공화국 이후 대법원장을 역임한 인물.
4, 5공화국 시절 소신 판결로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 박정명 정권 시절, 하도 자주 소수의견을 내 한동안 감찰 대상에 오른 적도 있을 만큼 강단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일평생 법조계의 양심으로 살아온 인물인 만큼 강태준도 존경의 염을 담아 인사를 올렸다.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르신. 듣자 하니 법조계 쪽에선 살아 있는 사례집이라 명성이 자자하시더군요.”
“거, 누군지 몰라도 첨부터 아부가 과하구먼. 허허 그래도 듣기 싫지는 않으이. 허허.”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요. 특히 세법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경륜으로나 상대를 찾기 힘들 만큼 해박하신 분이라고.”
“뭐, 보는 눈들이 좀 있군. 내가 좀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 하하.”
기분이 좋아진 설홍규가 체통도 잊은 채 웃어 재끼자, 옆에 있던 중년 부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워낙 딸깍발이에 오지랖만 넓은 사람이라. 처세술은 영 꽝이죠.”
“하하. 사람이 어디 완벽할 수 있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그래야 사람 냄새도 나지. 당신도 그게 좋아서 나랑 결혼한 거 아뇨?”
“거, 말은 잘하네요.”
잔소리가 길어질 법하자 곧장 말을 바꾼 설홍규가 아내를 소개했다.
“하하, 소개가 늦었구먼. 여기 이 잔소리꾼은 내 내자일세.”
“아. 어머님. 유하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어머니를 닮아서 아주 미인이었군요.”
“아이참.”
자못 부끄러워하는 딸의 모습에 소담스러운 미소를 지은 최경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 유하 애미예요, 유하가 외간 남자를 데려온다는 말에 좀 놀라긴 했지만, 이렇게 근사한 총각일 줄은 미처 몰랐군요.”
“과찬이십니다.”
“자자, 다들 출출할 테니 저녁 들면서 이야기하지. 듣자 하니 젊은 나이에 사업을 여러 개나 운영한다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들어 보고 싶군.”
내실로 들어가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묵은지에 돼지고기와 두부를 큼지막하게 썰어 푹 끓인 얼큰한 김치찌개에 사골 육수와 함께 푹 쪄 낸 갈비찜이었다. 식사는 정갈하니 깔끔한 것이 적절하게 간이 어우러져 맛이 있었다.
한동안 강태준의 사업 이야기를 경청하던 설홍규가 감탄사를 토했다.
“자네 수완부터가 보통내기가 아니구먼. 전시 재산을 징발당한 경우가 상당수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큰 규모로 징발당한 경우는 처음 듣는군. 그러면 그야말로 적수공권에서 다시 기어 올라온 셈이 아닌가?”
“제가 잘했기보다는 시운이 따랐죠. 작고하신 부친께서 하늘에서 도와주셨나 봅니다…….”
“그러게. 말일세. 그렇게 잘 풀린 걸 보면. 헌데 배 5척이 징발당한 건 많이 심하구면. 아직 정부로부터 보상 이야기가 없다고?”
“예. 아직은요. 서류는 어찌어찌 접수했는데 전혀 소식이 없군요. 애초에 검토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간간이 진행 상황이라도 알려 주면 좋을 거 같은데 말이죠.”
“저런, 그거 유감이군. 아직 전후 복구로 정부 재원이 부족한 데다, 세부 규정도 완비가 되기 전이니 쉽지 않긴 할 걸세.”
이런 상황에서 서운한 감정이 들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겠지만 강태준이 애써 밝게 웃었다.
“정부가 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저 기다릴 수밖에요.”
“흠…… 그래 인모야, 군법 쪽은 네가 전문가니 이 부분에 대해서 함 알아봐 줄 수 있겠냐? 이런 경우는 아무리 전시를 참작하더라도 충분히 구제의 여지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설홍규의 질문에 설인모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규정상 보상 대상에 해당하니 확실히 보상 대상은 맞지요. 주둔군 이용에 따른 토지 등 손실 보상기준이나 수몰 및 기타에 의한 손실 보상 요강을 준용될 것 같습니다.”
“토지와 압류 선박 보상이 늦는다면 어업권이라도 먼저 되찾아 올 방법이 있을까요? 어업권 부분도 도매로 넘어가 버린 상황이라.”
“그럼? 그쪽에 이미 영업 중인 수산업자가 있습니까?”
“아직 신규 면허를 발급받은 업자는 없고. 일부 허가 어업권이나 자유 어업권을 받은 업자들이 종종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수월할지도 모르겠네요. 수산업법상 규정에 따르면 가능성이 있죠. 징발 재산 건은 면허 어업권에 해당하는 문제고, 보상액 산정은 권리에 대한 포괄적인 보상과 권한의 소멸 또는 제한으로 발생하는 통손 보상을 합계한 것이 전체 보상 금액이 될 테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정부 입장에서는 금전적 배상으로는 보상이 어려우니 현물이나 권리로 갈음하려고 하겠죠.”
설홍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맞는 말이지 그럼 몇 가지만 더 물어보지. 아버님께서 멸치 어장을 하실 때 고용한 직원이 몇 명쯤이었나?”
“음…… 제 기억으로 대략 서른 명쯤 되었습니다. 부업으로 일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약 60명 정도요.”
“그렇다면 해고 수당은 전부 지불한 건가? 퇴직금이나 월급 같은 거는?”
“네. 부친께서 챙겨 주셨지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했지만 무고한 직원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당시 금전 출납부와 출근부 서류도 다 있습니다.”
“증거가 있다면 확실히 보상대금 산정 시에 유리하겠군. 잘하면 어구 등 매각손은 물론 해고 예고 수당까지 청구할 수 있겠어.”
전문가의 긍정적인 발언에 강태준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