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86화 (86/361)

86화 연애 사업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볼 수 있는 법이지.’

선장으로서의 과거와 뼈아픈 배신, 죽음의 경험은 그를 예전보다 훨씬 신중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 그가 몸담은 태동산업의 시행착오와 성장 과정은 좋은 교보재이기도 했다.

사실 무수히 설립된 수산회사들 가운데 먼 미래까지 살아남은 기업들은 죄다 후발주자들이라는 것도 강태준을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이다. 2000년대까지 살아남은 수산업체 가운데 68년 이전 창설된 회사는 발해원양과 해신그룹 단 두 곳이었다는 사실은 원양업 진출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방증이랄까.

패가망신하고 싶지 않다면 완벽히 준비되기 전까지 서두르면 안 된다. 그러자 광필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보다 유하 씨한테 전화 안 했소? 기쁜 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야지.”

“응? 여기서 유하 씨 말이 왜 나와?”

“거, 여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형님이랑 그 아가씨랑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형님도 참, 무던하긴 돌아왔음 재깍 연락부터 해야 할 거 아니요.”

광필이의 타박에 어머니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 참하게 생긴 처자 말이냐. 저번에 부두에서 봤던?”

“네. 저도 늦게 알았는데 완전 양갓집 규수더라고요.”

“오 그래? 그런 참한 처자가 있나? 그러면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어서 만나 봐야지.”

“고등고시 끝날 때까지 좀 기다리려고 했죠. 아무래도 지금 연락하면 신경 쓰일 거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사과를 깎다 말고 물었다.

“고시라니? 무슨 시험 준비라도 하는 거니?”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이요. 유하 씨가 법조인 지망생이거든요. 저번에 1차 예비고사 통과해서 이번 시험이 2차예요.”

“고시를 본다고? 그럼 거기 합격하면 법률가가 되는 거니? 판사나 변호사 같은?”

“뭐 그렇게 되겠죠. 3차로 구술시험이 남기는 했지만 그건 요식 행위니까요.”

옆에 있던 광필이가 끼어들었다.

“듣자 하니 한국대 출신 엘리트입니다. 대단한 집안 아가씨죠.”

“한국대라고. 거, 똑똑한 처자구나.”

감탄하는 어머니의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점례가 순진한 어조로 물었다.

“고시라니. 그게 뭔데유?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유?”

“이런 바보야. 누나는 고시도 몰라? 조선 시대로 치면 과거시험이라고. 가시나가 고것두 모르기는.”

덕배가 뺀찌를 주자 발끈한 점례가 양팔을 걷어붙였다.

“이, 쬐끄만 게 싹퉁머리 없이. 주디 함부로 놀리몬, 캭 대갈빡 뽑아 부린다켔지?”

“아. 누나 잘못했어요! 누나!”

“니 이리 퍼뜩 안 온나! 거 늦게 오면 대가리 깨진다.”

점례가 호들갑을 떨자 도망치는 덕배가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그 모습에 광필이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니, 가시나가 저리도 드세니. 우야면 좋노.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나?”

“저래도 다 임자가 있는 법입니다. 듣자 하니 학교에서 인기가 좋다던데요.”

춘삼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광필이었다.

“진짜? 저 왈가닥이?”

“에이. 형님도 참. 건강하고 이쁘장하다고 좋아하던데요. 털털하면서 애들 잘 챙겨 준다고. 고백받은 횟수만 열 명이 넘는다던데요.”

“거, 남자 새끼들이 배알도 없긴. 눈깔이 삐었구만 삐었어.”

“그러는 형님은 소식 있어요?”

“나? 뭐 몇 명 만나 보긴 했는데 별 재미가 없더라고. 딱히 끌리는 여자도 없고.”

강태준이 은근슬쩍 물었다.

“끌리는 여자가 없으면 하나 소개시켜 줘? 참한 처자 하나 있는데. 우리 염 갑판장 처제가 그렇게 미인상이더라고. 남자다운 사람 좋아한다고 하니 어때, 연결시켜 줘?”

“됐수다. 소개라니 부담스러워서리. 그쪽이야 결혼 상대로 보고 나올 텐데 혹여 맘에 안 들기라도 하면 그쪽 입장이 어떻게 되겠소? 난 먹고 죽어도 연애결혼할 거요. 형님.”

“임마, 너 그러다 때 놓치면 후회한다?”

“뭐. 그거야 팔자가 아닌 거겠지. 설마 이 넓은 세상에 내 짝 하나 없겠소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이는 듯 신경질적으로 사과를 푹 찍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어림해 보던 광필이가 문득 깨달은 듯 다시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근디 유하 씨 이미 시험 끝난 거 같은디?”

“엉? 정말인가?”

“나도 가물가물하긴 한대 날짜 혼동한 거 아뇨? 확인해 보고 퍼뜩 다녀오소.”

일정을 다시 확인해 보니 정말 사실이 맞았다. 적도를 돌며 조업에 집중하느라 날짜가 꼬인 것을 깜빡한 것이다. 시험일이 지났음을 확인한 강태준은 부리나케 부경 변호사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간 연락을 자제해 왔던 만큼, 달려가는 발걸음은 갈수록 빨라졌다. 한달음에 법조 거리에 도착한 강태준이 사무실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평화 다방으로 향했다. 1년 반 전에 생긴 이 작은 다방은 의뢰인과 법조인들이 쉬어 가는 아지트로 막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내부 기물은 대부분 중고 물건을 갖다 놓은 덕에 몹시도 단출했다.

삐익 거리는 경첩을 열며 문안으로 들어서니 흥분한 의뢰인들을 다독이려는 듯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방 직원을 통해 쪽지를 전달하려던 강태준은 이내 드문드문한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을 확인했다.

‘아! 저기 있군.’

반가운 마음에 강태준이 살금살금 뒤로 다가갔다. 장난기가 돌아 놀래 켜 줄 의도였지만 그런 강태준의 생각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에 절로 발이 멈추어졌다.

훌쩍훌쩍.

큼직한 눈망울이 퉁퉁 부은 것이 꽤 울었던 듯하다.

혼자서 섧게 눈물을 짜던 설유하는 강태준을 보더니 민망한 듯 눈을 가렸다.

“태준 씨? 어머…… 여긴 어떻게? 벌써 귀국했어요?”

“아니 왜 이렇게 울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황당해하는 강태준을 본 설유하가 강태준을 보더니 다시 울먹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한참을 울던 설유하가 끅끅거리며 코를 훌쩍이자 강태준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에 코를 흥 하고 푼 그녀가 토끼 눈으로 말했다.

“흐끅! 시험을 다 망쳐 버렸어요.”

“울지 말고 설명부터 해 봐요. 어떻게 된 건지?”

“그게…… 시험 중에 만년필을 너무 눌러쓰는 바람에 잉크가 중간에 터져 버려서…….”

“허어 그런 일이.”

히끅거리는 설유하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그만…… 옆에서는 막 째려보고, 시험 감독관님도 황당한지 절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시더라고요. 답안지를 교체하긴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죄다 갈겨썼어요.”

“허, 고생이 많았군요.”

거의 반절쯤 써 내려간 답안지가 완전 엉망이 되었으니 멘탈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가까스로 시험을 끝내기는 했지만, 공부한 만큼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수험의 고됨을 알기에 시무룩한 상대를 보고도 강태준은 달리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는 설유하의 어깨를 토닥이자 그녀가 다시 훌쩍였다.

“저는 이제 끝이에요.”

“그래도 답안지는 끝까지 쓰지 않았나요. 오히려 욕심 내려놓고 간략하게 쓴 게 더 좋은 점수를 받을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없어요.”

“자신을 믿어 봐요. 그간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강태준의 말에 약간 진정된 듯한 설유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히끅거렸다.

“그렇게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이번에 떨어지면 선봐야 한다고요. 아빠가 3년 안에 못 붙으면 시집 보낸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거야 말로만 그러셨겠죠. 시험 붙을 때까지 공부 더 열심히 하란 뜻에서요.”

“흥. 태준 씨는 몰라요. 우리 아버진 말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고요.”

코를 흥 푸는 설유하에 강태준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법고시에 준하는 시험인 만큼 난이도는 상상 초월. 게다가 지금은 천 명씩 막 뽑는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선발 인원이 100여 명도 안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몇 번 정도 물먹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아직 확정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태준 씨는 그럼 내가 아무 남자랑 선봐도 좋다는 거예요? 그럼 나는 콱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눈물을 펑펑 쏟는 설유하의 행동에 영 난감해진 강태준.

다방에 모인 사람들도 이제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이쪽을 흘깃거린다.

난감함에 양어깨를 붙잡은 강태준이 나직이 속삭였다.

“에휴, 뭘 그렇게 걱정합니까. 자 나 좀 봐요. 나 좀.”

“네…… 보고 있어요.”

“결과도 안 나온 일인데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정 안 되면 제가 유하 씨 뒷바라지하면 되지 않습니까?”

호언장담하는 강태준의 태도에 설유하가 문득 눈물을 멈췄다.

퉁퉁 부은 눈꺼풀이 팬더처럼 보였지만 강태준의 눈엔 여전히 이뻐 보였다.

“정말요?”

“그럼 유하 씨. 기운 내요. 이런 때일수록 밥 잘 먹고 씩씩해져야죠.”

설유하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올려보았다. 물기 젖은 눈매가 처연한 것이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한참을 꾸물대던 그녀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물론 뭐든지 말해 봐요.”

“그럼 우리 집에 와 줄래요?”

“네?”

“남자친구가 있다 하면 시집가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요. 그럼 시험 유예도 받을 수 있고…… 또…….”

“그 말은…… 저를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다는 소립니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멈춘 영사기 속의 화면처럼 잠시 정지했다.

어색한 정적이 지나고…….

어느새 음악 반주가 끝난 다방 안은 쥐 죽은 듯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쨍그랑!

“죄 죄송…….”

“허, 괜찮습니다.”

차를 들고 오던 다방 레지가 낭패한 듯 엎지른 차를 치우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모두 흥미 넘치는 눈으로 이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강태준이 고개를 돌리자 일제히 딴청을 피우는 사람들. 사태를 파악한 설유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어, 시…… 실수예요. 실수! 내가 무슨 말을…… 미안해요. 태준 씨.”

“실례 아닙니다. 갑시다.”

강태준이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네?”

“저는 빈말 같은 것은 안 합니다. 유하 씨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줘야죠.”

말을 마친 강태준이 설유하의 손을 꼭 잡았다. 부드러운 손끝에 굳은살이 느껴진다.

진지한 눈빛에 오히려 당황한 설유하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설유하에 강태준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네요. 그럼 지금 당장 아버님께 갑시다.”

“네? 지금 당장요?”

“뭐 기다릴 게 있나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않았습니까?”

“자…… 잠시만요! 대소사를 이렇게 빠르게 결정할 수는…….”

“이런 일일수록 속전속결로 처리해야죠. 자 그럼 일어납시다.”

“예?”

손을 잡은 강태준이 강하게 잡아끌자 얼떨결에 딸려 나온 설유하.

다방을 나온 설유하가 몇 블록 못 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잠깐만! 잠깐만요 태준 씨!”

“왜요?”

“저, 지금 말고, 모레 다시 만나는 걸로 해요!”

“네? 어차피 똑같은데 굳이 그렇게 늦어질 이유가 있습니까? 마침 오늘 이렇게 쫙 빼입고 온 참인데.”

“그…… 그러니까, 부모님께 아무 말씀도 안 드리고 찾아가는 건 실례 아니겠어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최소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또…….”

횡설수설하는 설유하의 태도에 걸음을 멈춘 강태준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얼추 맞았다. 잠시 팔짱을 낀 강태준이 고민하듯 턱을 괴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급하게 서둘렀군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럼 제가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마침 아버지께서 출장 후 돌아오시는 날이 머지않으니 그때 뵙는 걸로 하지요.”

“언제 말입니까?”

“음…… 이번 주말?”

“좋습니다. 그럼 저도 가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혹 일정 변경이 생기면 다시 연락 줘요.”

“네…….”

손등에 키스를 마친 강태준이 유유히 사라지자 설유하는 얼음이 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후 흥분한 그녀가 자리에서 방방 뛰다가 손톱을 깨물었다.

“어머, 미쳤어. 미쳤나 봐! 어떡하지?”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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