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선장 승진
‘무려 일본과 경쟁해서 압도적인 실적을 거뒀다는 사실만으로도 뽕이 차기 마련이지.’
내세울 것이 없는 시절, 이런 뉴스는 애국심 고취용으로도 정권의 업적을 홍보하기에도 좋은 먹잇감이었다. 덕분에 뽕이 찬 지역 언론들에서는 지평호 멤버들을 하나하나 조명해 가며 빨아 주기 바빴다.
아무튼, 지평호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선원들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선박이 계류 장소에 도착하자 던짐줄을 넘겨받은 강태준이 카우보이처럼 돌리던 줄을 던지자 빙빙 돌다 휙 하고 날아간 던짐줄이 가볍게 비트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핀에 걸린 링처럼 매듭이 정확히 꽂히는 묘기에 오재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각도가 예술이군요. 형님. 어떻게 한 겁니까?”
“힘보다는 요령으로 하는 거야. 마지막에 손 놓는 포인트가 중요하지. 너무 늦게 놓아 버리면 줄이 공중으로 그냥 붕 뜨거든.”
강태준이 친절하게 설명하자 용기를 얻은 오재갑이 배운 대로 줄을 던졌다. 모범생인 오재갑이 줄 던지자 대기하던 육상 인원들이 비트에 홋줄을 걸고는 던짐줄에 연결된 홋줄을 끌어당겼다. 계류색을 부두에 연결한 선원들이 양묘기로 팽팽히 줄을 당겼다.
영차~영차~.
홋줄을 감아 돌리던 갑판장이 이내 소리쳤다.
"현문 위치 좋군. 이제 홋줄 고정시켜.”
홋줄을 고정하고 현문을 내기 무섭게 입항 절차가 완료되었다. 제1 부두에 지평호를 고정하고 브리지로 올라간 심익태 사장이 선원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정말 고생 많았소이다.”
“고생은요.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허허, 다들 오늘은 수고했으니 일찍 귀가들 하게. 아, 강태준 항해사랑 양 선장은 따로 남고. 별도로 전할 말이 있으니.”
선원들이 감격의 상봉을 나누는 동안, 강태준과 양 선장은 태동산업 사무실에 도착했다.
따뜻한 녹차를 내온 심 사장이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자 앉게나. 고생들 많았네, 다름 아니라, 도꾸시마 쪽에서 조선 기술자를 따로 불렀네. 듣자 하니 시모노세키 쪽에서 선박 엔진 문제가 재발해 응급처치를 했다지?”
“예.”
“선박 엔진 부품이 미국을 통해 수급해야 하는지라 아무래도 몇 달은 소요될 것 같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요.”
“하는 수 없지. 맞춤형 부품이라 교체가 까다롭나 보이. 그나마 여분이 있는 게 다행이지. 그동안에 선미부 추진기랑 냉동 설비도 고쳐 놓을 생각일세. 이참에 대대적인 개수가 필요할 것 같거든.”
“전면 개보수라.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사실 군에 있을 때 관리가 소홀하긴 했지. 몇 년간 개보수를 제대로 못 했으니 차후에 이런 문제가 없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이왕 고칠 거 깡깡이부터 다시 하려고.”
심 사장은 엔진이 말썽을 부려 귀국을 앞당긴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도 신규 선박 건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다행일세. 한 3개월만 더 지나면 제2 지평호가 완성될 것 같다는군. 아 자네 지적대로 브릿지는 후미에 달기로 했네. 조업을 감시할 수 있게 말이야.”
“그거 고무적인 소식이군요.”
32만 달러를 넘게 주고 불하받은 지평호는 시험 조업선으로 제작된 만큼 여러 방면에서 우수했지만 브릿지가 앞에 달려 선원의 조업 실태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덕분에 오토 파일럿팅을 하면서도 상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새로 건조하는 배의 경우에는 그 단점을 개선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새 배의 선장은 누가 되는 겁니까?”
“누구긴 누구야. 자네지. 여기 선장 할 만한 사람이 자네 말고 누가 있어?”
“아니 제가요?”
언젠가 선장이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심익태가 미소를 지었다.
“허허. 뭘 그리 놀라나. 자네한테 이런 표정이 있는지 처음 알았군.”
“저야 기쁜 일이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1항사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사내 반발이 만만찮을 겁니다.”
“괜찮고말고. 이미 이사진과는 세부적인 이야기를 끝내 두었네. 사실 제2 지평호의 캡틴은 여기 양 선장이 강력히 추천했다네.”
“양 선장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양재문 입장에서야 강태준같이 유능한 항해사가 빠지는 것은 자기 커리어에 하등의 득이 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양재문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가 크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차피 신규 어선을 운용하려면 그만한 경력자를 섭외해야 하는데, 달리 마땅한 인재도 드물고. 적어도 내 욕심으로 후배 앞길은 막지 말아야지.”
“허허, 사실 이사들은 자네 승진이 너무 이른 거 아닌가 말이 많았다네. 그랬더니 양 선장이 그러더군. 강 항해사 같은 사람을 홀대하면 다른 회사에서 반드시 채갈 거라고 말이야. 빼앗긴 뒤에는 늦다고. 그걸 들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사실 좋은 어장을 찾아내는 능력은 강 항해사가 저보다 한 수 위니까요.”
태동산업의 성공을 눈여겨본 선주들이 실제로 러브콜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작 1년 반도 안 되어 무려 두 계단이나 올라서는 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대우임은 틀림없는 사실. 양재문의 대인배적인 행보에 감동한 강태준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나는 솔직히 말한 걸세. 그리고 앞으로 자네 책임이 아주 막중할 거야. 새로 오신 큰손께서 꽤 까다로우시거든.”
“그게 또 무슨 소립니까?”
“최근에 결정된 이야기인데 지금 사모아에서 밴 캠프 말고 신규 고객이 하나 더 들어올 예정이거든. 스타키스트 사가 새 공장을 신설할 예정인데 새로 물량을 공급할 회사를 찾아다니고 있어. 그래서 바로 실적을 낼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스타키스트라면 캘리포니아 최고의 참치 회사 아닙니까? 그쪽에서 벌써 움직였다고요?”
“자네도 아는군그래…… 아무래도 밴 캠프만 꿀 빠는 것이 배알이 꼴렸나 보지. 의욕이 넘치는지 행보가 아주 빠르네. 이미 입어권은 물론 공장 부지를 왕창 사 둔 모양일세. 벌써 일본 측과도 미리 접촉 중이라는군.”
“벌써 말입니까?”
“일단 통조림 공장은 기존 공장을 운영하면서 설비증 개설하려면 시일이 걸리니 생선 필레트부터 만들어서 미리 수출한 생각인가 봐. 그쪽에선 앨버코 말고도 마일린이나 옐로우핀까지 제값을 쳐주겠다는군.”
“그거 희소식이군요. 그럼 그쪽서 생산 예정인 물량은 어느 정도 됩니까?”
“초도 물량은 연간 만 톤 정도? 우리 쪽에는 2,000톤까지 배정할 수 있다는군. 조업이 가능하다면 말이야. 우리 쪽에선 거부하기 힘든 조건인 것이 밴 캠프사보다 톤당 가격을 무려 20달러 이상 더 쳐줄 수 있다더군.”
“톤당 20달러나 더요? 완전히 작심했군요.
“그렇지. 앨링턴 씨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밴 캠프사도 바싹 긴장하고 있다네. 물량 공급이 확실하면 차차 공장을 증설할 예정이라니 말이야. 덕분에 조만간 양륙 물량이 크게 늘어날지도 몰라. 그래서 좀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자네를 추천했지. 누구보다 믿고 실적을 낼 수 있는 사람 말이야.”
부처같이 온화한 얼굴의 심 사장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실력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네. 실력이 있다면 실력에 맞게 대우를 해 줘야지. 어때 받아들이겠는가?”
“감사한 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헌데 어째 어깨가 무겁군요.”
“하하. 원래 직위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그럼 강 선장, 앞으로도 잘해 보자고.”
스타키스트가 사모아에 후발 주자로 오픈식을 치른 것은 63년이다. 헌데 어떤 까닭에서인지 사모아 진출이 원 역사보다 몇 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이게 나비효과인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심 사장의 행동에 신뢰가 묻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강태준이 이 소식을 전하자 사람들도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와, 벌써 선장 승진이라고요? 엄청나게 빠른 출세 아닌가요?”
“지금껏 세운 공이 얼만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인데?”
광필이의 말에 옆에 앉아 사과를 까던 점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요. 축하드려요. 오라버니. 이제 진짜 캡틴이시네요.”
“하하 고맙다.”
“난 우리 아들이 업계에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구나.”
어머니가 몹시 자랑스러운 얼굴로 칭찬하자 옆에서 사과를 까던 복만이도 한마디 했다.
“그럼 어디 봅시다. 지금까지 얼마나 벌었는지. 어획량이 600톤이면, 그럼 대충 15만 불 정도는 되겠고. 그중에 선원 식량 대금이랑 유통 어구 구입 대금으로 2만 5천 불 정도 빼면, 대충 12만 5천 불인가?”
“거기서 부식비, 추가로 보급받은 유류비도 빼야지.”
“그래도 순이익이 11만 불 정도는 되겠네요. 사모아 항차는 비율이 5대5라고 했으니 5만 5천 달러? 그럼 이번에 탄 선원이 17명. 일등 항해사는 기본급만 하급선원의 2배를 받으니 대충 그 비율대로 치면 최소치만 해도 만 달러는 넘게 받겠네.”
“만 달러 정말이에요?”
놀란 점례의 눈이 왕방울만 해지자 강태준이 친절하게 정정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현지인을 6명 고용했으니 거기서 1만 달러는 따로 빼고, 대충 세후로 7천에서 8천 달러 정도 되겠지.”
“8천 달러라 그래두 적지 않은 돈이군요. 그럼 선장이 되면 얼마나 몸값이 오릅니까?”
“그건 모르겠는데, 저번에는 좀 파격적인 조건이었으니 아무래도 보합 요율도 조정할 것 같고, 계약을 다시 하지 않을까. 세부 조건은 별도로 논의하지 않았어.”
그 말에 광필이가 대신 대답했다.
“그건 선장 하기 나름이지. 선장은 실적대로 가져가거든. 일반적으로는 기본급료 외에 보합제로 비율을 나누거나 특수한 경우에는 선장이 순수익의 1할 5푼에서 2할까지 가져가는 경우도 있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많지.”
“순수익의 1할 5푼에서 2할이라 엄청나군요. 그건 어마어마하네요.”
“김칫국 마시지 말고. 그건 순조로이 만선을 했을 때 이야기고, 매번 실적이 좋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애초에 자신 있으면서. 그러려고 배 탄 거 아니에요?”
몸이 달아오른 광필이가 다시 물었다.
“형님, 독립은 언제 하실 겁니까? 차라리 좀 무리를 해도 중고선을 매입해 보는 건 어떨까요. 솔직히 지금 당장 배 끌고 나가도 될 거 같은데 형님이 나가시면 저도 한몫 거들겠습니다.”
“하하. 아직은 너무 일러. 당분간은 실전 경험부터 쌓으면서 평판을 최대한으로 올려놔야 하지 않겠나. 이쪽은 명성이랑 신용이 중요해. 원양어업은 어선 가격이 워낙 거액이다 보니 다른 여타 사업처럼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니 말이야.”
사실 강태준도 당장 시작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원양어업은 본래부터가 자본 집약적인 사업인 데다 정치적인 뒷배 없이는 불가능했다. 태동 심 사장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차관 도입이나 지급 보증, 어업권 확보, 중고선이나 신조선 도입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정치권과의 연줄 없인 시작조차 하기 힘든 사업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