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차도살인
심 사장이 퍼뜩 깨달은 듯 되물었다.
“결국, 자네 말은 미쓰비시와 니찌레이 쪽을 싸움 붙이라, 이 말인가?”
“네. 미쓰비시도 결국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이니 손익의 경중을 따지지 않겠습니까. 니찌레이 측과 달리 어업이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습니다. 만약 입어로 인한 손해를 벌충할 수 있다면 굳이 사모아 입어를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담합이 깨진다면 굳이 저희가 두 회사를 상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거 명안이로군.”
강태준의 말에 두 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일본의 담합을 깰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치밀한 전략을 세운 심 사장은 엘링턴 부사장과 함께 1958년 정월 초순, 먼저 미쓰비시 본사를 방문하여 당시 취체역 부사장인 이와사키 히로야를 만나 해당 의사를 전달했다. 처음에는 환대했던 히로야였지만 이내 엘링턴이 온 목적을 상기해 주자 얼굴이 굳어졌다.
“어획물를 장기 공급하겠다는 공급 보장 확약서를 써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한국 어선의 입어를 막게 하려면 그 정도는 해 주셔야죠. 저희 입장에서도 앞으로의 조업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담보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건 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윗선과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논의를 해 볼 필요도 있고.”
“그쪽이 전권을 가진 담당 책임자로 알고 있는데요. 장기 공급 보장 확약을 회피하신다면 무슨 근거로 당사가 어획물 확보하여 공장을 가동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모아에서 일본 어선의 조업 독점 횡포를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협상을 거부하신다면 저희도 많이 곤란합니다.”
“그 부분은 이해합니다만 저희도 지금까지 어업기지 개발에 투자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희 혼자 발을 빼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아요. 파트너인 니찌레이사에서 격하게 한국 어선의 사모아 입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보니…….”
히로야는 난색을 표했다. 추후 책임질 부분을 만들기 싫다는 태도에 이런 일찌감치 반응을 예상했던 엘링턴 부사장이 다시 말했다.
“설마하니 일본 같은 원양어업 대국이 한국의 진출이 두려우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한국 원양어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어구도 원시적인 데다 경험조차 일천한 만큼 기술이나 재정적으로나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어선이 들어온다고 해서 당장 일본 어선들이 당장 곤궁에 처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추후에 같은 해양자원을 갖고 싸울 것은 자명한 일이죠. 처음에는 한 척 허가받은 배는 11척이지만 나중에는 수십, 수백 척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건, 한국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시는군요. 한국의 어선 중 11척 모두가 입어하기까지는 향후 5~6년은 족히 걸릴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사이에 충분히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 테고요. 만약 미쓰비시 측에서 앞장서서 반대한다면, 미일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불똥이 튈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허어. 참.”
“반대로 미쓰비시가 찬성한다면 앞으로 한국에서 수주할 중고선과 관련해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엘링턴 부사장은 강태준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달하자 이와사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태동산업 측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처음 듣는군요. 그렇게 되면, 확실히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이군요.”
“그렇습니다. 어업으로 인한 손실이 있더라도 신규 조선 발주와 중고선 매각으로 벌충할 수 있다면 미쓰비시 측에는 더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사키 입장에서는 전혀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토야마루호 이후, 시운마루호는 물론, 연이은 해난사고가 악재처럼 터지면서 일본 정부가 노후선을 폐기하고 신규 조선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후선을 처분할 수 있다는 말은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 아닌가.
엘링턴 부사장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미쓰비시 고위층에게 그대로 전달하자 수뇌부 쪽에서도 곧장 태도를 바꾸기로 정했다. 함께 보조를 맞추기로 한 파트너가 발을 빼겠다는 소식에 마쓰자키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 듯이 구겨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한국 선단의 조업을 허락하라고?”
“이번만큼은 엘링턴 부사장의 말을 들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밴 캠프사와 태동산업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미국무성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엘링턴은 저희의 조업 진출을 도와준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서 아무 확답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쪽에서 요구하는 공급량이 이래 봐야 얼마나 된다고, 아닌 말로 수량이 부족하면 딴 데서 채우면 되지 않소?”
“불확실한 미래에 확답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20년이면 강산도 변할 세월입니다. 조업 환경은 지금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어자원이 고갈되어 인건비가 대폭 상승하거나 내수 쪽으로 물량이 몰릴 경우엔 어찌하겠습니까? 샌디에이고의 정어리 떼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곱씹어 보십시오.”
니찌레이사 입장에서는 미쓰비시의 담합 파기 방침은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의 행동 방침까지 정해 놓고는 이제 와 발을 빼겠다니. 분통이 터진 마쓰자키가 격하게 화를 냈다.
“이참에 아예 전령사로 전업하시지. 세상에, 이렇게 배알 없는 사람들 데리고 무슨 대업을 도모한단 말인가? 야합한 게 아니라면 혹시 퇴직 후 전직할 자리라도 알아보셨나?”
속으로 뜨끔한 이와사키가 몹시 불쾌해진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지금 저 들으라는 소립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귀사는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것 같으니. 그쪽은 그쪽 뜻대로 하시오. 우린 우리 방식대로 하겠소이다!”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니찌레이사에서는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펼치기로 했다. 그 공작은 일본의 수산청을 비롯해 통산성과 운수성 등 모든 관련 부처가 가담한 범정부적인 운동이었다.
니찌레이는 친기업 성향의 국회의원들을 설득해 한국의 원양어업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앞으로 일본은 한국산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한편, 한국을 상대로 여하한 중고선을 팔지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신규 조선의 일본 내 건조도 금지한다는 내용을 입안한 것이다. 저쪽에서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판에 심 사장은 당혹했다.
“어찌 된 일인가 강 항해사. 일본이 이렇게 나오다니. 이렇게 되면 숫제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셈이 아닌가?”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이번 일은 오히려 우리에게 잘된 일입니다.”
“아니 잘된 일이라니? 이게 어딜 봐서 잘된 일인가?”
“이번 건은 전적으로 니찌레이의 실수입니다. 오히려 과잉 대응으로 사안을 공론화하기 쉬워졌으니까요. 이번 일은 분명 정치적인 부메랑이 될 겁니다.”
과연 일본의 반응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잖아도 일제 시대의 앙금이 여전하던 시절인 만큼 일본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한국인들에게 전격적인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적반하장 이대로 좋은가?]
[좌초 위기의 원양어업. 그 해법은?]
고려일보와 태양일보 등 국내 주요 신문들은 원양어업의 성과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일본의 행위는 졸렬하기 그지없는 짓이라 성토했다.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사모아 입어는 일본 영해가 아닌 미국령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라 주장하며 일본의 주장이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섰다.
한국에서는 원양어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상황으로 변질되었다. 그처럼 여론이 끓어오르자 일본 내에서도 양쪽으로 의견이 갈렸다. 찬성하는 쪽은 당연히 사모아 진출 업체와 어민들이었고, 반대하는 쪽은 한국에서 발주한 선박의 발주를 맡은 일본 조선업계였다. 양 측의 입장은 팽팽하게 갈렸다.
“아니 한국의 건조 주문이 취소되면 그쪽에서 선박 발주하지 않을 것 같소? 결국 딴 나라에 발주할 텐데. 그럼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것 아니오? 그럼 그 손해가 대체 얼마겠는가?”
“그렇소. 사모아 조업 독식이 어떻게 국익을 대변한다는 거요? 더욱이 사모아에서는 고기가 썩어 날 만큼 많은가? 그걸 자기들끼리만 독식한다는 건 애초에 도둑놈의 심보 아닌가?”
미쓰비시 대신 조선업계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은 이시카와지마 중공업과 하리마 조선소였다.
차기 한국 선박이 추가로 발주되면 수주를 받을 확률이 유력한 만큼 니찌레이의 공격에 기선 제압에 나선 것이다.
일본 내 싸움이 격화되자 이만승 대통령도 가만있지 않았다
정무적 감각을 타고난 이만승은 지금같이 민감한 시기야말로 자기가 존재감을 부각시킬 적기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긴급 국무 회의를 소집한 언론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중고선을 팔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다. 부산 남항 부두에는 100톤급 상당의 배들이 이미 30여 척 이상 계류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평화선을 침범하다 한국 경비정에 나포된 일본 어선들이다. 만약 일본이 한국에 발주한 배를 양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에서는 나포된 어선을 개조해 남태평양으로 투입할 것이다!”
이만승의 사이다 발언은 국민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아무리 국내법에 따른 나포 선박이라고 해도 국제적인 마찰이 생길 소지가 다분했던 만큼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할 확률은 극히 희박한 수준.
일종의 쇼맨십 발언에 불과했지만, 일본 어민들의 반응은 매우 격했다.
“세상에 나포 선박을 원양어선으로 개조하겠다니 이건 완전히 미친놈들 아닌가?”
“이만승이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요. 아주 막 가자는 거지.”
“실제로 그렇게 되면, 우리 일본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아닌가?”
이만승의 말에 놀란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아이젠하워의 회담을 대놓고 파토 내기까지 한 이만승의 행적으로 보건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거기다 미국무성에까지 사건이 알려지자,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일본 정부에서는 이쯤에서 상황이 정리되길 원했다.
결국, 일본 농림수산성 장관까지 나서 니찌레이 측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마쓰자키 상, 아무래도 이번 일은 뜻대로 성사되기 어려울 것 같소.”
“한국의 입어를 허락하겠다고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배짱부릴 처지가 아니오. 미국무성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계속 클레임이 오고 있소. 알다시피 사모아는 미국령 아닌가. 미국에서는 일본이 입어권에 간섭하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는 분위기요. 계속 이런 식으로 강짜를 부리다간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소이다.”
“그럼 이대로 한국 놈들에게 사모아를 넘겨주란 말입니까?”
“넘겨주다니. 말이 과하지 않나. 사모아는 그리 작은 어장이 아닌 걸로 아는데 게다가 수산업계의 사정만 봐줄 수는 없지 않나. 통상 산업성을 비롯한 산업계 전반의 입장도 살펴봐야지. 원양어업계 요구만 무작정 수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오.”
“장관님, 이번 일을 근시안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조센징들을 몰라서 그러십니까. 한 번 물꼬를 터 주면 기어오를 놈들입니다. 아주 이참에 싹을 잘라 놔야 더는 덤비지 않습니다.”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해야지. 지금 명분이 부족하지 않소 명분이? 어차피 사모아는 고기가 넘쳐 나는 곳 아닌가. 설마 우리 대일본이 그렇게 쩨쩨하게 보여서야 되겠소?
“장관님!”
“분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양보하는 걸로 합시다.”
마쓰자키는 기를 쓰며 끝까지 반대했으나 대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 정관계의 압박을 못 이긴 니찌레이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입어를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