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밴 캠프
화난 양 선장이 씩씩대는 것도 무리가 아닌 일이었다.
“이런 씹어 죽일 자식 같으니라고.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여?”
“분명 뒷돈이라도 받았겠지요. 그보다 사태가 생각보다 안 좋군요. 이 상태로 가다간 입어가 정말로 취소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놈을 잡아 죽이는 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야. 지금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심 사장이었다. 태동산업은 이번 조업이 성공 시 추가로 11여 척을 사모아에 진출시키고 연간 1만 톤의 물량을 공급할 것을 조건으로 정부 융자와 각종 수출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이미 조선소에 발주해 건조 중인 신조선까지 있는 마당이니 여기서 계약이 파기된다면 그 운명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팔짱을 낀 심 사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계약이 파기되면 갚을 빚이 한두 푼이 아닐세.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사태의 추이만 살피다간 일본의 술수에 말려 버릴 수가 있지 않은가?”
“그건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미국에 가서 담판을 지어야 할 거 같네. 양 선장은 일단 지평호 수리부터 맡아 주게나. 그리고 이참에 우리 강 항해사도 밴 캠프 본사까지 동행하는 건 어떤가?”
갑작스레 지목당한 강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야말로 조업 전문가 아닌가. 엘링턴 부사장은 10년 차 참치잡이를 하던 선장 출신이기도 하니 자네가 있으면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하겠지. 게다가 자넨 영어도 제법 유창하지 않나."
“흐음…… 전문 통역도 있을 텐데 제가 과연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통역이 뛰어나도 전문 기술 용어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실무자가 필요하네.”
근 세 달간 미뤄 놓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쁜 처지였던 만큼 강태준은 출장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성패가 혹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원래 목표대로 원양어선 사업 쪽에 뛰어드는 일도 물 건너간다.
‘사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 일이 잘 풀리리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불안하다면 제대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겠지.’
지금 심 사장의 사정은 실제 역사보다 다소 불리하다. 넋 놓고 기다리다 입어가 취소되기라도 하면 최소 몇 년은 늦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참에 빚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한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제가 도움이 된다면 가야죠.”
“잘 생각했네. 그럼 빨리 준비하게, 수일 내로 출발하자고.”
한국 외무부의 도움을 받아서인지 비자는 엄청나게 빨리 나왔다.
그렇게 미국으로 날아간 심 사장 일행은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 있는 밴 캠프 본사를 방문해 엘링턴 부사장을 만났다.
미리 전갈을 받은 엘링턴 부사장은 손수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성의를 보였다.
“아이쿠야 미스터 심.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고생은 무슨. 소식은 들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점입가경이지요. 일본 측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압박을 가하는 중이라서요. 지금 일본계와 접촉 금지령까지 내려진 상황이지요.”
숫기가 적은 엘링턴 부사장은 그러잖아도 휑한 이마를 쓸며 쓴웃음을 지었다.
작정한 일본 쪽에서는 한국조업을 방해하기 위해 더티 플레이까지 동원했다.
아예 미국 상무부에 전문 로비스트까지 동원해 가며 한국 어선의 사모아 입어 저지를 위해 야료를 부리고 있었던 것. 그다지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심 사장의 입장에서는 성가신 일이었다.
“예측했던 일이지만 일본 놈들 실로 추접스럽기 그지없군요. 이건 억지 아닙니까. 사모아가 자기네들 영해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지요. 사실 첨에는 태동산업이 제대로 납품할 능력도 안 되면서 입어를 허락했다 뭐라 하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운송한 어획물의 상태를 확인하곤 입을 다물더군요. 냉동 상태가 워낙 훌륭해서요. 비행기로 운송되는 동안 어획물이 전혀 상하지 않고 선도가 유지되어 있더군요. 제가 본 물건 중에 최상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부분은 위안이 되네요.”
“저희도 이렇게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굴복하면 추후 끌려다닐 공산이 크니까요. 이미 우리는 운명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의견이 같다니. 말씀만으로도 힘이 나는군요.”
엘린턴의 격려에 심 사장의 이마 주름이 조금 펴졌다. 사실 이번 조업 계획은 ECA 원조 자금 지원을 통해 구입한 한국 원양어선으로 수행된 사업인 만큼 미국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 물밑으로 미행정부의 오더를 받아 민관정책을 수행하는 엘링턴 부사장으로선 이번 일의 성패가 자기 커리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본 측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일단은 공급 물량을 고려할 때 저희 회사 쪽에서도 주된 납품처와 끝까지 척을 질 수는 없으니까요.”
“방도가 있겠습니까?”
“일단 일본 회사들의 담합을 깨는 것이 우선입니다만 마땅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더군요. 지금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모인 일행은 본사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해 봐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는다.
한참 토론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대책이 뭐 있겠습니까? 동경으로 직접 가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죠. 옛말에도 굴속에 들어가야 사자의 수염을 잡는다지 않았습니까?”
수행 비서로 보였던 녀석의 지적에 엘링턴의 눈에 짜증이 어렸다. 가뜩이나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라 신경이 날카로웠는데 중간에 어쭙잖게 끼어들 줄이야. 엘링턴이 퉁명스레 말했다.
“흠…… 그런 말을 하는 자넨 대체 누군가?”
“아. 정신이 팔려서 소개가 늦었군요. 이 친구는 우리 지평호의 First Chief Mate (일등 항해사)인 강태준입니다. 이번에 첫 조업을 지휘한 친구죠.”
“아 무척 젊은 친구군요, 반갑습니다.”
“예. 처음 인사 올립니다.”
심 사장의 설명에 엘링턴은 아까보다는 약간 풀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엘링턴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끼어든 이유를 듣고 싶군. 강 항해사는 무슨 생각이 있어서 말을 꺼낸 건가?”
“듣자 하니 답답해서요. 상대가 담합을 했다면 약한 쪽부터 공략해야 하는 게 최선 아니겠습니까?”
“그건 나도 알지만 대체 누굴 공략하라는 소린가?”
“지금 일본의 니찌레이와 미쓰비시 두 회사가 한국 어선의 사모아 입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회사도 몇 개 입어를 타진하고 있지만, 실질적 주력은 이 양대 회사죠. 따라서 일단은 미쓰비시 부사장인 이와사키 씨를 타깃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건 왜지?”
“일단 미쓰비시 쪽 대표인 이와사키 히로야 씨는 재벌 가문 출신이죠. 미쓰비시는 전후 해체되어 재합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미국과의 전면 대치가 부담스러울 겁니다. 더욱이 니찌레이는 주력이 식료사업인 반면, 반대로 미쓰비시 측은 여러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으니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잖은가. 해체된 기업을 다시 합칠 정도면 오히려 미국을 상대로 자신감을 가질 만한데, 반드시 협상에 나올 이유는 없지 않나?”
“그렇게 따진다면 니찌레이 쪽은 더 답이 없습니다. 책임자인 마쓰자키 취체역 사장은 캐나다 국적을 가진 일본계 전문 경영인입니다. 다시 말해, 무조건 임기 내 실적을 내야 하는 입장이죠. 한국 어선이 입어하면 자기 실적에 스크레치가 날 테니. 아마 미쓰비시 측에서는 니찌레이의 말을 따르기는 하되 자기를 주력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강태준의 말에 문득 깨달았다는 듯 재차 턱을 쓰다듬는 엘링턴이었다.
“흠. 생각해 보니 그렇구먼. 확실히 그래. 그럼 미쓰비시 측에서는 그냥 억지로 따라갔다는 말인가?”
“아마도 분위기를 주도하진 않았을 테니, 대세에 따라 보조를 맞춘 것이겠죠.”
“하지만 이미 이렇게 일이 벌어진 이상 미쓰비시 측도 물러날 명분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선 밴 캠프사가 한국 어선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전후 한국 경제의 재건을 고려한 미국 정부의 외교 정책에 편승한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특히 미국 국무성의 지원 정책을 일본 민간 기업이 반대한다면 외교 마찰이 야기된다는 점을 설파하여야죠. 일본 기업으로선 미정부 시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하기에는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논리는 그럴듯하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영 부족하지 않은가? 미국의 대일 정책은 알다시피 그리 일관적이지 않아. 게다가 정부 시책이라는 말은 포장하기에 너무 인위적인 단어라 그다지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군.”
여전히 공격적인 엘링턴의 말투에 강태준이 빙그레 웃었다.
“물론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니 밴 캠프사 쪽에서 먼저 역제안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역제안이라고?”
“네. 일본 측에서 한국 어선의 입어를 반대한다면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후 20년 동안 공장 가동에 문제가 없도록 안정적으로 어획물을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 요구하십시오. 불이행 시 징벌적 손해 배상금으로 손실액의 열 배 이상 배상하는 조건으로. 그러면 한국선의 입어를 연기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추후 안정적인 어획량 공급을 약속해 달라는 어그리먼트 (Agreement)를 받아라?”
“네. 밴 캠프에서도 그 정도 확약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상을 찡그리는 엘링턴이 고민하는 사이, 심 사장이 우려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다 그쪽에서 덜컥 응낙하기라도 하면? 그럼 우린 완전히 새 되는 걸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담컨대 미쓰비시 측에서는 공급 보장을 확답해 줄 수 없습니다.”
“왜?”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시죠. 바다는 시시각각 어획량이 변화하는 공간입니다. 엘링턴 부사장님이 그 입장이라면 쉬이 공급 보장을 확약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도 공급 보장은 상당히 곤란하지, 일본 기업가들은 대단히 보수적인 성향으로 공급 불이행 시 징벌적 배상금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다면 그쪽 입장이 난감해지겠지. 그렇다면 이와사키 히로야 역시 이와사키 가문의 일원으로서 추후 책임질 부분은 되도록 피하려고 할 게 분명할 거다 이 말이군.”
“게다가 이와사키 히로야 입장에서는 그렇게 독박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강태준의 전략 전술에 엘링턴이 다시 물었다.
“그럼 미쓰비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니찌레이는 어쩔 건가? 그쪽은 여전히 반대할 텐데?”
“그건 여론전으로 가야지요. 미쓰비시 같은 재벌 기업이면 몰라도 니찌레이 정도야 해 볼 만한 상대 아닙니까? 좀만 생각해 보면 우리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본 내에서 우리를 지원할 우군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일본 내에서 우군을 말인가? 어떻게?”
“그 전에 심 사장님께 묻겠습니다. 정부 측에서는 한국 어선의 입어를 이미 기정사실로 한 가운데 향후 순차적으로 도합 11척을 구입하기로 하였지요?”
“응. 그렇지. 일단. 미국 국제 협조처(ICA)로부터 융통한 15만 달러를 계약금을 바탕으로 일본의 우즈키 조선소에다 100톤급 제2, 3의 지평호 건조를 의뢰했네.”
“그렇다면 잘되었습니다. 추후 발주될 물량도 일본의 조선소에 발주할 확률이 높다고 정보를 흘리시지요. 만약 이번 일로 태동산업의 사모아 입어가 불가능해져서 건조 중인 배의 구매를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보도를 접한 일본 조선업계가 어떻게 나올까요?”
“반발이 심하겠지. 자기네들 밥그릇에 손해가 되는 일이니 가만있지 않을 걸세.”
“게다가 앞으로 발주될 선박 중 상당수가 미쓰비시 중공업 쪽에 발주하기로 협상 중이었다면?”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