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차고스 제도
침로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 해도를 앞에 두고 이주혁 지도관과 양재문 선장은 장고를 거듭했다. 졸지에 일등 항해사가 된 강태준도 간부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다고 보나?”
“우리 위치가 여기 인도양 근방이니, 제 생각으로는 믈라카 해협을 빠져나가 인도양으로 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럼 니코바르 쪽으로?”
“아뇨. 거기가 아니라, 차고스 제도까지는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태준이 찍은 곳은 인도 남부, 니코바르로부터 한참 아래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차고스 제도라니 여긴 몰디브 아래쪽 아닌가?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참치가 자주 잡히는 사모아는 남위 15도 이하의 해역입니다. 허탕 친 남중국해를 다시 북상하며 주낙을 깔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남회귀선 쪽까지 제대로 가 보자는 겁니다.”
“거긴 너무 멀지 않나? 니코바르라면 몰라도 영국령까지 가는 건 진심 미친 짓 아닌가.”
이주혁 지도관이 미심쩍은 듯 반대 의견을 냈지만, 강태준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적도 윗 지역으로 가 봐야 어황을 기대하기 힘들 테니 이쪽으로 가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게 근거는 있는 이야긴가?”
“니코바르 쪽은 계절풍 해류가 회유하는 지역입니다. 해류의 흐름을 고려할 때 지금 같은 여름에는 회유성 물고기들이 많지 않을 것이 분명하죠. 왜 참치가 사모아 인근 해역에 왜 많이 잡히겠습니까? 남적도 해류가 도는 차고스 제도는 남태평양과 조업 환경과 비슷하니 그쪽을 노리는 게 성공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흐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이 지도관이 입을 다물었지만 양 선장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나도 얼핏 듣기는 했네. 그쪽이 산호 지대인 만큼 먹이도 풍부하고 어군이 좋다고 하더군. 하지만 거리상 너무 멀지 않은가?”
“하지만 장담컨대 안다만 해역에서 알바코나 옐로우핀 같은 고급 어종은 단 한 마리도 구경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외국 배들이 왜 거기까지 출항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판단이지만 니코바르 섬 근처에서 열심히 주낙을 깔아 보았자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모건 씨는 분명 가능하다 하지 않았나?”
“그건 양반이 허풍 떤 거지요. 선장님, 모건 씨는 출어한 지 무려 1달을 허송세월하지 않았습니까? 어장 왕복에 소요되는 항해 일수를 빼면 조업 가능한 날짜야 겨우 10일 남짓입니다. 200여 톤 이상의 어획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20톤 이상씩 고기를 잡아 올려야 하는데 이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선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허탕 친 걸 감안해 도박이라도 해 보자는 건가?”
“네. 인도양에서 잡히는 알바코는 참치 중에서도 가장 어가가 높은 품종입니다. 톤당 4~500달러 정도 하지요. 거기서 10톤씩만 낚아도 지금껏 들인 비용은 회수할 수 있습니다.”
주름살이 늘어난 양 선장은 여전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차고스까지는 3,700km가 넘네. 그 거리를 항해하고 성과가 없으면…….”
“어차피 니코바르까지도 최소 2,500km 정도 아닙니까. 어차피 멀리 갈 수밖에 없다면 가능성이 큰 쪽에 배팅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갑판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도. 차고스 쪽에 한 표 넣겠습니다.”
“아니 염일우 자네까지 왜 그래?”
“선장님. 어창을 한번 보십시오, 안이 텅텅 비었습니다. 1,200킬로 정도 더 항해한다 해도 배가 가벼우니 항해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속는 셈 치고 가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갑판장인 염일우의 말에 다른 선원들도 찬동했다.
“네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태준이 말대로 합시다.”
“자네들도 같은 생각인가?”
“어차피 이판사판입니다. 저도 혼수 비용은 해 가야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선원들의 태도는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빈손으로 귀향하느니, 차라리 도박이라도 해 보자는 심산이랄까. 양 선장이 이주혁 지도관에게 물었다.
“이 지도관님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나도 강 항해사 의견에 찬동하네, 캡틴. 이미 우리는 호랑이 등을 탔어.”
어깨를 으쓱이는 이주혁 지도관에 선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해 보면 이제껏 강태준의 판단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처음부터 남태평양 쪽으로 방향만 틀었어도 이런 삽질은 없지 않았던가.
헷또인 윤기진조차 장고 중인 선장을 부추겼다.
“선장님, 우리 솔직히 까고 말해 봅시다. 김정욱이를 하선시켰으니 이제는 막다른 길목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조업 결과가 시원찮으면 캡틴 입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개고생하고 손에 쥐는 돈은 한 푼도 없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결연한 선원들의 눈빛에 선장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홧김에 사장 조카까지 강제로 하선시켰으니 조업에 실패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선장 맘대로 해 놓고 성과를 못 낸다면 막말로 무능을 증명하는 꼴이니 뒷감당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조업에 성공해야 한다.
“그래, 자네 말대로 한번 해 보자고! 사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강 초사!”
“예. 선장님!”
“선수를 차고스로 돌리게! 조업 성공해서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배는 새로이 말레이시아 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 말라카 해협의 서북쪽으로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시속 20노트(37km)의 속도로 달린 배는 남위 6도와 동경 83도 부근을 항진해 침로를 변침하면 이틀 내에 차고스 제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쏴아아아아아!
지평호는 운명의 바다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비말로 가득 찬 바다에서 튀긴 물방울이 시야를 사정없이 차단하고 있었고, 허공을 찢다시피 한 바람 소리는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바다는 살아 있는 살점처럼 쉬지 않고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들었는데 그 소음이 비명처럼 소름 끼쳤다.
거대한 산처럼 골이 만들어지면서 선체를 뒤흔드는 통에 마스트 꼭대기보다 더 높이 솟아오른 파도가 강풍에 부딪혀서 산산 조각났다.
이내 깨진 비말이 갑판 위를 회오리치자 선체가 파곡에 곤두박질쳤다. 한 번 파도 아래로 입수했다 나온 배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고글을 낀 선장이 성질을 부렸다.
“바람 세기가 7이라더니 기상 예보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런 개같은 놈들!”
“하하! 이 정도면 태풍 초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대해에서 이 정도면 양호한 거죠. 으럇!”
“흰소리 말고 마스트 잡아!”
여유 있는 척 가오를 부리기는 했지만, 갑판장도 팔근육이 경련하는 중이다. 마치 성난 사자가 갈기를 부풀리듯 맹렬하게 요동치는 파도에 애를 먹었던 것이다.
언제나 30도 각도로 물에 꽂혀 있던 주낙이 머리 위로 솟구치기도 여러 번.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에 고전하는 찰나, 그때 산처럼 큰 파도가 덮쳤다.
“시부랄, 온다! 와!”
“여, 쓸려 가지 않게 조심해! 떨어지면 뒈진다.”
큰 파도가 돌격병처럼 쓸고 지나가자 갑판 위는 물에 잠겼다.
파도가 밀어낸 갑판 위는 물놀이를 하던 풀장처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복원력을 지닌 배가 오뚝이처럼 일어나며 뱃값이 아깝지 않음을 증명했지만, 선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걱정된 선장은 몇 번이나 확인을 반복할 정도였다.
“야! 누구 바다에 빠진 사람 없어? 당장 대가리 숫자 맞춰 봐.”
갑판장이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마스트를 휘어잡은 헷또가 수를 헤아렸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뱃전을 넘어온 파도 더미가 계속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띄엄띄엄 수를 세던 헷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변했다.
“두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요?”
“응, 다시 세어 봐, 누가 없다는 거야?”
갑판장이 고함을 치자, 헷또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저, 정호랑 응팔이가 보이지 않아요.”
“이런 시발. 설마 이 상황에서 물에 빠졌다는 거야?”
해풍이 귀를 찢고 있었지만, 선장 역시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변정호는 마누라 등쌀에 못 이겨 바다로 취업해서 탈출했다는 친구였고, 박응팔은 돈 벌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문도에서 상경했단 녀석이다. 장사에 망한 빚을 갚으려 주야장천 바다에만 떠돌아다니고 있던 입장인 만큼, 못내 마음이 걸렸다.
“젠장, 곰 같은 마누라 피하려다 아주 사람 잡게 생겼군.”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어여 어딨는지 찾아봐!”
태풍이 치는 배 위에서 바로 떨어지면 그대로 끝.
하지만 선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 결과 작업은 아예 중지되었고, 선원들은 수색한다고 한바탕 난리굿을 벌였다.
“없소이다. 진짜 뒤진 거 아녀?”
“젠장 총각 귀신 된 거 아냐?”
“재수 없는 소리 말고 다 뒤진 거 맞아?”
“예…… 선실에도 가 봤는데 아무 데도 없습니다.”
“허 미치겠구마. 진짜 아무 데도 없나?”
연이은 악재에 양재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벌써부터 실종이라니, 무슨 마가 낀 건가. 선장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자, 선원들의 표정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모두 무슨 말을 할까 눈치를 보는 가운데, 강태준이 퍼뜩 냉동실에 생각이 미쳤다.
“아, 냉동실 안은 찾아봤습니까?”
“예? 거긴 아직 안 가 봤는데? 설마 거기 처박혀 있겠나?”
“아침에 일 맡겼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어획물 담당인데, 아직 작업 중일 수도 있잖아요?”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보니 정말이었다. 어창에서 작업 정리를 하던 둘을 발견한 선원들이 아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명은 멀뚱한 얼굴로 몰려온 선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그렇게 우르르 몰려와서는 추가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 이 인간들이 정말…….”
서로를 돌아본 선원들이 그제서야 한숨을 놓았다.
심장이 덜컥했던 양 선장 역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냉동실에 들어가 있었어? 조업 중에 실내에 들어가면 어떡하나? 바다에 빠진 줄 알았잖아…….”
“아니, 그게 갑판장님이 썩기 전에 처리하라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그랬나? 하하. 정신이 없어서 원.”
단체로 유체 이탈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따가워진 시선에 갑판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맥이 풀린 선장이었지만 더는 조업의 의욕이 없었다.
“그만하지. 그래도 살았으면 됐네. 이쯤에서 투승 거둬. 사람 잡겠군.”
미친 듯 성질을 부리던 바다가 평정심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 선체의 요동에 너무 시달리고 보니 식사는 거르기 일쑤. 잠을 잘 수 없던 사람들의 눈은 퀭하게 변했다.
어둡던 하늘은 차차 밝아지면서 비가 멈췄고, 파도 위에 일었던 거품도 이제 드문드문할 뿐, 숨을 골랐다.
건들어지는 해류를 보던 양재문이 불안한 듯 강태준에게 물었다.
“초사, 이번엔 제대로 온 거 맞지?”
“예. 동경 70도를 지났으니 거의 도착한 거 맞습니다.”
“태풍이 또 올 확률은?”
“아까 북진한 태풍의 여력일 뿐, 날이 저물기 전 파도가 약해질 겁니다. 지금이 투승할 시점이라 사료됩니다.”
강태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파도는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긴 트림을 늦추지 않았지만 구름 사이론 파란 하늘이 트이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