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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76화 (76/361)

76화 항해사의 자격

선장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 벼락같이 조타실로 뛰어든 강태준. 그 순간 의자 위에 몸을 뒤로 젖힌 채 잠에 빠진 김정욱이 보였다.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강태준이 싸대기를 갈기며 멱살을 잡았다.

“이런 미친 양반이! 일어나지 못하겠습니까?”

“뭐, 뭐야?”

“이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지금 배가 침몰하기 직전이란 말이오!”

“응?”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김정욱이 허둥지둥하자, 보다 못한 강태준은 상대를 밀쳐 내고 타륜을 잡았다. 자동으로 젖힌 레버를 수동으로 돌린 강태준.

엔진 텔레그레프를 슬로우 어헤드에 놓고 키를 오른쪽으로 최대한으로 돌렸다.

시선은 타각 지시기에 못 박힌 채.

희미한 불빛을 담은 타각 지시기가 조타 스탠드의 천장에 걸려 있었다.

지시기의 바늘이 단번에 50까지 팽그르르 돌아갔다. 목이 뻐근해지고 두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다.

성급하게 꺾다가는 배가 좌초할 수도 있는 급선회였지만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할 사정이 없었다. 무려 2백 30톤이나 되는 쇳덩이의 방향 전환에 배는 우현으로 크게 기울었다. 다시 바로 서는가 했던 배가 회두 타력을 얻었는지 거세게 출렁거렸다.

“어어어어!!”

“이 무슨?”

배가 급격하게 선회하며 기우뚱 대자 강태준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강태준은 해저 장애물이 선저를 긁어 대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나 집중하고 있었다.

철판에 구멍 하나만 나도 치명적인 상황.

시시각각 숨을 조여드는 상황이었지만 잠에서 깨어난 선원들이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선수가 거의 남쪽으로 돌아갔다. 허연 물거품이 뱃전을 치자 강태준은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2백 20도, 2백 10도, 2백 5도…….

이미 육안으로 파도가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소라고둥이며 게딱지까지 보일 만큼, 시커먼 바위가 지척에 아른거리는 것이 당장 암초에 올라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강태준은 숨을 죽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넘실대던 파도에 기우뚱거리던 배가 점점 멀어졌다. 선회에 성공했는지 선수부가 장애물에 밀어붙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강태준이 키를 서서히 되돌렸지만, 긴장이 풀지 않은 채 한참을 꼼짝 안고 서 있었다.

그제야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한 김정욱이 겁먹은 듯이 물었다.

“해, 해결한 건가?”

“잠시만요. 아직입니다.”

강태준이 레이더 스위치를 켜자 금속성의 음향과 함께 브리지 안을 크게 울렸다.

동시에 ON이라고 켜진 램프가 불이 들어오기 무섭게. 배의 좌현 쪽을 살피는 강태준.

아직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를 들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위험 구간을 돌파하려면 방법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강태준은 직감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았다.

감각에 의지해 엔진 텔레그레프를 풀 어헤드로 밀어젖힌 것이다.

구우우우우~~~.

그 순간 반짝하고 레인지 표지 램프에 불이 들어온다.

좌반원에 흰 얼룩이 잉크처럼 번진 것을 확인한 강태준.

좌현 뱃전에 바싹 붙어 있는 흰 자국의 레인지를 읽어 보니 고작 2마일에 불과한 수준.

산호 지대였다.

배의 좌현에 지뢰밭이 깔려 있었던 것

고작해야 5~6분 거리. 불과 5분만 배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도 배는 그대로 산호초에 얹혀 버렸을 것.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등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저도 모르게 모자 안쪽을 어루만진 강태준.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닦아 내는 중, 뒤늦게 헐레벌떡 조타실로 들어온 선장이 다급히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건가?”

“장애물이 있어서 직권으로 처리했습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들이 지나친 곳은 싱가포르 북동쪽 264km에 위치한 리아우 제도주에 속하는 섬으로 케푸라니안 아남바스라 부르는 군도.

마티크섬 동쪽에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작은 돌섬들이 자잘하게 늘어서 있었다.

남위 7도 20분, 동경 1백 5도 5분 되는 위치에서 선수를 꺾자 다른 항행선들은 수평선 까마득히 항해등을 밝힌 채 안전 항행을 하는 것이 보였다.

사정을 보고받은 갑판 위는 살기가 등등했다.

이미 공연한 거짓 보고를 내버려 둘 만한 일이 아니었다.

투승 중 변침은 공공연히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자는 중에 요란하게 배를 흔들어 대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잠에서 갓 깬 선장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도살장에 오르는 소처럼 뛰쳐나온 김정욱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가운데 선장이 다짜고짜 김정욱의 볼을 갈겼다.

“이런 정신 빠진 놈을 보게. 견시도 제대로 못 해!”

선장의 손찌검에 1등 항해사의 왼쪽 뺨에서 불이 번쩍 났다. 비틀대는 초사가 겨우 차렷 자세를 하자, 속사포처럼 욕설이 쏟아졌다.

살기가 등등한 선장의 눈은 그야말로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봐, 니가 초사 맞아? 항해 교육까지 받았다는 항해사가 이따위야? 배를 놔두고 어디서 뭘 한 거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실습 시간엔 쳐 졸았어? 오토 파일럿팅은 조업 중에나 하는 거지. 어디 항해 중에 잠을 자. 미리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대형 화물선이 경로에 겹쳤으면 한순간에 끝장이었을 뻔하지 않았나?”

사실 김정욱으로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는 것이 항 내에서나 협수로 같은 곳과 달리 조업 중에는 정확한 보침이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정욱은 부지불식간에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자이로 컴퍼스에 2도 정도 오차가 있다는 것을 까먹은 탓에 항로를 이탈했고, 그 덕분에 배는 케푸라우안 군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몇 분만 늦었어도 230톤짜리 강선은 그대로 돌섬과 충돌해 타이타닉 꼴이 나 버렸을 것이 아닌가. 십 분 남짓한 기간 쉴 새 없이 쏘아 붙고도 분기가 풀리지 않는지 양 선장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임마, 선원법대로 하면 넌 하선감이야, 선원법상 해원의 의무조항이 뭔지 아나?”

“예.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외워 봐!”

양 선장의 호통에 김정욱은 우물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뭍에서만 일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하얀 백지처럼 변한 머리에 김정욱이 머뭇거리자 열이 오른 양재문이 재차 타박했다.

“이거 봐, 기본적인 항행 규정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배를 모나? 니가 그러고도 초사야? 그럼 선장이 무슨 권한이 있는지. 해당 조문이 몇조인가? 대답 못 해?”

“그, 그게…….”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는 시선들에 김정욱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경멸 섞인 눈초리를 보내던 양 선장이 이번엔 강태준을 향해 물었다.

“쯧쯧. 2항사 자네가 읊어 봐! 선장에게 무슨 권한이 있는지!”

“옙. 선장님. 제7조 상 선장은 선원을 지휘 감독함과 더불어 선내에 있는 자에게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장이 어떤 처벌을 내릴 수 있나?”

“제24조에 따르면 현저하게 직무가 해태하거나 직무에 관하여 중대한 과실이 있어 직무에 부적임할 경우 선원을…… 징계할 수 있습니다.”

해고를 징계로 바꾼 강태준이 슬쩍 선장의 눈치를 보았다. 모멸감에 입가를 씰룩대는 김정욱에 양 선장이 빈정거렸다.

“눈깔 보게. 야 아직 졸업 전인 실습 사관조차 다 아는 내용을 자네가 몰라? 항해사 자격 가진 인간이 그런 것쯤도 모르는가?”

“제가 잘못했다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고 없이 넘어갔는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사람이 피곤해서 실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나니 약이 올라 욱하는 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항명 사태에 낯빛이 기함한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표정이 달라지기 무섭게 이성이 툭 하고 끊긴 양 선장이 일갈했다.

“뭐라고, 이쯤 해 두라고? 이 새끼가 이게 누굴 바지저고리로 알아! 이 자식이!”

“아이구, 선장님! 제발 참으십시오!”

화난 선장은 길길이 날뛰자 선원들이 달려들어 뜯어말렸다.

갈 데까지 간 김정욱도 약이 올랐는지 얼굴을 꼿꼿이 치켜들며 대들었다.

“씨발, 그냥 내가 배에서 내리면 될 거 아뇨?”

“뭐 이런 호래자식이 있나? 뚫린 입이라고. 배를 침몰시킬 뻔하고도 반성할 줄을 몰라?”

분노한 양 선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이윽고 싸늘하게 변했다.

“지 입으로 내린다 했으니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저 새끼 선실에 감금하고, 못 나오게 해! 항구 도착 즉시 하선시킬 테니까.”

“그게 무슨. 읍읍!!!”

더 이상의 항명은 허용될 수 없다. 김정욱을 결박한 선원들이 강제로 그를 붙잡고 객실로 처넣었다. 사실상의 금고 조치에 화를 삭인 양 선장이 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김 항해사는 동법 26조 규정에 따라 모든 직무에서 배제된다. 또한 제반 직무 태도가 불량하고 언행이 타 선원의 직무 수행을 현저히 방해할 우려가 있는 만큼 식사나 용변 등의 목적을 제외한 어떤 이유로도 업무 장소에 대한 출입을 금하도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조치하도록. 앞으로 1항사는 강태준이 맡는다. 그리고 이주혁 지도관님.”

“예.”

“증인으로서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화가 난 선장이 곧바로 징계서를 올렸다.

- 항해사 김정욱은 선원법 7조 및 34항에 명시된 해원 의무사항을 위반했으므로 제23조 징계 규정에 따라 차 기항지에서 하선 및 강제송환 조치한다.

분노한 선장은 김정욱의 귀환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며 이후 제30조 송환과 관련된 모든 비용은 동인의 비용으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선 조치를 받는다는 것은 선원으로서 사형선고와도 같은 만큼 엄청난 중징계.

사태를 관전한 선원들 역시 이번 사건의 여파에 대해 말이 많았다.

“사장님께서 과연 김정욱이를 짜를까?”

“당연하지 않나? 옛날 같으면 렛고감이지. 바이킹들 같으면 난동자나 반란자를 마스트 꼭대기에 매달아버렸을걸.”

“아무리 조카라도 배가 침몰할 뻔했으니. 당장에 바닷속에 처박고 싶은 심정일 걸세.”

양 선장은 모가지를 걸고서라도 의지를 관철시킬 생각이었다.

다행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회신은 신속 짤막했다.

[항해사 김정욱을 직위 해제하고 하선을 명한다. 단, 조업은 속행 요망.]

항행 중 태업으로 배를 침몰시킬 뻔했다는 말에 천하의 심 사장조차 마음이 돌아선 것이다.

직위 해제당한 김정욱은 곧바로 귀국 길에 올랐고, 심 사장은 추가 연료 보급을 위해 백방으로 연줄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상공부에서 상무부장을 지낸 손범성이란 사람이 싱가포르에서 대한 무역 진흥공사를 설립해 생고무를 수입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상공부 관료들과 안면이 있던 심 사장에게는 그야말로 희소식. 그렇게 급전으로 빌린 돈은 총 싱가폴 달러로 8,000 정도(달러로 4,000 정도). 2부 이자를 붙여서 얻은 돈 중에서 3,000달러로는 우선 기름부터 채우고 나머지는 선원들 부식과 식량 구입 및 기타 선용품을 사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재충전을 완료한 지평호가 재출항할 준비가 된 것은 달이 두 번이나 바뀐 8월 초.

이제 남은 시간은 한 달가량.

귀국하기까지 걸릴 항해 기간을 빼면 앞으로 남은 조업 기간이라야 겨우 열흘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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